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금수정 척약재 시비 원문과 번역문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3-03-19 18:14 조회1,569회 댓글0건

본문

어느 종인께서 문의하신데 대한 답변입니다.



금수정에 다녀오신후 척약재 시비에 새겨진 시의 원문과 번역문을 다시 보시고 싶다는



소식을 듣고 [척약재선생시비-범급]에 내용을 소개합니다..







文溫公 척若齋 詩碑



장소;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금수정





前面 <척若齋先生 詩碑>







帆急



帆急山如走 돛이 빨리 나부끼니 산이 달리는 듯



舟行岸自移 배가 나아가니 언덕이 스스로 옮기는 듯



異鄕頻問俗 낯선 땅에 이르면 풍속을 묻고



佳妻强題詩 경치좋은 곳에선 억지 시를 읊고요



吳楚千年地 오나라 초나라 오래된 땅에



江湖五月時 양자강과 호수는 오월이구나



莫嫌無一物 내 한푼 없다고 싫어를 말라



風月也相隨 나에겐 아직도 풍월이 서로 따른다네









 <小易若齋 金九容先生 詩碑> (앞면 하단)



萬物은 죽어서 그 根本으로 돌아가나니 人生의 죽음 또한 끝이 아니다......(物歸其根 其生不窮)이 라고 牧隱 李穡은 金先生의 어머니이신 三韓國夫人 驪興閔氏의 墓誌銘에서 써서 傳하여주고 있다.



金先生께서 돌아가신지 600여년이 흐른 오늘에 이 詩碑가 세워지게 됨은 先生의 얼이 이직도 살아 있다는 覆載哲理를 實證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本詩碑 "帆急"은 先生께서 中國西南大理衛로 流配되어 가시는 途中 荊州와 潘家磎驛을 서기 1384년 5월 8일경에 지나면서 船上에서 읊은 詩로 先生의 豊富한 詩想과 浪漫과 浩然豪氣가 넘처흐르는 詩이다.



牧隱 李穡은 척若齋 金九容 先生의 詩를 評論함에 있어 平淡精深하다 하면서 그의 詩格은 한 時代에 높이 뛰어나 他人이 흉내 낼 바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三峰 鄭道傳은 淸新雅麗하다하였으며 晉山君 河崙 또한 平贍精深하다 하였다.



김선생의 8세손인 義禁府都事公 金大涉은 이곳 金水亭을 오랫동안 保全한 분이시다. 그의 아들인 鐵源府使公 金확과 큰 사위인 文間公 芝峯 李수光,그리고 작은사위인 許蘭雪軒의 친 오빠 贊成事公蛟山 許筠은 모두 당대의 錚錚한 文人으로 이곳 金水亭을 中心으로 頻繁히 交遊한 분들인 바 許筠 또한 그의 惺 詩話에서 金先生의 詩를 平談精深 淸新雅麗함을 再强調하면서 欽慕하였고 東人論詩集에 近世 朝鮮漢詩聖이라 일컫는 紫霞 申緯는



도화관밖의 하늘 끝 바라보니 (桃花關外望天涯)



대별산은 푸르러 봄날은 저물어가네(大別山靑春日斜)



붓놀림 안개와 구름 같은 척약재(下筆雲煙金척若)



목은으로 하여금 재주 감탄케 했네(能敎老牧嘆才華)



라고 읊으면서 當代(1845년)까지의 金九容先生의 詩는 朝鮮詩壇에서 首座에 있었음은 再言을 不許한다라고 極讚하고 있다.



이제 漢詩는 漢文學 全盛期의 後退 그늘에서 빛을 못보는 處地에 있다고는 하지만 늦게나마 이를 안타까이 여겨 先生의 五百餘首의 遺詩中 이 한 首와 뒷면에 當代 交分이 두터웠던 牧隱 圃隱 陶隱 三隱이 先生은 敬慕하면서 읊어 남기신 세 首의 詩를 새기면서 遁寸 李集先生과의 交遊詩를 浮刻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멀리 中國 揚子江上에서 殉國하신 先生의 외로운 넋을 달래고자 한다.





後面







道美寺寄敬之 牧隱 李穡



六友堂中君子居 육우당에 군자가 살고 계시기에



滿天淸興更無餘 온 세상에 가득한 흥취 다시 남음이 없네



滂江家處多苛絶 驪江 가는곳마다 좋은 경치 많아



欲乞殘生對結盧 원컨대 남은 삶 마주보고 집지어 살고 싶다네







揚子江渡望北固山悼 圃隱 鄭夢周



先生豪氣蓋南州 선생의 호기가 중국 남쪽을 다 덮으니



憶昔同登多景樓 다경루에 더불어 오른 옛일 생각나네



今日重來君不見 오늘 다시 왔어도 그대 볼 수 없으니



蜀江何處獨魂遊 양자강 어느곳에 홀로 넋이 떠 계시느뇨







重九感懷 陶隱 李崇仁



去年重九龍山前  작년 구월구일 용산 추흥정에서



坐客望若登神仙 앉아계신 모습 바라보니 신선이 오르는 듯



達可放歌徹寥廓 정포은 노래하니 하늘을 뜛고



敬之下筆橫雲煙 김척약재 글을 쓰니 구름이 도는 듯 하네







 <文溫公 척若齋 安東金公 諱 九容 略史> (뒷면 하단)



文溫公께서는 서기 1338년에서 1384까지의 高麗末葉의 政治家요, 敎育者요, 性理學者이시다. 또한,成均館 直講과 大司成 歷任時에는 많은 後學을 養成하시었으며, 詩에 能하여 東國詩聖, 儒學에 精通하시어 海東孔子라 불리었다. 그러나 公께서는 國運과 더불어 不幸하시었으니 異國땅에서 散華하시기까지 苦難의 一生을 보내시었다. 公의 初名은 齊閔이요, 字는 敬之, 號는 척若齋, 堂號는 六友堂,諱는 九容, 諡號는 文溫이시다. 崇政大夫 重大匡 中書侍郞平章事 上洛君 安東金公 昴의 長男이며, 아우는 怪僧 辛旽을 없애려다 逆殺된 知製敎公 齊顔과 判敦寧府事 安靖公 九德이며, 어머니는 及菴 閔思平의 無男獨女 三韓國夫人 驪興閔氏이시다. 公은 16세의 擧子科 新進士試에 壯元及第하시고 18세에 禮部試大科에 登第하시어 1363년(26세) 司諫院 正言, 獻納, 1368년(31세)典校寺副令, 1371년(34세) 民部議郞兼 成均館 直講을 하시고, 1372년(35세)에 江陵道 安廉使로 나가시어 善政을 베푸시었다. 1375년(40세) 三司左尹으로 옮겼을 때 鄭道傳, 李崇仁, 權近 等과 더불어 北元에서 온 使臣의 迎接을 反對上訴하다 竹州로 流配되었으며, 다시 驪興으로 옮기시니 江山雪月風花를 벗삼아 많은 詩文을 남기시었다. 7년만에 左司議大夫로 再召되어 禑王을 諫하였으나 虛事였고, 1382년(45세) 成均館 大司成에 이어 判典交寺事로서 經籍과 祝召등을 잠시 다루었는데, 때마침 高麗와 明나라의 國交가 圓滿치 못하여 行禮使로 나가셨으나 途中 遼東에서 貢馬遲援을 事由로 逮捕되어 南京으로 押送되고 明皇帝 朱元章의 命으로 中國 西南쪽 大理衛로 流配되었는데 重京 南쪽 蘆洲 永寧縣 江門站에 이르러 1384년 享年 47세의 殉國하시었다. 著書로는 周官六翼, 選粹集, 척若齋集, 及菴集이 있으며, 公의 仲子 成川都護部使 公 明理의 編著인 척若齋詩 500餘首가 收錄된 척若齋學吟集이 있는바 그 初刊本은 寶物 제 1004호로 指定되어있으며, 中刊本은 奎章閣, 國立中央圖書館, 韓國精神文化硏究院 및 各 有名 大學校 圖書館에 備置되어 있으며, 及菴集 初刊本은 寶物 제 708호로 指定, 保管되어있다.



서기 1994년 6월 6일



金在承 謹撰



金在洪 謹書



安東金氏文溫公派大宗會 謹竪





인터넷에 지원되지 않는 한자



척약재의 척=심방변+易

김확의 확=穫-벼화변이 아닌고 불화변임

이수광의 수=目+卒







민족문화대백과사전 (9권 508페이지)



범급 帆急---고려말의 문신인 김구용(金九容)의 한시. 오언율시 2수중 두 번째것이다. 그의 저서인 "척약재학음집(척若齋學吟集)" 권하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돛단배가 빠르게 달려 나가니 마치 산기슭이 저절로 옮겨지듯 한다고 하여 속도감을 흥기시키고 나서, 작자는 타향에 오면 자주 그 고을의 풍속을 묻고 좋은 곳을 찾아가 힘써 시를 짓곤 한다고 하였다. 타향이지만 때는 5월이라, 강호에 찾아가보니 더불어 놀만한 사물이 하나도 없으나, 풍월이 함께 따라와 즐기노라 말한다. 이 작품은 작자가 대리(大理)에 귀양을 갔을 때 지은 것이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창연해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 구절에서 "가처(佳處)에서 힘써 시를 짓노라(强題詩)."라고 하였듯이 그의 귀양지에서의 고독함과 괴로운 심정을 간곡하게 시적 언어로 표출시켜 놓고 있다. 또 끝구절에서 역시 "풍월만이 따라와 주네"라고 한 것에서도 그와 같은 고적감이 다시 제고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靑丘風雅(金宗直),  척若齋學吟集(金九容). 閔丙秀(서울대 교수, 국문학)























▣ 김윤만 - 따뜻한 봄날 가족과 함께 다시한번 찾고싶은 곳이 바로 영평팔경의 하나인 금수정입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우리 안사연 답사의 시발지인 금수정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 김영윤 -

▣ 김윤식 - 따뜻한 봄날 다시 가 보고 싶습니다.

▣ 김은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