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8 --- 2000년 4월 연기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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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18 05:07 조회1,488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8 --- 2000년 4월 연기대첩비
지난번에 우연히 <연기대첩비> 제막식 팜프렛을 보게 되어 타이핑하여 소개합니다.
▣ <연기대첩비> 제막식
2000년 4월 15일 오후2시
고복저수지
연기군, 연기대첩비건립추진위원회
연기대첩비문
연기는 그 땅이 아름다워 걸출한 인물들이 수없이 배출되었고, 오랜 역사의 향기를 더해주는 문화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이 같은 연기의 역사와 전통은 이 땅 위에서 오랜 역사와 함께 한 연기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값진 유산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기지역은 충효열의 정신과 인맥이 끊임없이 이어진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같은 충효열의 정신사적 전통은 저멀리 백제멸망 직후 국보106호 국보 108호 석불비상을 조성하였던 백제 유민들의 염원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을 것이고,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던 수많은 이 지역의 충절 인물들이나, 각 가문에서 배출된 효자,열녀,열부의 행적이 바로 그러한 전통을 무르익게 한 원천이었으리라.
어디 그 뿐이랴! 또 하나 연기 사람들이 자랑하고 자랑할 커다란 역사의 흔적이 우리 앞에 그 웅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기대첩의 역사요, 정신이라 할 것이다.
연기대첩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도 상세하게 전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고려 충렬왕 17년(1291) 5월 연기지역에 침략했던 원나라 반란군인 합단의 무리를 궤멸시킨 대승첩이었다.
합단의 군대는 고려 충렬왕 16년(1290) 5월 고려의 동북면 지역으로 쳐들어와 함경도와 강원도,경기도를 차례로 유린약탈과 살상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합단적은 이어 원주와 충주로 진출하였다가 이곳에서 지역민들의 치열한 저항에 직면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고 진로를 바꾸어 결국 우리고장 연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합단적이 우리 연기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충렬왕 17년(1291) 4월로 이들은 당시 연기 서면 쌍전리의 ♠정좌산에 주둔하면서 삼남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으니 참으로 이는 우리 역사상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일대 국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합단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고려의 한희유, ★김흔, 인후 등 삼장군과 원나라의 연합군은 5월 1일 밤 은밀히 목천을 출발, 적의 예상을 뒤엎는 강행군으로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정좌산에 도착, 합단적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저항과 반격도 만만치 않아 고려군의 공격이 부진하였다.
이에 ★김흔장군은 장졸들에게 후퇴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독전하니, 이석과 전득현이 앞서 나가 적의 선봉을 목 베고 이에 힘을 얻은 전군이 합세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자 합단적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달아나는 적을 공주 금강까지 추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30여리에 이르고 물에 빠져 죽은 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날 하루의 전투로 적의 주력은 거의 궤멸되고 날랜 기병 천여기가 강을 건너 도망갔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7일후인 5월 8일에 ♠정좌산 전투에서 패퇴하여 강을 건너 도망갔던 합단적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남면 ♠원수산 방면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적중에는 백발백중으로 활을 잘 쏘는 자가 앞에 버티고 있어 군사들이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을 본 한희유 장군이 긴 창을 겨누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하여 활 잘 쏘는 자를 잡아서 한 칼에 참하고, 그 머리를 창에 꿰어 적에게 보이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였다. 이틈에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니 적은 말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그로부터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합단적은 6월 5일 단적 580여명이 한희유 장군에게 투항하므로써 전후 2년에 걸친 합단적의 침입은 우리 연기 땅에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연기대첩은 고려에 침입한 합단적으로 하여금 다시는 전세를 회복할 수 없도록 완전 섬멸하여 일대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전투였으며 대첩이었다. 만일 연기대첩으로 합단적을 궤멸시키지 못했다면 가깝게 충청도 내륙은 물론 전라도, 경상도 지역도 그들의 말발굽 아래에서 온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기대첩은 후대의 역사기록에서 소홀하게 취급되었고 대승첩을 기념할 어떠한 유적도 연기땅에는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더욱이 700여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숭고한 연기대첩의 사실마저 올바르게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고 다만 ♠정좌산 부근의 창고개 전승골 군량골 이라든가 ♠원수산의 장군바위와 항서바위 등의 지명과 구전만이 당시 외적을 맞아 의롭게 싸웠던 연기현민들과 고려군의 용맹충절 흔적을 아스라하게 느끼게 할 따름이다.
뒤늦었지만 이을 아쉬워하는 연기군민들은 뜻을 모아 잊혀져 가는 연기대첩의 역사를 바로 알리고 그 거룩한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연기군민들이 연기대첩 당시의 용전과 충절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여 충효열 정신으로 뭉쳐진 도덕적 인간상이 현대와 미래의 연기군민상으로 정립되기를 기대한다.
연기대첩비건립추진위원회
건립자 : 연기군수 홍순규
추진위원장 : 조치원문화원장 장영
사실고증 : 연기향토사연구소 고문 김재붕
글 : 공주대 사학과 교수 이해준
글씨 : 송암 민복기
조각 : 박대순
▣ 김발용 - 아직 퇴근 안하셨군요..저녁 식사는 하셨는지...
▣ 김윤식 - 가끔 건강도 돌아보시기를.....지금쯤은 퇴근하셨겠죠?
▣ 김주회 - 지금시간 10:35, 아직 퇴근 못했습니다. 저녁식사는 많이 했습니다. 4월중순까지는 사무실에 바쁜 일이 있어서 토,일요일 반납하고 매일 늦을 것 같습니다. 일요일 낮에 1주일치 타이핑해 놓고 하루 한두건씩 올리며 지낼까 합니다. 건강 걱정은 안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 사랑방에만 들어오면 기운이 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 김윤만 - 바쁘다는 것같이 좋은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좀 바쁘고 긴장된 생활이 오히려 건강에 좋은 듯도 합니다.
▣ 김항용 - 늘 감사하고 든든한 우리의 버팀목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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