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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6 --- 원나라 반군 합단적 섬멸 (1290-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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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18 04:38 조회1,6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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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6 --- 원나라 반군 합단적 섬멸 (1290-1291)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반군(叛軍)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합단(哈丹)은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고, 원주, 충주산성, 연기 등으로 남하하면서 국토를 유린하게 되는 <합단의 침입> 사건이 발생합니다. 1291년 충남 연기에서 김흔장군께서 한희유 등과 함께 합단적을 완전 섬멸하게 됩니다.



현재 충남 연기군 지방 향토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연기대첩> 이라 하여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등 우리 역사상 6대첩에 이은 또하나의 대첩, 7대첩의 하나로 규정하고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1997년 5월에는 연기군 안동김씨 종친회에서 <김흔장군 연기대첩사적비>를 연기군 서면 국촌리 정좌산 아래에 세운 바 있고, 2000년 4월에는 연기군에서 <연기대첩비>를 ?원수산 아래 고복저수지 공원에 세운 바 있습니다.







▣ 고려사



《고려사》 제30권 - 세가 제30 > 충렬왕 3 >

충렬왕 기축 15년(1289)

8월

을묘일에 인후, ★김흔에게 명령하여 통구(通衢)에서 군대들을 점검 사열케 하였다.

임술일에 만호 ★김흔으로 하여금 정벌 원조군을 인솔하고 요양행성으로 가게 하였다.

12월

계사일에 지밀직사사 ★김흔, 동지밀직사사 나유를 파견하여 동계 방수군(防戍軍)을 징발케 하였다.



《고려사》 제30권 - 세가 제30 > 충렬왕 3 >

충렬왕 경인 16년(1290)

경인 16년(1290) 봄 정월에

갑자일에 장군 오인영 등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내안(乃顔)의 잔당인 합단(哈丹) 역적들이 장차 우리 나라의 동쪽 국경을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다.

2월 을해일에 중군 만호 정수기(鄭守琪)를 금기산동(禁忌山洞)에 주둔시키고, 좌군 만호 박지량을 이천(伊川)에 주둔시키고, 한희유를 쌍성에 주둔시키고, 우군 만호 ★김흔을 환가에 주둔시키고, 나유를 통천(通川)에 주둔시킴으로써 단적(丹賊)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5월

무신일에 ★김흔, 나유, 정수기 등이

“합단이 해양(海陽) 지경에 침입하였다”고 급보하였다.





《고려사》 제56권 - 지 제10 > 지리 1 >

청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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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현(燕岐縣)은 원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연산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에 본 목에 소속시켰고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후에 목천(木川) 감무로 하여금 겸임케 하였다. 이 현에 원수산(元帥山)〔충렬왕 때에 한희유(韓希愈), ★김흔 등이 현 남쪽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합단 침략군을 크게 격파 하였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부대가 주둔해 있던 곳이라고 하여 원수산이라 하였다고 한다〕이 있고 웅진(熊津)〔즉 신라 때의 서쪽 개천인 웅천하(熊川河)인바 중사(中祀)에 기록되어 있다.〕이 있다.







▣ 고려사절요



기축 15년(1289), 원 지원 26년

○ 8월에

○ 만호 ★김흔(金?)에게 원 나라의 정벌을 원조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가게 했다.

○ 12월에

○ 지밀직사사 ★김흔(金?), 동지밀직사사 나유(羅裕)를 보내어 동계(東界)의 방수군(防戍軍)을 뽑게 하였다.





경인 16년(1290), 원 지원 27년

○ 2월에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를 보내어 금기산(禁忌山) 골짜기에 주둔하게 하며,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은 이천현(伊川縣) 지경에 주둔하게 하며, 한희유(韓希愈)는 쌍성에 주둔하게 하고, 우군만호 ★김흔은 환가현(??縣) 지경에 주둔하게 하며, 나유(羅裕)는 통천(通川) 지경에 주둔하게 하여 합단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신묘 17년(1291), 원 지원 28년

○ 봄 정월에 합단의 군사가 장차 철령(鐵嶺)에 이르려 하니, 방수만호(防守萬戶) 정수기(鄭守琪)가 소문만 듣고 도망해 왔으므로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철령은 길이 좁아 겨우 한 사람밖에 통하지 못하여, 합단의 군사가 모두 말에서 내려 한 사람씩 줄지어 올라왔다.

이때 적들은 몹시 굶주렸으나, 수기가 버리고 간 양곡을 거두어 수일 동안 진탕 먹고, 북을 울리며 전진해서 드디어 고개를 넘어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오니, ★김흔(金?) 등이 모두 지키지 않고 달아났다. 적은 곧 양근성(楊根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여름 4월에 한희유를 판삼사사로, ★김흔(金?)을 판밀직사사로, 최유엄(崔有?)을 부밀직사사 감찰대부로 삼았다.

○ 5월 1일 정유에 적이 연기현(燕岐縣)에 주둔하였다. 설도간의 대군과 우리 3군이 밤중에 목주(木州)를 출발하여 날이 밝을 무렵 연기현 정좌산(正左山) 아래에 이르러서 적진에 육박하여 불시에 포위하니, 적이 크게 놀라 산으로 올라가서 험한 지리를 이용하여 싸우려 하였다.

우리 삼군의 보졸이 앞을 막고 기병(騎兵)이 뒤를 쫓으니, 적이 앞뒤로 견제를 받아 모두 말을 버리고 숲 사이에 숨어서 우리 전봉(前鋒)을 쏘아 두 사람을 맞히니, 아군이 의아하고 두려워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김흔(金?)이 꾸짖고 또 명하기를, "감히 뒤로 물러서는 자는 베겠다." 하니, 이에 보졸 5백 명이 앞을 다투어 올라가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병졸 이석(李碩)ㆍ전득현(田得賢) 등이 앞으로 돌격하여 적의 선봉 장사 두 명을 베자, 승세를 이용하여 함성을 지르며 대군이 힘을 합하여 공격하니, 적은 형세가 궁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추격하여 공주강[公州河]에 이르니, 죽어 넘어진 시체가 30여 리에 이었고, 익사한 자도 매우 많았으며, 적의 정예 기병 1천여 명은 물을 건너 달아났다. 부녀자ㆍ의복ㆍ안마(鞍馬)ㆍ보기(寶器) 등 노획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날이 저물자 회군(回軍)하여 연기현 북방 50리쯤 되는 곳에 주둔하였다.

○ 인후(印侯)ㆍ한희유(韓希愈)ㆍ★김흔(金?)이 사람을 보내어 전승을 보고하고, 포로로 잡은 부녀자 8명을 바쳤다.

○ 6월 1일 정묘에 왕과 공주가 강화로 돌아왔다.

○ ★김흔을 죽전(竹田)으로, 한희유를 충청도로, 나유(羅裕)를 교주도(交州道)로 보내어, 합단의 잔당을 추격하여 잡게 하였다.

○ 9월에 홍자번(洪子藩)을 판전리사사 세자사(判典理司事世子師)로, 조인규(趙仁規)를 판군부사사 세자부(判軍簿司事世子傅)로, 염승익(廉承益)을 판판도사사 세자보(判版圖司事世子保)로, 정가신(鄭可臣)을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로, ★김흔(金?)을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임진 18년(1292), 원 지원 29년

○ 3월에

○ 원 나라에서 나유(羅裕)와 한희유를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삼아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고, 또 인후(印侯)ㆍ한희유ㆍ★김흔(金?)에게 궁시(弓矢)ㆍ옥대(玉帶) ㆍ요(腰)ㆍ은(銀) 1정(錠), 안장[鞍] 1벌을 주었으니, 전공을 포상한 것이었다.

또 본국의 서경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한신(韓信) 등을 세자에게 딸려 보내며 명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너희 나라를 배반하였으나, 원나라 조정에 대한 충성이 약간이나마 있으니, 너는 크게 책망하지 말라." 하였다.

○ 6월에

○ 김운(金?)을 첨의참리(僉議?理)로, 한희유(韓希愈)를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김흔(金?)을 판삼사사로, 정인경(鄭仁卿)ㆍ유승(柳陞)ㆍ최유엄(崔有?)을 모두 동지밀직사사로, 이혼(李混)ㆍ장순룡(張舜龍)을 모두 부지밀직사사로 삼았다.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도 忠淸道 [5]

연기현 燕?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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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산(元帥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元) 나라에 청하니, 세조(世祖)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干)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고,

왕이 한희유(韓希愈)ㆍ★김흔(金?) 등으로 하여금 3군(軍)을 거느리고 원 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본현 북쪽 청주 경계에 위치한 정좌상(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 리까지 연하였으며, 벤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부른다







▣ 합단의침입 (哈丹-侵入)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 원나라의 반군(叛軍)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 우군만호 ★김흔(金H)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禁忌山洞)·이천현계(伊川縣界)·권가현계(拳縣界)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雙城)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登州: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의 양근(楊根)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파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렬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의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은회 -

▣ 김윤만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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