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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9 --- 1994년 12월 <연기대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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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20 04:31 조회1,5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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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09 --- 1994년 12월 <연기대첩연구>





충남 연기군 지역에서의 연기대첩 연구에 우리 문중에서

충청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김재붕(안렴사공파),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회장 김해연(안렴사공파),

총무 김은회(익원공파),

김재산(전서공파) 종친님 등

여러분이 깊이 관여하시어 자료발굴, 책자발간, 대첩비 건립등 김흔장군과 연기대첩 연구에 큰 공헌을 하신 바 있습니다.



1994년 12월 간행된 <연기대첩연구> 서문과 책자배본 안내문을 참고로 소개합니다.







▣ 연기대첩연구 (1994.12, 공주대박물관, 연기군)



서문



고려 충렬왕16년 (1290)부터 다음해 17년 (1291)에 걸치는 원 합단적의 고려 침략은 수만에 달하는 몽고족이 고려 각처를 횡행하던 전란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규모에 비하여 이 사건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종래 합단적의 고려 침략이 주목을 끌지 못했던 것은 아마 두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첫째 합단적이 중국 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일종의 반란군이었다는 점, 그리고 침략군의 분쇄에 있어서 元軍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가 합단적의 고려침입에 대하여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전투의 주요현장이 우리의 향토인 충남 연기지역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재의 과정과 성격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합단군에 대한 고려의 항전이 역사적으로 보다 주목되어야 할 몇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합단군의 침입이 몽고와의 전쟁의 연장적 성격이며, 元軍의 전쟁 참여는 제한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합단군의 침입과정에서 보여준 고려인의 치열한 항전 의지이다.



연기지역은 충렬왕17년 (1291) 합단군을 완전히 궤멸시킨 역사적 현장이다. 이같은 연유로 연기군의 지역인사들이 이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郡의 협조를 받아 본교 박물관에 연기대첩에 대한 학술적 조사연구를 의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서는 4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유원재는 13세기 연기대첩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고려시대 이전 연기지역의 역사성을 서론적으로 논의하였다.



다음 윤용혁은 고려시대 대외항쟁사의 관점에서 합단적의 침입에 대한 고려인의 항전과정을 전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연기대첩의 역사적 전말을 총괄 정리하였다.



이남석, 서정석은 연기대첩의 주전투지점인 정좌산과 원수산성에 대하여 현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해준이 역사적 과정, 그리고 고고학 및 구비전승 자료를 총괄적으로 이용하면서 연기대처에 대한 전투의 구체적 전개상황을 추적하였다. 다만 전투의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정과 유추에 의한 것이 많고 따라서 이같은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보완의 여지가 없지 않다.







본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연기군 당국과 지역의 여러 인사 이상은, ★김해연, 한준석 회장과 ★김재붕 선생님, 임영수 선생 등으로부터 각별한 도움을 받았다. 특히 ★김재붕 선생님은 역사적 고증과 관련한 여러 의견을 제시하여 주셨고 문화원의 임영수 선생으로부터는 현지에서 채집한 구전자료와 사진자료들을 풍부하게 제공받을 수 있었다. 지면을 통하여 거듭 깊은 감사를 드린다.



1994. 12

공주대학교 박물관장 윤용혁









▣ <연기대첩연구>의 책자 배본에 즈음하여 (1995.3, 김해연)



지난 3년동안 연기대첩에 대하여 연기군의 용역으로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조사한 결과를 <연기대첩연구> 라는 제목으로 한 책자에 묶어서 여러 종친에게 배분해 드리게 된 점 감사히 생각합니다.



이 대첩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正史에도 나와 있지만 이번 조사연구로 더욱 자상한 점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일뿐 아니라 학자 중에는 大捷이 아니고 勝捷이라는 이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완전하게 大捷으로 확립되었으니 더욱 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燕岐大捷(연기대첩)에 대해서는 우리문중 족보에도 나타나 있는 바 고려의 상장군이시며 충렬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흔 할아버님으로 700여년 전에 몽고 및 합단적의 수차에 걸친 침공으로 급기야 나라가 위급 지경에 이르러 충렬왕께서는 강화도로 피난길에 있을 때 이곳 연기 正佐山에서 적을 완전 섬멸, 두 번 다시 침공 못하도록 종지부를 찍은 대첩의 구국명장 이었음에도



8.15해방후 우리나라 역사에 7대 대첩이 분명한데 6대 대첩만을 국사에 편찬 학교역사 교육에 시행하였고 정부에서는 大捷地마다 성역화해서 구국충절을 다한 용장들에게 빛난 얼을 천추만대 받들게 하고 있으면서도 유독 연기대첩은 삭제되어 그 날의 빛을 잃고 금일에 이르렀다 함은 우리들 온 후손된 자의 성의 부족과 한 시대의 인물고갈이라는 점에서 개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천우신조로 지난 93년에 만시지탄은 있으나 우리군 종친회에서 이 사실을 알고 온 종친이 성과 열을 한데 모아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만 천하에 밝히고자 노력해 온 결과가 책자로 발간되며 국내 요처에는 물론이고 우리 문중 가가호호마다 보물 가보로 모시게 된 점 감개무량하게 생각됩니다.



이는 오로지 여러 종친들의 물심양면의 끊임없는 협조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드리는 바이오니 배분에 유루 없으시기 바라옵니다.



1995년 3월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장 해연 배상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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