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김흔장군 주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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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09 03:31 조회1,921회 댓글0건본문
김흔장군 주변인물
김흔장군의 가계 주변인물을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충렬공(김방경)과 함께 일본정벌에 참여한 충렬공의 사위 ●조변은 매형매제이고,
사위 ●민적의 손녀는 상락군(김묘)의 배위가 되시며 즉 척약재(김구용)의 어머니 여흥민씨이시고, 민적의 재취 소생 손녀 원경왕후는 조선태조 이방원의 왕비입니다.
또한 사위 ●조련의 손자는 조선개국공신 조준입니다.
특히 아래 열거하는 자료를 보면 사위 ★민적과 사위 조련의 부 ★조인규는 1298년부터 1308년사이의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간의 권력쟁탈 싸움시에 김흔장군과 함께 충선당의 편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형매제 조변,김원충,권윤명,채의>
(횡성조씨) 조영인-조충-○조계순-●조변
○김광원-김원충
-권윤명
-채의
<손녀사위 김태권>
(의성김씨) 김서지-김태권
<사위 민적>
(여흥민씨) ○민종유-●민적-○민사평
<민사평의 이복형제 민제>
민적-민제-원경왕후,민무구,민무질
<사위 조련>
(평양조씨) ○조인규-●조련-조?-조준
매형매제 조변의 부 ●조계순(趙季珣)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橫城). 시중(侍中) ★영인(永仁)의 손자로, ★충(#충01)의 아들이다. ★숙창(叔昌)은 형이며, ★변(#변04)은 아들이다.
1250년(고종 37) 좌승선(左承宣)에 있었는데 당시 무인집정자인 최항(崔沆)에게 딸을 출가시켰다.
이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오른 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정(光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性鳳〉
매형매제 ●조변(趙#변04){1}
?∼1288(충렬왕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문하시중 ★충(#충01)의 손자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장인인 ★김방경(金方慶)의 세력에 힘입어 원종 때 낭장 겸 감찰사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행수(行首)로서 입직(入直)할 때 밤이 늦어 대궐문이 닫혀 못 들어가자 원종이 문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이는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여 그 곧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궐직문제(闕直問題)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1년(원종 12) ★김방경이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할 때 장군으로 기용되고, 1274년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대장군으로 천호(千戶)가 되어 ★김방경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281년(충렬왕 7) 제2차일본정벌 때 원제(元帝)로부터 소신교위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에 임명되고, 1284년 대장군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우부승지를 거쳐 1287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그뒤 병으로 면직이 되자 왕은 그의 사위 유서(庾瑞)를 낭장으로 임명하여 위로하기도 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전고(典故)에 정통하였으며, 성품이 관후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매형매제의 김원충의 부 ●김광원(金光遠){1}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1274년(원종 15) 일본정벌을 위한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편성될 때 응양군의 상장군으로 고려군 징집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듬해 1275년(충렬왕 1)에는 제주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요구에 따라 유수군(留守軍) 4령(領)을 징집, 편성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같은해 10월, 다시 원나라의 일본 재침 계획에 따라 경상도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에 임명되어 전함수조(戰艦修造)의 일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尹龍爀〉
사위 민적의 부 ●민종유(閔宗儒)
1245(고종 32)∼1324(충숙왕 11). 고려 후기의 정치가. 본관은 여흥(驪興). 평장사 ★영모(令謨)의 현손이다.
11세 때 왕자 시양부(始陽府)의 학우가 되고 19세에 청도감무(淸道監務)를 지내면서 치적이 많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전직되었다.
이때 ★유천우(兪千遇)가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있으면서 그의 인물됨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충렬왕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오르고 밀직부사 형조판서(密直副使刑曹判書)에 이르러 물러났다.
다시 기용되어 전법판서(典法判書)·권수판밀직사사(權授判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1309년(충선왕 1) 중대광첨의찬성사판선부사(重大匡僉議贊成事判選部事)로 치사(致仕)하고, 1319년(충숙왕 6) 복흥군(福興君)에 봉하여졌다.
1321년 왕족이 아니면서 군(君)에 봉하여진 사람의 봉작(封爵)을 거둘 때 봉작을 내놓고 다시 찬성사로 치사하였다.
이듬해 간신 권한공(權漢功)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심왕(瀋王)의 추대를 건의하려고 백관의 서명을 강요할 때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기개를 보였다.
또한, 그는 천품이 장중하고 풍도가 아름다우며, 함부로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고, 종족 사이에도 돈독하였다. 공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손님의 방문도 사절하여 집안 일을 깨끗이 정리하였고, 말을 좋아하여 항상 당하에 말을 매어놓고 감상하였다.
만년에는 거문고와 퉁소를 즐겨 꽃을 심고 기생들과 즐겼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사위 ●민적(閔#적42)
1269(원종 10)∼1335(충숙왕 복위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낙전(樂全).
찬성사 ★종유(宗儒)의 아들이며, 이모부인 재상 김군(金#군15)의 집에 양육되었다.
풍채가 수려하였으며, 10세에 절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 곧 그 뜻을 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서 국선(國仙)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이 되고, 첨의주서(僉議注書), 비서랑(#비58書郎)을 거쳐 군부정랑(軍簿正郎)에 이르렀고, 판도정랑(版圖正郎)에 이르러 세자궁문랑(世子宮門郎)을 겸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비서소윤(#비58書小尹)이 되었으나, 이후 충렬왕이 복위하자 면직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4년간 머물렀다가 돌아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308년 다시 충선왕이 복위하자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어 선부의랑지제교(選部議郎知製敎)가 되었다가 밀직승지 겸 사헌집의로 승진하였다. 이어 평양윤(平壤尹)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되고, 4년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녹봉은 전과 같이 받았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선부전서 보문각제학(選部典書寶文閣提學)을 제수받았고, 다음해 밀직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대사헌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충혜왕 때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를 제수받았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申千湜〉
외손자 ●민사평(閔思平)
1295(충렬왕 21)∼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庵). 찬성사 ★적(#적42)의 아들이며, 정승 ★김륜(金倫)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도량이 있었다.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산원·별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관수찬(藝文春秋館修撰)을 거쳐 예문응교(藝文應敎)·성균대사성이 되고, 1344년(충혜왕 5)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충정왕이 즉위한 1348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었으며, 그뒤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의 호가 주어졌고, 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하며 친인(親姻)과 화목하고 교유를 잘 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도 일을 처리하는 데 모나지 않았다.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열중하여 당시 이제현(李齊賢)·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다. 《동문선 東文選》에 그의 시 9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보물 708호로 지정된 《급암선생시집(及菴先生詩集)》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文選. 〈秦星圭〉
사위 조련의 부 ●조인규(趙仁規){1}
1237(고종 24)∼1308(충렬왕 3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진(去塵). 평양부(平壤府) 상원(祥原)의 미미한 가문의 출생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몽고어 통역관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제고되어, 이에 따라 원종 때 몽고어 통역관 양성요원을 선발하였다. 이 선발에 뽑힌 뒤 주야로 공부하여 훌륭한 몽고어 실력을 갖추고 제교(諸校)에 보임되었다.
1269년(원종 10)에 세자인 심(諶:뒤의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하여 충렬왕과의 친분관계를 두터이 하였으며, 1274년에 세자가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귀국하여 즉위하자 경성궁(敬成宮)에 안거한 공주와 그의 사속인(私屬人)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충렬왕과 공주와의 친분관계를 배경으로 정치적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충렬왕이 즉위하던 때 장군에 오른 뒤 1278년(충렬왕 4)에 대장군으로 궁궐에서 기무를 맡아보는 필도치(必#도62赤)에 임명되고, 곧이어 승지가 되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특히, 탁월한 몽고어 구사력으로 원나라 세조에게 인정되고 신임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의 관직인 선무장군(宣撫將軍)·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에 임명되어 정치적 지위를 더욱 높였다.
1287년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임명된 뒤 계속 요직을 역임하면서 수차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290년에는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동녕부(東寧府)를 되찾는 교섭에 공을 세웠고, 1295년에는 중찬(中贊)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지위가 높았지만 1292년에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국구(國舅)가 되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1298년에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서 개혁정책을 크게 뒷받침하여주었다.
그러나 충선왕 비인 계국대장공주(#계39國大長公主)의 조비(趙妃)에 대한 질투로 일어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으로 왕이 7개월 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그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로 장류(杖流)되었다.
6년 후인 1305년에 방면되어 즉시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1307년 원나라 무종(武宗)옹립의 공으로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자, 다시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에 봉하여지고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가문을 번성하게 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稼亭集, 牧隱文藁. 〈林英正〉
사위 ●조련(趙璉)
?∼1322(충숙왕 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온중(溫仲).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인규(仁規)의 아들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준(浚)의 할아버지이다.
음서(蔭敍)로 진출하여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평리(評理)가 되고, 이어 동지밀직사사·지밀직사사 등을 거쳐 1311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충숙왕 때 찬성사가 되어 최고위의 재상반열에 서서 중요한 일을 맡았다.
또한, 원나라로부터 중의대부 고려왕부단사관(中議大夫高麗王府斷事官)의 직임을 받았는데, 이는 ★조인규가 지녔던 것을 물려받은 셈이며, 따라서 고려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굳히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심왕 고(瀋王暠)가 고려 왕위를 넘보는 일로 원나라에 불려가서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의 명령에 의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권성사(權省事)가 되어 왕의 직무를 대행한 바 있다.
충숙왕과 심왕의 싸움이 결말을 보기 전인 1322년(충숙왕 9)에 죽었지만, 동생 ★연수(延壽)와 함께 심왕의 편을 들어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趙仁規와 그의 家門(閔賢九, 震檀學報 42·43, 1976·1977). 〈秦星圭〉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김흔장군의 가계 주변인물을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충렬공(김방경)과 함께 일본정벌에 참여한 충렬공의 사위 ●조변은 매형매제이고,
사위 ●민적의 손녀는 상락군(김묘)의 배위가 되시며 즉 척약재(김구용)의 어머니 여흥민씨이시고, 민적의 재취 소생 손녀 원경왕후는 조선태조 이방원의 왕비입니다.
또한 사위 ●조련의 손자는 조선개국공신 조준입니다.
특히 아래 열거하는 자료를 보면 사위 ★민적과 사위 조련의 부 ★조인규는 1298년부터 1308년사이의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간의 권력쟁탈 싸움시에 김흔장군과 함께 충선당의 편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형매제 조변,김원충,권윤명,채의>
(횡성조씨) 조영인-조충-○조계순-●조변
○김광원-김원충
-권윤명
-채의
<손녀사위 김태권>
(의성김씨) 김서지-김태권
<사위 민적>
(여흥민씨) ○민종유-●민적-○민사평
<민사평의 이복형제 민제>
민적-민제-원경왕후,민무구,민무질
<사위 조련>
(평양조씨) ○조인규-●조련-조?-조준
매형매제 조변의 부 ●조계순(趙季珣)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橫城). 시중(侍中) ★영인(永仁)의 손자로, ★충(#충01)의 아들이다. ★숙창(叔昌)은 형이며, ★변(#변04)은 아들이다.
1250년(고종 37) 좌승선(左承宣)에 있었는데 당시 무인집정자인 최항(崔沆)에게 딸을 출가시켰다.
이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오른 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정(光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性鳳〉
매형매제 ●조변(趙#변04){1}
?∼1288(충렬왕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문하시중 ★충(#충01)의 손자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장인인 ★김방경(金方慶)의 세력에 힘입어 원종 때 낭장 겸 감찰사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행수(行首)로서 입직(入直)할 때 밤이 늦어 대궐문이 닫혀 못 들어가자 원종이 문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이는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여 그 곧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궐직문제(闕直問題)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1년(원종 12) ★김방경이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할 때 장군으로 기용되고, 1274년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대장군으로 천호(千戶)가 되어 ★김방경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281년(충렬왕 7) 제2차일본정벌 때 원제(元帝)로부터 소신교위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에 임명되고, 1284년 대장군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우부승지를 거쳐 1287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그뒤 병으로 면직이 되자 왕은 그의 사위 유서(庾瑞)를 낭장으로 임명하여 위로하기도 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전고(典故)에 정통하였으며, 성품이 관후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매형매제의 김원충의 부 ●김광원(金光遠){1}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1274년(원종 15) 일본정벌을 위한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편성될 때 응양군의 상장군으로 고려군 징집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듬해 1275년(충렬왕 1)에는 제주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요구에 따라 유수군(留守軍) 4령(領)을 징집, 편성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같은해 10월, 다시 원나라의 일본 재침 계획에 따라 경상도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에 임명되어 전함수조(戰艦修造)의 일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尹龍爀〉
사위 민적의 부 ●민종유(閔宗儒)
1245(고종 32)∼1324(충숙왕 11). 고려 후기의 정치가. 본관은 여흥(驪興). 평장사 ★영모(令謨)의 현손이다.
11세 때 왕자 시양부(始陽府)의 학우가 되고 19세에 청도감무(淸道監務)를 지내면서 치적이 많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전직되었다.
이때 ★유천우(兪千遇)가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있으면서 그의 인물됨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충렬왕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오르고 밀직부사 형조판서(密直副使刑曹判書)에 이르러 물러났다.
다시 기용되어 전법판서(典法判書)·권수판밀직사사(權授判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1309년(충선왕 1) 중대광첨의찬성사판선부사(重大匡僉議贊成事判選部事)로 치사(致仕)하고, 1319년(충숙왕 6) 복흥군(福興君)에 봉하여졌다.
1321년 왕족이 아니면서 군(君)에 봉하여진 사람의 봉작(封爵)을 거둘 때 봉작을 내놓고 다시 찬성사로 치사하였다.
이듬해 간신 권한공(權漢功)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심왕(瀋王)의 추대를 건의하려고 백관의 서명을 강요할 때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기개를 보였다.
또한, 그는 천품이 장중하고 풍도가 아름다우며, 함부로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고, 종족 사이에도 돈독하였다. 공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손님의 방문도 사절하여 집안 일을 깨끗이 정리하였고, 말을 좋아하여 항상 당하에 말을 매어놓고 감상하였다.
만년에는 거문고와 퉁소를 즐겨 꽃을 심고 기생들과 즐겼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사위 ●민적(閔#적42)
1269(원종 10)∼1335(충숙왕 복위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낙전(樂全).
찬성사 ★종유(宗儒)의 아들이며, 이모부인 재상 김군(金#군15)의 집에 양육되었다.
풍채가 수려하였으며, 10세에 절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 곧 그 뜻을 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서 국선(國仙)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이 되고, 첨의주서(僉議注書), 비서랑(#비58書郎)을 거쳐 군부정랑(軍簿正郎)에 이르렀고, 판도정랑(版圖正郎)에 이르러 세자궁문랑(世子宮門郎)을 겸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비서소윤(#비58書小尹)이 되었으나, 이후 충렬왕이 복위하자 면직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4년간 머물렀다가 돌아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308년 다시 충선왕이 복위하자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어 선부의랑지제교(選部議郎知製敎)가 되었다가 밀직승지 겸 사헌집의로 승진하였다. 이어 평양윤(平壤尹)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되고, 4년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녹봉은 전과 같이 받았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선부전서 보문각제학(選部典書寶文閣提學)을 제수받았고, 다음해 밀직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대사헌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충혜왕 때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를 제수받았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申千湜〉
외손자 ●민사평(閔思平)
1295(충렬왕 21)∼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庵). 찬성사 ★적(#적42)의 아들이며, 정승 ★김륜(金倫)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도량이 있었다.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산원·별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관수찬(藝文春秋館修撰)을 거쳐 예문응교(藝文應敎)·성균대사성이 되고, 1344년(충혜왕 5)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충정왕이 즉위한 1348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었으며, 그뒤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의 호가 주어졌고, 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하며 친인(親姻)과 화목하고 교유를 잘 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도 일을 처리하는 데 모나지 않았다.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열중하여 당시 이제현(李齊賢)·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다. 《동문선 東文選》에 그의 시 9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보물 708호로 지정된 《급암선생시집(及菴先生詩集)》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文選. 〈秦星圭〉
사위 조련의 부 ●조인규(趙仁規){1}
1237(고종 24)∼1308(충렬왕 3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진(去塵). 평양부(平壤府) 상원(祥原)의 미미한 가문의 출생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몽고어 통역관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제고되어, 이에 따라 원종 때 몽고어 통역관 양성요원을 선발하였다. 이 선발에 뽑힌 뒤 주야로 공부하여 훌륭한 몽고어 실력을 갖추고 제교(諸校)에 보임되었다.
1269년(원종 10)에 세자인 심(諶:뒤의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하여 충렬왕과의 친분관계를 두터이 하였으며, 1274년에 세자가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귀국하여 즉위하자 경성궁(敬成宮)에 안거한 공주와 그의 사속인(私屬人)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충렬왕과 공주와의 친분관계를 배경으로 정치적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충렬왕이 즉위하던 때 장군에 오른 뒤 1278년(충렬왕 4)에 대장군으로 궁궐에서 기무를 맡아보는 필도치(必#도62赤)에 임명되고, 곧이어 승지가 되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특히, 탁월한 몽고어 구사력으로 원나라 세조에게 인정되고 신임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의 관직인 선무장군(宣撫將軍)·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에 임명되어 정치적 지위를 더욱 높였다.
1287년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임명된 뒤 계속 요직을 역임하면서 수차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290년에는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동녕부(東寧府)를 되찾는 교섭에 공을 세웠고, 1295년에는 중찬(中贊)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지위가 높았지만 1292년에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국구(國舅)가 되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1298년에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서 개혁정책을 크게 뒷받침하여주었다.
그러나 충선왕 비인 계국대장공주(#계39國大長公主)의 조비(趙妃)에 대한 질투로 일어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으로 왕이 7개월 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그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로 장류(杖流)되었다.
6년 후인 1305년에 방면되어 즉시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1307년 원나라 무종(武宗)옹립의 공으로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자, 다시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에 봉하여지고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가문을 번성하게 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稼亭集, 牧隱文藁. 〈林英正〉
사위 ●조련(趙璉)
?∼1322(충숙왕 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온중(溫仲).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인규(仁規)의 아들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준(浚)의 할아버지이다.
음서(蔭敍)로 진출하여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평리(評理)가 되고, 이어 동지밀직사사·지밀직사사 등을 거쳐 1311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충숙왕 때 찬성사가 되어 최고위의 재상반열에 서서 중요한 일을 맡았다.
또한, 원나라로부터 중의대부 고려왕부단사관(中議大夫高麗王府斷事官)의 직임을 받았는데, 이는 ★조인규가 지녔던 것을 물려받은 셈이며, 따라서 고려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굳히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심왕 고(瀋王暠)가 고려 왕위를 넘보는 일로 원나라에 불려가서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의 명령에 의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권성사(權省事)가 되어 왕의 직무를 대행한 바 있다.
충숙왕과 심왕의 싸움이 결말을 보기 전인 1322년(충숙왕 9)에 죽었지만, 동생 ★연수(延壽)와 함께 심왕의 편을 들어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趙仁規와 그의 家門(閔賢九, 震檀學報 42·43, 1976·1977). 〈秦星圭〉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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