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茫茫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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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3-03-07 07:02 조회1,5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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茫茫大海

강추자







등장인물



溫王 (27세, 반벙어리)

雅實 (25세, 女從)

忍忍 (25세, 男從, 난장이, 궁중의 어릿광대)

사내 1․2 (웃는 모습의 하얀 탈을 쓰고 있다)



때 : 고려말(高麗末) 삼별초의 난(亂)

곳 : 서남해(西南海)의 진도(珍島)

무대

망망대해(茫茫大海). 점점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이 호리전트에 비친다. 중심 무대는 진도 용장성(龍藏城)의 한구석에 서 있는 다 헐어빠진 누각(樓閣).



막이 오르면ꠏꠏꠏ

무대는 캄캄한 암흑 속에 잠겨 있다. 배중손과 군사들의 소리들이 들리는 동안 무대에는 여기저기에서 화포(火砲)가 터지고 불화살이 난다.



배중손 : (소리. 둥둥둥 북소리 들린다. 그에 이어 배중손의 목소리가 들린다) 몽고군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살륙하니 무릇 나라를 구하려는 자는 모두 구정(毬庭)에 모여라!

군사들 : (소리. 함성) 와! 나라를 살리자! 몽고군을 쳐부수자!

배중손 : (소리) 강화도 연안을 폐진(閉鎭)한다. 금강고(金剛庫)의 병기를 꺼내라!

군사들 : (소리, 함성) 와!

배중손 : (소리) 왕족 승화후(承化候) 온(溫)으로 하여 왕을 삼는다!

군사들 : (소리, 함성) 승화후 온 만세! 왕 폐한 만세!

배중손 : (약간 다급한 목소리) 강화도를 떠난다. 진도에 집결하라!



군사들의 함성, 잠시 무대를 진동시키다 사라진다. 깊은 암흑속에 무서운 고요가 무대를 덮는다. 잠시후 파도소리 서서히 커졌다 사라진다. ‘꼬끼요!’ 첫닭 울음소리가 신호로 한줄기 빛, 누각으로 쏟아진다. 그 빛줄기 안에 허우적거리는 두 손이 보인다. 왕의 황금빛 옷소매자락이 펄럭인다.



溫王 : (악몽 속에 휘말린 듯 외마디 비명소리) 아! 으으! 아!



‘꼬끼요!’ 다시 닭 울음소리. 온왕, 소매로 눈을 가린 채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 서슬에 온왕의 침대 밑에서 쭈그리고 자고 있던 인인마저 소스라쳐 일어난다.



忍忍 : (벌떡 일어나 앉으며) 어이쿠! 깜짝이야!

雅實 : (누각 뒤에서 달려 나온다) 또 악몽을 꾸신 모양이옵니다. (아이에게 하듯 온왕의 침구를 바로 해준다) 첫닭이 울었을 뿐이옵니다. 더 주무시옵소서.

忍忍 : (약간 투덜거리며 누각을 내려온다) 젠장할…… 도대체 왕이 꾸는 저 악몽들은 대체 어떤 것일까? 무겁디 무거운 무쇠더미에 깔린 듯 지르는 신음소리.

저승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 같은 저 무서운 소리…… 저 소리를 들을 적마다 살아 있는 나까지 저승에 떨어진 듯 간이 오그라붙는단 말야. 진도에 오신 후론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으니 도대체 무슨 꿈을 꾸시길래 저 모양일까? 아이구 죽겠다. 이 곳에서 한잠 더 자볼까? (바위를 등에 대고 다리를 뻗는다)

雅實 : 이건 정말 너무나 가혹한 장난이야. 우리 도련님이 무슨 죄를 지셨길래…… 철모르던 도련님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왕이 되셨어. 그것도 고려조의 왕족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반란군의 왕이 되신 거야.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해야 할 그런 일이었지. 도련님이 왕이 되신 이유란 단지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만이 이유라면 이유가 되었었지. 정말, 도련님이 왕이 되신 계기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니까.

忍忍 : 무슨 새삼스러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여? 도련님은 왕이 되어 궁중에 들어오신 후에도 왕이란 어떤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었어. 다만 의자가 굉장히 호화롭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르셨단 말이여.

雅實 : (약간 격해진다) 허수아비였어, 허수아비. 그들이 꾸민 놀이마당에서 춤을 추는 허수아비.

忍忍 : 왕은 나에겐 좋은 놀이상대였었어.

雅實 : 하지만 요새는 그분의 거동이 달라졌어. 눈빛은 저기 검고 푸른 바다와 같이 깊이를 갖기 시작했단 말이야. 슬픈 얼굴을 자주 하고 계셨어. 그전에는 없던 일이었지. 검게 가라앉은 바닷빛을 닮아가는 그 눈빛은 어떤 징조로 보였어. 왕은 그후부터 가위에 눌리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지.



이때 하얀 탈바가지를 쓴 두 명의 사내가 무대 오른쪽에서 나무관을 맞잡고 나온다. 그들은 이쪽의 왕이나 아실, 인인등의 존재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 무표정하게 가락을 맞춘다. 그 가락은 흡사 어부들의 노래가락이다.



사내1 : 어허야 디여! 어허야! 저승가는 가까운 길

사내2 : 어허야 디여! 고깃밥이 되는구나. 어허야 디여! 어허야!



사내들 왼쪽으로 사라지고 뒤이어 관을 물에 던지는 소리가 ‘풍덩’ 들린다.



溫王 : (‘풍덩’ 소리와 때를 같이하여 벌떡 일어난다) 으! 으아아! 으! (사내들 사라진쪽을 가리킨다)

忍忍 : 아이쿠! 깜짝이야!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는다) 또, 꿈을 꾸신 모양이로군. 그런데 왜 나까지 번번이 놀래 자빠지는지 알수가 없단 말이여. 젠장을 헐……

雅實 : (온왕에게로 다가간다) 네. 그 사내들이 또 왔었습니다. 군사들이 또 죽었나 보옵니다. 어젯밤 삼견원(三堅院)에서 여몽연합군들이 또 공격을 해왔었다 하옵니다. 그러니 또 수많은 군사들이 죽었겠지요.

溫王 : (울듯이 얼굴을 소매 속에 묻으며) 아! 으으 아아!

忍忍 : (제 가슴을 치며) 아이구 답답해! 아이구 가슴이야! 전쟁터에서 사람 죽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옵니까?

雅實 : 마음을 굳게 가지시옵소서. 지금은 전쟁 속, 전쟁이란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이 아니옵니까? 무수한 군사들이 피를 흘려야만 나라가 지켜지옵니다. 폐하는 이 나라의 왕이시옵니다.

溫王 : 사……사……람이 너무 마……많이……죽어가……갔어……

雅實 : 예. 제 남편도 이 통에 죽었사옵니다. 그는 말(馬)밖에 아무것도 다룰 줄 모르는 마부였는데도 말입니다.

溫王 : 아으! 아아! (괴로운 듯 가슴을 친다) 그, 그 조……좋은……마……마부였어……

忍忍 : (아실에게 달려든다) 이제 와서 그따위 말은 뭐하러 허는 거여? 괜시리 남의 복장만 상허게시리…… 이 몸두 두 형님을 잃었단 말여. 신의별군이던가 뭔가 하는 군대에 뛰어들어가선 죽고 말았지. 나두 이렇게 몸이 작지만 않았어두,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 지 알게 뭐여? 나는 몸이 작은 덕택에 떼굴떼굴 예까지 살아서 굴러 왔단말여. (온왕에게 다가가서) 자, 왕폐하. 이젠 저하고 놀기나 하시옵지요. 떼굴떼굴…… 떼굴…… 떼굴.



인인, 작은 몸을 날려 재주를 부려보인다.

그러다가 관을 들고 나오는 사내1의 발에 가 탁 부딪치고 소스라쳐 놀란다. 사내 1, 2 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관을 들고 나와 앞서와 같이 노래가락을 흘리며 관을 바다에 던지고 나간다. 인인, 고개를 길게 빼고 그쪽을 바라본다.



溫王 : 아! 으으으…… (황포자락으로 두 눈을 가린다)

雅實 : 딱하시옵니다. 군사들이 죽는 것이 어디 지금뿐이겠습니까? 고려조가 처음 설 때 왕건 장군도 수많은 군사를 희생시키고 고려를 세우셨다 하옵니다. 더구나 온왕께서는 실권도 권좌도 못 누리시는 왕이시옵니다. 저 배중손 장군의 장군기를 보시옵소서. 기세좋게 펄럭이는 저 장군기! (증오의 눈길을 보낸다) 오늘 이 새벽에서 다음날 저 새벽까지, 또 그 다음날로 계속되는 전쟁. 그 아비규환 속에 남는 것은 고깃밥이 되어가는 무수한 군사들의 시체들이 있을 뿐이옵니다.

溫王 : 내……내……탓. 내……탓.

忍忍 : 아니옵니다. 폐하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사옵니다. 세습된 왕도 또 싸워서 이겨 성취한 왕도 아니신 왕이지 않사옵니까?

雅實 : 그렇사옵니다. 하나의 나라가 있기 위해 만들어진 왕이시옵니다. 전쟁의 책임을, 뭇 죽음의 책임을 지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스스로의 죄로 생각하시고 저승사자가 망을 보는 이 누대(樓臺)를 지키며 밤을 지새울 필요는 없사옵니다. 낮과 밤이 벌써 일곱날이나 바뀌었사옵니다. 이젠 돌아가시옵소서. 비록 권세는 없는 허약한 의자이오나 온왕의 의자가 이 용장성(龍藏城) 안에는 버젓이 있사옵니다.

忍忍 : 제발, 이제는 돌아가시옵소서.

溫王 : (안된다는 뜻으로 손을 내젓는다) 아! 으으 아아……

雅實 : 아닙니다. 용장성으로 가시어야 되옵니다.

忍忍 : 이곳에도 군사들이 지키고 있사오나 안전한 곳이 못됩니다. 소문을 듣자하니 몽고장군 아해(阿海)가 싸움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하여 불려들어가고 흔도(炘都)라는 장수가 대신 왔다 합니다. 김방경과 연합군을 만들었다는 소문입니다.

雅實 : (꿇어엎드린다) 더구나 흔도는 무자비하고 용맹하여 이길 장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때, 둥둥둥…… 북소리 들린다.



배중손 : (소리) 다들 들어라. 드디어 적들이 진도에까지 내려왔다. 개경의 친몽자들이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으로 하여 전라도 추토사(追討使)로 삼고 원나라 흔도를 합세시켜 일천병력이 쳐내려 왔다. 그러나 그들은 해전(海戰)에서는 맥을 못추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승리는 우리 것이다. 나는 명령한다. 우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나는 명령한다. 저들을 쳐부숴야 한다. 백성들아! 나라를 위해 싸우라! 나는 명령한다……



소리 점점 작아지고 함성이 들린다.



忍忍 : 젠장을 헐……



온왕, 주먹을 불끈 쥐고 누대를 뛰어내려온다. 바쁘게 이곳 저곳으로 뛰어다닌다.



雅實 : (멍하니 바라본다) 폐하!



온왕, 말위에 올라타고 가는 시늉을 한다. 인인, 재빨리 뛰어가 왕 앞에 엎드린다. 왕, 인인의 엉덩이를 탁탁 치고 비키라는 시늉을 한다.



溫王 : 지……진짜, 마……마……말! 말! 히히힝!

雅實 : 예. 하오나…… (땅위에 엎드려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말 흉내를 계속내고 있다)

溫王 : 히……히……이……히……힝. (말을 타고 달리겠다는 시늉을 계속해댄다)

雅實 : 예, 아옵니다. 진정하시옵소서. (어쩔 줄 몰라한다) 아이, 어쩌면 좋지?

忍忍 : (왕의 발 앞에 풀썩 주저앉으며) 이곳 저희들한테 무슨 말이 있을 턱이 있겠사옵니까? 제 등에나 올라타시옵소서! 자. (다시 왕의 발 앞에 구부려 엎드린다) 히히힝! 히히힝!

溫王 : 히……이……히……이……힝. (말타는 시늉을 계속 해대다가 포기한 듯 힘없이 바다를 향하여 바위에 걸터 앉는다. 객석에서는 그의 등을 보게 된다)

忍忍 : 젠장을 헐……! 이런 땐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남을 웃겨주어야 하는 내가 눈물이 나려고 하니…… (주먹으로 눈가를 문지른다)

雅實 : (회상에 잠기며) 자줏빛 아람드리 둥근 기둥들이 즐비하던 개경집에는 마굿간에 준마들이 수십마리씩 그득했었지. 또 그 수만큼 사병(私兵)들도 있었어. 지금은 온왕이시지만 그때는 권세를 누리시던 왕족의 도련님. 나는 그댁 수많은 여종(女從)들 중에 하나였었어. 어느 때나 그렇듯 계집종은 숨어서 주인댁 도련님을 훔쳐보며 사모의 정을 태우기가 일쑤였지.

忍忍 : 젠장을…… 헐! (핑 돌아앉는다)

雅實 : 늠름하고 당당하시던 도련님들의 모습. 사냥가기 직전 열기에 뜬 말들의 코끝을 일일이 어루만져 주면서 말잔등에 버티고 앉은 그 자태는 더할 수 없이 돋보였었지.

忍忍 : 물론 아실이도 마찬가지였겠군?

雅實 : 물론, 어리석은 종년 아실이도 마찬가지였잖구? 나두 다른 종년들과 마찬가지였지.

忍忍 : 잘들 헌다! 그러니 이런 나같은 놈이 아무리 죽기 살기로 재주넘기를 해봤자 거들떠 보기들이나 했겠냐구! 젠장을 헐!

雅實 : 도련님들의 마굿간 근처를 몇번씩이나 일없이 지나쳐갔지.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요행을 바랐었어. 기둥 뒤에 숨어서 넘보고 훔쳐보고…… (자조적인 웃음) 자줏빛 기둥을 돌아 돌아 몇번씩…… (사이) 그 때가 좋았지. (풀잎을 뜯어 향기를 맡는다) 내가 뵙기에는 지금 왕이 되신 것보다는 그때의 도련님 생활이 더 행복했었어. 그 때 도련님께서는 말갈기가 뒤로 제껴지고 너풀대며 온힘을 다해 달리는 말을 사랑하셨지.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무수한 땀방울, 거기서 풍기는 찝찔한 말의 땀냄새까지도 사랑하시는 듯했어. 대장부로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는 듯 했지.

忍忍 : 내가 아는 온왕도 좋은 때가 있었군.

雅實 : 도련님의 그때 그 말을 타시던 모습이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아름다왔는지 상상할 수 있겠어?

忍忍 : 알 게 뭐야? 내가 안 도련님이란 높은 의자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철딱써니에다가 조그만 이놈의 등 위에 올라앉는 것밖에는 못 봤으니…… 게다가 나하구 항상 떼굴떼굴 구르며 놀기나 했거든.

雅實 : 아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구. 아버님의 뒤를 따라 사냥에서 돌아오시며 기세 좋게 말을 모시던 도련님의 눈빛은 아침이슬처럼 영롱했구, 힘이 있었다구!

忍忍 : (퉁명스럽게 돌아앉는다) 알게 뭐여? 난 못봤으니까. 계집종 주제에 잘두 넘봤구나? 젠장을 헐!

雅實 : 그때는 도련님의 눈빛이 지금처럼 저렇게 퍼렇고 검게 가라앉아 있지는 않았었어. 도련님은 나면서부터 말을 잘 못하셨거든. 그래서 도련님은 눈의 표정으로 많은 감정을 표현하시군 했었어.

忍忍 : 그곳에는 뒤뜰에도 안뜰에도 담장이 높이 쳐져 있다구들 했어. 나는 장터에서 굴러 돌아다니며 재주넘기나 하던 놈이라 아무것도 몰랐지만 시정배들은 가끔 그 높은 담안의 일들을 수군대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그곳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아주 답답할 거라, 그 담밖의 생활들을 알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을 언젠가 한 적이 있거든.

雅實 : 그래 맞아. 나도 도련님이 담 밖의 생활을 좋아하실거란 생각을 가끔 했었어. 푸르고 넓은 평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바다를 꿈꾸실 거란 생각도 했어…… (사이) 망망대해(茫茫大海). 도련님의 눈빛은 망망한 바다를 꿈꾸는 듯 먼곳을 바라보고 계셨었어.

忍忍 : 지금은 사방이 망망한 바다뿐이군. (사이) 그 날은 시장 그늘에서 약장사에게 따라붙어 사람이 모이라고 재주넘기를 하구 있었단 말야. 그런데 그때는 삼별초가 강화도를 버리고 떠난다는 소문이 파다할 때여서 전부 먹구 살기들두 바쁠 때라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두 않더군. 그런데 벙거지를 쓴 군사놈들하구 난데 없는 장군이 나타나서 나를 따라 오라구 하더란 말야. 그리구 만난 사람이 누군 줄 알겠어? 바로 온왕이셨다구.

雅實 : 그때 배중손 장군은 폐하의 놀이 친구를 찾고 있었으니까……

忍忍 : 그래, 난 폐하의 놀이 친구 노릇을 했지. 떼굴떼굴 재주도 넘어 보이구, 그리구 말노릇도 했지.

雅實 : 지금은 망망한 바다뿐……

忍忍 : 이젠 폐하는 놀이에도 진력이 난 지 오래야……

雅實 : 이제는 온왕이신 도련님은 개경의 집 그늘에서 울던 까마귀 소리를 그리워하시겠지?

忍忍 : 그럴 지도 모르지.

雅實 : 우람한 자줏빛 둥근 기둥(圓柱) 그늘 그늘마다 깃을 드리우던 까마귀. 여기저기서 모함의 쑥덕 공론이 벌어지고 권좌를 노리는 자들의 소매 속에 바람 잘 날이 없던 개경. 지금은 오히려 그곳을 그리워하시는 것 같아. 이곳저곳 방문 틈에 귀를 대고 밤말을, 낮말을 옮기는 자들이 득실거리고, 뒤뜰에서는 사병들의 칼 부딪는 소리가 끊일 새가 없었던 곳.

忍忍 : 권세있는 집안은 모두 울타리 안에 군대를 갖고 있다더니, 그 시정배들 소리가 맞았었군.

雅實 :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혼자 늘 적적하시던 도련님.

忍忍 : 얼씨구, 도련님이 아니라 이젠 어엿한 왕이셔, 왕!

雅實 : 말을 못하셨기 때문에 더욱 적적하셨었어. 그래서 나는 계집종으로 감히 엄두도 못낼 상상을 하군 했었지. “도련님 생각을 제가 대신 말해 드릴께요. 어서 생각을 하세요. 제가 도련님 생각을 알아맞히겠어요. 제가 대신 말을 해드리겠어요. ” 하구 말이야. 정말 그때는 어린 마음에 내 목숨을 버리고라도 도련님의 혀가 되길 원했었지.

忍忍 : 어이구 점점……기가 막히는 군. 보기보담 아주 응큼한 데가 있었구먼? 아무리 말이 부실키로 감히 어느 안전이라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혀를 찬다)

雅實 : 허긴그래. 대갓집 도련님과 말먹이나 주던 하찮은 계집종. 그건 하늘과 땅 바로 그것이었지. (체념한 표정으로 서성거린다) 내 나이 스물되던 해, 나는 도련님의 말을 돌보던 마부와 결혼을 했었어. 그는 아주 착한 사람, 말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지. 그러나 그도 좌별초로 전쟁에 말려들어 죽고 말았단 말이야. 반몽(反蒙)세력의 화신인 배중손 장군의 명을 받들고 싸우다 죽고 만거야. (자조적인 웃음) 그러나 그것이 내 평생 소원인 도련님의 혀 노릇을 하도록 해준 계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도련님 말을 돌보던 마부가 죽자 내가 대신하게 된거야. 전쟁 속이라 남자들이 귀해진 탓이었겠지만 나에겐 천재일우의 기회랄 밖에……

忍忍 : 아암, 천재일우의 기회였겠구먼! 젠장을 헐! (핑 돌아앉는다)

雅實 : 그러다가 도련님은 왕이 되셨지. 호화찬란한 옥좌. (사이) 그러나 도련님에게 그것은 차라리 형벌의 단두대였어. 피의 아픔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었지. 왕일 수 없는 왕…… 애초부터 도련님은 왕이 될 수 없었던 분. 그런 도련님이 왕이 되신 거야. 그 이유는 이제 너무나 확연해! 더구나 이곳에는 도련님, 아니 온왕을 위해 울어 줄 까마귀조차 없는 곳. 까륵까륵 피빛 원한으로 붉게 울어주던 까마귀들조차 그리워지는 이곳……

忍忍 : (한숨을 쉰다) 까마귀는 커녕 저 멀리 인간들의 희노애락과는 인연없는 물새들만이 있을 뿐이지……



사이.



雅實 : 개경에는 까마귀 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렸어. 아침 저녁, 도처에서 붉은 울음으로 흉사(凶事)를 예고하곤 했지. 그런 날은 여지없이 일이 벌어지곤 했었지. 충신과 간신이 하루 아침에 옷을 바꿔 입고 춤을 추었었어. 집집마다 아낙들은 까마귀가 어느 집 대문에서 우는가에 귀를 기울이곤 했어. 까륵까륵 까륵까륵. (사이) 이곳에는 까마귀 같은 인물조차 없어. 다스릴 땅도, 뒤를 따르는 백성들도 없는 곳. 망망대해…… 오직 넓고 광활하고 말이 없는 바다만이 있을 뿐이야……

忍忍 : 아니, 그러지 않아도 울적해 죽겠는데 계속 그렇게 청승 떨고 있을거여? 이젠 괜히 내 마음까지 이상해지잖아? 이봐, 그런 건 다 잊어버려. 내가 재주를 넘어줄께. 그리고 이제부턴 나를 좀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 말구 말이야. 자, 나를 좀 봐.



인인, 몇차례 재주를 넘는데 둥둥둥 북소리 들린다. 온왕은 일어서서 북소리를 듣고, 아실과 인인은 있던 채로 귀를 기울인다.



배중손 : (소리) 우리 군사는 나주(羅州)를 포위하고 일부는 전주(全州)를 공격했다. 승승장구, 머지않아 개경을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경하한다.

雅實 : 경하한다구? 누가 멋대로 왕을 대신하여 경하한단 말인가? (온왕에게로 달려간다. 온왕 멍하니 아실을 쳐다본다) 폐하가 경하해 주어야만 하옵니다. 아무도 왕을 대신해서는 안되옵니다. 왕인 이상, 왕이 되셔야 하옵니다. 궁으로 돌아가시옵소서.

忍忍 : 예, 궁으로 돌아가셔야만 하옵니다.



이때, 멀리서 말 울음소리. 둥둥둥 북소리. 여기저기서 화포 터지는 소리가 진동한다. 온왕, 바위 위로 뛰어오른다. 아실도 누각으로 뛰어올라가 바라본다.



雅實 : 저기 장군기가 보입니다. 이제 싸움이 이 진도 근처에서까지 벌어지나보옵니다.

溫王 : (다시 번민한다) 마……마…… (히히힝 하며 말타는 흉내를 낸다)

忍忍 : 예, 예, 말 여기 있사옵니다. 자, 타시지요. (또 넙죽 엎드려 기어다니며 말시늉을 한다)

雅實 : 예, 그렇습니다, 가서 직접 싸우시고 공을 세워 진짜 왕이 되시고 싶으시겠죠? 그렇습니다. 왕이 되셔야 하옵니다.

溫王 : (이러저리 우왕좌왕한다. 다시 외친다) 아니, 아 아니. 배……배……

忍忍 : 아, 그렇지요. 여긴 육지가 아닌 바다, 배가 있어야겠군요. 자 타십시요. 어영차! 어영차!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노젓는 시늉을 한다)

雅實 : 인인! 바보같은 짓 좀 그만두지 못해? 지금은 놀이가 아니란 말야. 폐하의 절실한 마음을 몰라서 그래?

忍忍 : (머리를 긁적이며)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 나는 어찌해야 할 지 도통 모르겠는 걸. 어떻게 해? 내가 아는 것이라군 이것밖에 없는 걸……

雅實 : 쇤네가 배를 구해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溫王 : 아 아니…… 내…… 내가 가……간다……



온왕,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무대 왼편으로 황급히 나간다. 아실, 누각을 정리하고, 인인, 바위에 털썩 기대어 앉는다.



忍忍 : 정말 너무 많이 달라지셨어. 어린아이처럼 그토록 좋아하시던 높은 의자도, 그처럼 재미있게 보아주시던 내 재주넘기도 이젠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단 말이야. 나라라는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기 시작하신 것 같아.



온왕,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걸어 들어온다.



雅實 : (정리하던 물건을 그대로 떨어뜨린다) 역시 그렇군요. 쇤네가 다시 사정해 보겠사옵니다. (황급히 무대 왼편으로 뛰어 나간다)

溫王 : (무대 가운데 울듯이 멍하니 서있던 온왕, 더듬거리며 말을 해본다) 나……나……느……는……와……와……왕……이……다. (조금 소리 더 높여 안간힘을 쓴다) 나……나……느……느……느……는……와……와……왕이다. 나……나……느……으…으……는……와……와……왕……



아실, 그도 힘없이 되돌아 나온다. 온왕, 아실을 보자 말하기를 뚝 그친다.



雅實 : 역시 추측한 대로입니다. 배중손 장군은 용의주도한 사람. 그가 배나 말을 내어 줄 리가 없사옵니다. 폐하의 뜻을 전했지만 배장군은 얼굴도 볼 수가 없었사옵니다. 군사의 전갈로는 왕은 귀한 분이니까 위험한 일은 시킬 수가 없다 하옵니다. 폐하에게는 왕다워질 수 있는 기회를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사옵니다.



온왕, 힘없이 누각에 올라가 객석 쪽에 등을 보이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다.



雅實 : 배중손 장군, 그가 도련님이 왕다운 것을 원할 리가 없지. 처음부터 눈씻고 찾아봐도 왕다움이 없기 때문에 도련님께서는 왕이 되셨으니까. 나라라는 의미도 백성들의 고뇌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셨어. 왕이란 어엿한 한 나라의 어버이이며 모든 책임의 중심이란 것도 아시게 되셨어……

忍忍 : (그도 얼굴을 찡그린다) 허지만 지금은 도련님일 수도 왕이실 수도 없잖아! 젠장을 헐! 함께 나아가 싸울 수도,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왕. 더구나 이 진도에 와서는 무수한 고깃밥이 되어가는 군사들의 죽음 앞에 어쩔 줄을 모르시구 계셔.

雅實 : 이 누각에 와서 속죄를 하듯 군사들의 주검을 지키는 거야. 기나긴 악몽 속에 시달리시며 이곳에서 지낸 날도 어언 일곱 날. 왕이시면서 왕일 수 없는 몸. 눈 앞에 싸움터를 보면서두 용감히 달려나가 왕으로서의 기백을 떨칠 수 없는 도련님. 그 애환이 망망대해, 한없이 넓고 무심한 바다에 가득찬 듯 보여……

忍忍 : 젠장을 헐! (발로 돌멩이를 걷어 찬다)



정적을 깨며 북소리가 신나게 둥둥둥 울리기 시작한다.



배중손 : (소리. 껄껄 웃는다) 김방경(金方慶)과 오랑캐 아해가 삼견원에서 도해(渡海)를 수십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오랑캐놈들은 육지에서 말타고 싸우는 데는 명수지만 바다에서는 맥을 못춘다. 덕택에 아해는 면직 소환되고 흔도란 놈이 왔다는 데 두고 볼 일이야. 군사제군들은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와! 하는 군사들의 함성) 우리 구국 용사들은 진도 부근에 있는 섬들을 거의 우리 손아귀에 장악했다. 제주도도 물론, 우리 수중에 들어와 있다. 그외에도 남해(南海), 거제(巨濟), 합포(合浦;마산포), 동래(東來), 금주(金州;김해)까지 우리들 군사들이 점령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밀성(密城;밀양)에서 개경에서까지도 우리들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군사들의 함성, 커졌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忍忍 : 아니, 저건 전번 주일에도 들었던 소린데? 이상하잖아?

溫王 : (누각에서 웃으며 내려온다) 자……알……해……해……했어. 이……이……겼어. 우……리……나……라……조……좋…… 아지……진……다. (둥실둥실 춤을 춘다)

雅實 : 어쩐지 이상하옵니다. 이 이야기는 저번 주일에도 군사들을 모아놓고 한 이야기이옵니다.

忍忍 : 예, 그러하옵니다.

雅實 : 요사이 부쩍 부상한 군사들도 많이 밀려오고 죽는 자들의 시체는 산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보시옵소서. 그래서 그들은 이 벼랑 밑으로 시체들을 버리기 시작하지 않았사옵니까? 더구나 요즘은 이 진도 부근에서 굉장한 폭음이 들리고 싸움이 그칠 날이 없사옵니다.

忍忍 : 너무 잦게 싸움이 붙고, 불화살과 화포도 너무 가깝게 떨어지옵니다. 군사들 사이의 소문에는 전쟁의 마지막이 가까워졌다고들 합니다.

雅實 : 군수물자도 더 댈수가 없다 하옵니다. 해안을 봉쇄당했다는 소문이옵니다.

溫王 : 아……아……니야. 우……우……리……가……이……기…… 긴……다. 조……좋……은 이……일이야. (어깨춤을 들썩이며 무대 오른쪽으로 나간다)

雅實 : (온왕의 뒤에 대고 소리친다) 아니옵니다. 조심하세요! 이상한 예감이 듭니다. 배중손 장군이 승전 소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사이. 요란스런 폭음과 함께 화포가 터지고 불화살이 난다. 아주 가까운 곳의 격렬한 파괴를 알리는 진동이 무대를 뒤흔든다. 군사들이 불지옥에서 지르는 아비규환의 소리, 무대를 진동한다. 효과음 서서히 뒤로 사라지며, 온왕, 뒷걸음질로 들어온다. 하얀 탈을 쓴 사내 1, 2 에게 쫓기고 있다. 사내 1, 2 는 종전의 나무관 위에 빨간보자기를 덮어 맞잡고 들고 들어온다.



溫王 : (손을 내젓는다) 아, 으으으, 아……



사내 1, 2 는 아무 소리 않고 그전처럼 무대 뒤를 돌아 관을 던지던 곳으로 가지 않고, 온왕을 누각 밑에 몰아붙인다.



雅實 : 아니, 이놈들! 네놈들은 지금 무얼하고 있는게냐?

忍忍 : 어느 안전이라구 이놈들이 함부로…… (군사들에게 덤벼드나 사내 1 의 발길에 나가떨어진다) 아니, 이놈들이!

사내 1, 2 : (아실을 돌아본다. 히쭉 하얗게 웃는 탈. 아실, 섬뜩하여 물러선다. 사내 1, 2, 아무 감정없이 다음 대사를 던진다) 나라가 설 때에 왕이 필요하고 나라가 망할 때에도 왕이 필요하다!

溫王 : 그, 그래. 나……나……는 왕이다. 나……나는 와……왕이다.



사내 1, 2 난폭하게 왕을 무릎 꿇린다.



雅實 : (사내 1, 2 에게 달려든다) 안된다!

忍忍 : (온왕에게로 다가가며 꿇어 엎드린다) 폐하!

雅實 : 아니다! 어째서 그분이 왕이시냐? 명령 한번 똑똑히 내려본 일이 없는 분이시다. 어째서 그분이 왕이시냐? 마음대로 싸움터에도 한번 나가보지 못한 분이시다. 다만 말 못하시던 도련님, 도련님이셨을 뿐이다. 왕이 되고자 했으나 한번도 기회를 안주던 놈들이 이제 와서 왕이라고? 어이구, 이놈들아! 안된다! 안돼!

사내 1, 2 : (무대 정면을 향하여 차렷자세를 취하고 구호를 외치듯 복창한다) 우리는 전쟁에 졌다. 남은 군사들이 살아남으려면 왕의 목이 필요하다!

溫王 : (꿇어앉은 채로 허공에 대고 힘을 주어 말한다) 나……나……는 와……왕이다!



사내 1, 한번의 주저도 없이 긴 칼을 날려 온왕의 목을 친다. 온왕, 누각 밑에 쓰러진다.



雅實 : 왕폐하! (자리에 펄썩 주저앉으며 울부짖는다)

忍忍 : 왕폐하 만세!



사내 1, 2, 빨간 보자기에 왕의 머리를 싸든다. 시신을 관에 담아들고 나간다. 무표정한 사내 1, 2, 가락을 맞춘다.



사내 1, 2 : 어허야 디여! 어허야.

만경창파 푸른 물에

깊은 한(恨) 씻어내고

말없이 떠나간다.

어허야, 디여! 어허야.

저승길이 어디메냐

망망대해 한이 없네.

어허야 디여, 어허야.



인인, 울음을 터뜨리며 관을 따라 나간다. 아실, 천천히 일어나 사내들이 나간 쪽으로 몇걸음 간다. 아실, 무대 정면에 선다. 정면의 허공을 바라본다.



雅實 : 도련님, 도련님은 이제 어엿한 왕이 되셨사옵니다.



아실, 바다쪽을 향하여 뛰어가 몸을 날린다. ‘풍덩’ 아실이 물에 빠지는 물소리와 함께 텅빈 무대는 어두워진다. 호리전트에는 극이 시작될 때 비쳤던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망망대해의 모습이 비쳐진다. 파도소리, 크게 몰려왔다가 사라지며 막 내린다.



* 劇中人物과 歷史의 人物과는 서로 다름







▣ 솔내영환 -

▣ 김항용 -

▣ 김항용 - 자료실에 올렸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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