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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11 --- 말년에 충선왕의 측근으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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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22 20:31 조회1,9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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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11 --- 말년에 충선왕의 측근으로 활약





1298년에는 충선왕이 집권하였다가 1년도 안되어 물러나 원나라로 돌아가고 아버지 충렬왕이 1299년 다시 복위하여 1308년까지 집권하게 되고, 1308년에는 충선왕이 다시 복위하게 됩니다. 아버지 충렬왕과 아들 충선왕 사이의 권력투쟁에 신하들도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갈리어 세력쟁탈전이 반복되는 시기입니다.



김흔장군은 1290-1291 년간에 고려에 침입한 원나라 반군 합단적을 인후, 한희유 등과 함께 섬멸하신 바 있고, 1298년에는 고려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갈릴 때 김흔, 조인규, 박전지( 등은 충선왕파로, 한희유 등은 충렬왕파로 갈리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김흔장군은 1299년 충렬왕파인 한희유가 중용되자 원나라 연경에서 귀국하지 않고 지내다가 한희유가 죽고 1307년 충선왕 세력이 실권을 장악하자 연경에서 7년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으도첨의사사 삼중대광이 되었습니다.



---조인규는 김흔장군의 사돈이고 (김흔장군의 둘째딸이 조인규의 아들 조련에게 출가),

충선왕의 장인이 됩니다.(충선왕은 열여덟 살 때 조인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곧 조비였고).

---박전지는 충렬공의 처조카입니다. (충렬공 장인 박익정-박휘-박전지, 박익정의 장남 暉(휘)가 李藏用의 딸과 혼인)





이 시기에 충렬공께서는 말년인데도 조비(조인규의 딸) 사건에 개입하여 변호하고 있는 고려사 기록과 둘째아들 김흔장군의 충선왕파 가담 등을 고려할 때 충선왕파 측에 서신 듯 합니다.



1274년과 1281년 두 번에 걸친 일본정벌등을 주도한 충렬왕은 1290년대 이후로는 사냥과 여자에 몰두하는 등 정사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충렬공 할아버지께서는 1274년과 1281년 2차에 걸친 일본정벌을 주도하였지만, 이때 충렬왕의 친정체제 구축으로 측근세력이 부상함에 따라 무고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이후 충렬왕의 사냥과 여자 몰두 등 정사를 소홀히 하게 되자 충렬공께서는 충렬왕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였으나 1년도 안되어 원나라로 돌아가고 1299년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고 1300년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었을 때 충렬왕파 세력들은 충렬공 할아버지의 예장을 방해한 듯 합니다.







▣ 고려사



《고려사》 제31권 - 세가 제31 > 충렬왕 4 >

충렬왕 기해 25년(1299)

기해 25년(1299) 봄 정월

정유일에 만호 인후, ★김흔, 밀직 원경 등이 상부의 승인 없이 자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와 상장군 이영주를 붙잡고 그들이 반역 음모를 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 그리하여 무술일에 왕과 좌승 합산이 흥국사(興國寺)에서 한희유 등을 문초하였는데 이영주는 사실 아닌 자백을 하였으나 한희유는 끝까지 불복하였다.

계묘일에 세조(원나라 황제)의 기일(忌日)이므로 왕이 신효사에 갔다.

무신일에 인후, ★김흔, 원경이 한희유가 자기 죄를 시인하지 않는다 하여 원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상소하려 하였으나 왕이 그것을 보류하고 그 의견에 좇지 아니 하였다.

2월 무오일에 합산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한희유, 이영주를 해도(海島)로 귀양 보냈다.





《고려사》 제31권 - 세가 제31 > 충렬왕 4 >

충렬왕 경자 26년(1300)

가을 7월

정축일에 왕이 황제의 연회에 참석하였더니 황제는 이날이 황태자의 생일인 까닭에 인후, ★김흔 등을 용서하여 주었다.





《고려사》 제32권 - 세가 제32 > 충렬왕 5 >

충렬왕 정미 33년(1307)

3월

신묘일에 전왕이 동지밀직사사 김문연, 상호군 김유(金儒)를 보내 밤중에 순군부(巡軍府)로 들어가서 결재(批判)를 전달하였는바

그것은 최유엄을 도첨의 중찬 판 전리 감찰사사로, 유비를 도첨의 찬성사 판 군부사사로, 이혼을 도첨의 찬성사 판 판도사사로, 김심(金深)을 도첨의 참리 판삼사사로, 허평(許評)을 판밀직사사(密直司事)로, 김연수와 ★김태현을 지밀직사사로, 김문연을 동지밀직사사로, 윤보(尹珤)와 오한경(吳漢卿)을 밀직부사로, 박승공(朴承功)과 나윤재(羅允材)를 삼사 좌우사로, ★조인규를 자의(資議) 도첨의사사 평양군(平壤君)으로, 인후(印候) 를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平陽君)으로, ★김흔(金炘)을 자의 도첨의사사 찬성사로, 고세를 자의 밀직사사(咨議密直司事) 도첨의 참리로, 김원상(金元祥)을 자의 밀직사사 밀직부사로, 진양필을 자의 밀직사사 동지밀직으로, 최충소(崔沖紹)를 판도 판서 권수 찬성사(權授贊成事)로, 홍선(洪詵)을 상호군 권수 참리로, ★민종유(閔宗儒)를 전법 판서 권수(權授) 판밀직사사로, ★박전지(朴全之)를 판 비서시사 권수 밀직부사로, 허유전(許有全)을 감찰 대부 권수 동지밀직사사로, 정지연(鄭之衍)을 좌상시(左常侍) 권수 동지밀직사사로, ★조간(趙簡) 을 우상시 권수 밀직부사로, 이연송(李連松)을 판예빈시사 권수 밀직부사로, 박선(朴瑄)을 군부판서 권수 밀직부사로, 이산을 판 사재시사(判司宰寺事) 권수 밀직부사로, ★이진(李瑨)을 판 위위시사(判衛尉寺事) 권수 밀직부사로, 조서(趙瑞)와 김흥(金興)을 좌우 승지로, 야선단(夜先旦)과 홍승서(洪承緖)를 좌우 부승지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관직에 임명된 자가 80여 명이었다. 전 왕(충선왕)이 원나라 태자의 지시에 의하여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 송균(宋均), 김충의(金忠義), 최연(崔涓) 및 그 일당인 악한들을 (전 왕의) 저택에 잡아 가두고 왕을 경수사(慶壽寺)로 숙소를 옮기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왕(충렬)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게 되었고 국정은 모두 전 왕(충선)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고려사》 제33권 - 세가 제33 >

충선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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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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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병술일에 공주가 조비(趙妃)를 질투하니 공주의 유모가 무뢰한들과 가만히 공모하여 공주가 조비 때문에 왕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하면서 활활불화(闊闊不花), 활활대, 대장군 김정(金精), 오정규(吳挺圭) 등을 원나라에 보내 태후에게 이 사정을 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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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일에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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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에 ★조인규(趙仁規)를 사도 시중 참지 광정 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좌복야 참지 광정 원사(左僕射參知光政院事), 홍규(洪奎)를 수 사도 영 경 영궁사(守司徒領景靈宮事)로, 정가신(鄭可臣)을 사공 우복야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 참지 광정 원사(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守國史參知光政院事)로, 인후(印侯)를 광정사 참지 기무(參知機務)로, ★김흔(金渾)을 검교 수 사도 영 봉상시사로, 차신(車信)과 이지저를 모두 검교 사도 자정 원사로, 김지숙(金之淑)을 동지 광정원사 참지기무로, ★안향(安珦)을 참지 기무 행 동경 유수집현전 대학사 계림부윤으로, 유비(柳庇)를 광정부사 겸권 참지 기무로, 최유엄을 검교 사공 사헌 대부로, 이혼(李混)을 검교 사공 서경 유수 평양부윤으로, 정개를 남경 유수 광릉 부윤(廣陵府尹)으로, 최충소(崔沖紹)를 동지 자정원사 행 중경 유수 개원(開元) 부윤 과의군(果毅軍) 도지휘사로, 박의(朴義)를 동지 자정원사로, ★민지(閔漬)를 집현전 대학사 첨(簽)을 광정원사로, 원경(元卿)을 중경 유수 과의군 도지휘사로, ★민종유(閔宗儒)를 전조상서(銓曹尙書) 숭복관사(崇福館使)로, 허평(許評)을 민조(民曹) 상서로, 윤보(尹珤)를 홍문관 학사 의조(儀曹) 상서로, 최감을 사림(詞林) 학사 승지 형조 상서로, 전승(全昇)을 숭문관 학사 병조 상서로, 유유(柳栯)를 병조 상서 응양군(鷹揚軍) 상장군으로, 오한경(吳漢卿)을 사림 학사 시(試)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로, ★이진을 사림 학사 시 우산기상시로, 홍자한(洪子翰)을 금오위(金吾衛) 섭(攝) 상장군 겸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장석(張碩)을 광정 도승지 봉상경(奉常卿)으로, ★김순(金恂)을 광정 부사 승지 성균 제주로, 조서(趙瑞)를 광정 승지 전객경(典客卿)으로, ★이승휴를 사림 시독 학사 시(試) 비서감(秘書監) 좌간의대부로, 심봉길(沈逢吉)을 사헌 중승으로, 권영(權永)을 사림 시강 학사 시 위위경(衛尉卿)으로, ★조간(趙簡)을 형조 시랑 우간의 대부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33권 - 세가 제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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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덕 3년에 우리 나라에서 무뢰한들이 난을 꾸미려고 할 적에 만호 홀라대와 ★김흔 등이 미리 그 음모를 탐지하였으므로 능히 난을 방지할 수 있었으니 그 공로도 상을 줄 만하다. 특별히 기록하고 등용할 것.





《고려사》 제123권 - 열전 제36 > 폐행 1 >

인후

〔승단(承旦)의 기사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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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단(哈丹)이 침입하였을 때 왕은 재추들을 불러 놓고 방어 대책을 토의하였다. 이때 인후는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친히 동계(東界)로 나가서 적의 길을 끊고 만약 적이 서울 근방에 침입하면 전하는 강화도로 들어가고 우리들로 하여금 병력을 거느리고 방어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내가 먼저 피난하여 백성을 낙심시키겠는가? 적이 비록 승승장구하여 들어와도 내가 삼군의 후군이 되어 사직을 보존할 것이다”하고 인후를 파견하여 방어케 하였다.

인후는 연기(燕岐)까지 적을 추격하여 한희유(韓希愈), ★김흔과 함께 적을 격파한 후 전승 보고를 하고 포로를 보냈더니 원나라 황제가 인후에게 진변 만호부 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 벼슬을 주고 옥대(玉帶) 1개, 은 1정(錠), 말안장 1벌을 상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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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유가 합포에서 진수할 때였다. 인후가 왕명을 받고왔는데 서로 자리를 다투게 되었다. 한희유는 한참 동안이나 인후의 목을 틀어쥐고 배를 타고 올라 앉아 있었다. 인후가 돌아 와서 공주에게 하소연하고 한희유를 처벌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주는 말하기를 “한희유는 나라에 공로가 있고 나이도 너보다 많다. 한희유가 아니면 누가 감히 너를 모욕(侮謔)할 사람이 있겠는가? 다시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인후가 ★김흔, 원경(元卿)과 함께 한희유를 거꾸러뜨릴 음모를 하였으나 공주가 죽고 또 왕이 한희유를 정승으로 삼았으므로 인후 등이 두려워서 감히 어찌 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중(僧) 일영(日英)이 거짓말을 꾸며서 낭장 이승우(李承祐)에게 말하기를 “한희유 등이 반역을 음모한다”고 하였고 이승우는 이것을 인후와 ★김흔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인후와 ★김흔 등은 군대를 발동시켜서 한희유, 상장군 이영주(李英柱), 천호 석천보(石天補) 및 그의 아우 석천경(石天卿), 장군 이무(李茂), 박송견(朴松堅), 원충갑(元忠甲), 한대장(韓大莊), 유수대(兪守大), 전 중낭장 백서경(白瑞卿), 별장 배인검(裴仁儉) 등 10여 명을 체포한 후 행성(行省) 좌승(左丞) 합산(哈散)에게 말하기를

“한희유 등이 장차 인후와 ★김흔을 죽이고 왕을 납치하여 바다 섬으로 도망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사태가 긴급하여 만약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그 화가 예측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지금 이미 체포했으니 좌승은 이것을 처결하라”하였다.

이에 대하여 합산이 “이 일을 임금도 알고 있는가?”라고 물으니 인후는 “임금이 어찌 모르겠는가?”라고 하였다. 합산은 그 아들을 왕궁으로 보내여 동정을 살피게 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이것을 왕이 알고 있다면 반드시 경비가 엄할 것이다. 너는 왕을 보고 ‘우리 아버지가 사변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호위병이 없으므로 저더러 병기를 빌려 오라고 했습니다’하라”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이 이른 새벽에 왕궁으로 가니 궁중은 고요하고 호위병은 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왕궁에 들어가니 왕은 즉시로 그를 불러 보고 활과 칼을 주었다. 그 아들이 돌아와서 합산에게 말하기를

“전자의 말을 허튼소립니다. 그러나 이미 한희유 등을 잡았으니 왕궁에 가서 그들을 심문할 것을 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합산과 함께 문초했으나 불복하였으므로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고 일영은 도망쳤다.

왕은 합산과 함께 또 한희유 등을 흥국사(興國寺)에서 5일간에 걸쳐 문초했으나 이영주와 배인검이 거짓으로 죄를 인정했을 뿐이요. 3일간 더 문초했으나 한의유 등은 끝내 불복하였다.

인후, ★김흔, 원경은 자기들 도당 상장군 강수, 대장군 김칠초(金七貂), 장군 환정(桓貞), 이우(李瑀), 소윤(少尹) ★민적 등과 함께 일영이 도주하였으므로 한희유 등이 불복한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가서 항제에게 고소하려 하였다. 이때 왕은 승지 김심(金深)을 시켜 만류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



을미 21년(1295), 원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

○ 정가신(鄭可臣)을 첨의시랑 찬성사로, ★김흔(金?)을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로, 김지숙(金之淑)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안향(安珦)을 밀직사사로, 이혼(李混)을 동지밀직사사로 삼았다.





기해 25년(1299), 원 대덕 3년

○ 봄 정월에 만호 인후(印侯)ㆍ★김흔(金?)과 밀직 원경(元卿) 등이 마음대로 군사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韓希愈)를 체포하였다.

과거에 인후가 안평공주(安平公主)에게 참소하기를, “희유가 일찍이 신의 목을 쥐고 신의 배를 타고 앉아 욕을 보였습니다.”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희유는 공로가 있고 또 나이가 너보다 많으니, 희유가 아니면 누가 감히 너를 모욕하겠느냐. 다시 말하지 말라.”하였다.

그런데도 후 등은 그를 모함하려 하여 서로 반목하고 있었는데, 공주가 죽은 뒤에 왕이 희유를 정승으로 삼으니, 후 등은 두려워서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중 일영(日英)이 낭낭 이승우(李承祐)에게 무고하기를, “희유 등이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하니, 승우가 이 말을 후 등에게 고하였다.

이에 후 등이 군사를 동원해서 회유와 상장군 이영주(李英柱), 천호(千戶) 석천보 및 그의 아우 천경(天卿), 장군 이무(李茂)ㆍ박송견(朴松堅)ㆍ원충갑(元?甲)ㆍ한대장(韓大莊)ㆍ유수대(兪守大), 전 중랑장 백서경(白瑞卿), 별장(別將) 배인검(裵仁儉) 등 10여 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곧 좌승 합산(哈散)에게 고하기를, “희유 등이 장차 후와 흔을 죽이고서 왕을 끼고 섬으로 달아나려 하므로, 일이 급박하여 먼저 처치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어찌될지 모르겠기에 이제 그들을 체포하였으니, 좌승(左丞)께서 처리하시오”하였다.

합산이 말하기를,“왕도 알고 있느냐?”하니, 말하기를,“왕이 만일 모르시면 누가 감히 이런 일을 모의할 수 있겠소.”하였다.

합산이 몰래 그의 아들을 왕궁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하면서 경계하기를,“왕이 만약 그의 모의를 알았다면 반드시 경비를 삼업하게 할 것이니, 너는 왕을 보고 아뢰기를, 저의 아버지가 변이 있음을 듣고 두려운 데다 또 군병의 호위도 없어서 저를 보내어 군사를 빌려 오라 하였습니다’하라”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그의 아들이 왕궁에 가보니, 궁중은 적적하고 호위병들은 모두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도 않았었다. 올라가서 뵈니, 왕이 급히 불러 보고는 활과 칼을 주었다. 그의 아들이 돌아와 합산에게 고하기를,“먼저 한 말은 거짓이었습니다.”하였다.

그러나 벌써 희유 등을 체포한 후였기 때문에 왕궁에 나아가 이들을 신문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합산과 함께 희유 등을 국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아니하여 순마소에 가두었는데, 일영은 도망쳐 버렸다.

왕이 합산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모두 닷새 동안 희유 등을 국문하니, 다만 영주와 인검만이 거짓으로 자복하였으며, 또 희유 등을 사흘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 인후ㆍ★김흔ㆍ원경 및 상장군 강수(姜?), 대장군 김칠초(金七貂), 장군 환정(桓貞)ㆍ이우(李瑀), 소윤(少尹) 민적(閔?) 등이, 일영은 도망가고 한희유 등은 자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장차 원 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호소하려 하므로, 왕이 우부승지 김심(金深)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강수 등은 모두 인호와 ★김흔의 한 패로서 희유를 모함한 자들이다.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 가을 7월에

○ 황제가 황태자의 천추절(千秋節)을 맞아 인후(印侯)와 ★김흔(金?) 등을 사면하였다.





기유 원년(1309), 원 지대 2년

○ 가을 7월에 상락공(上洛公) ★김흔(金?)이 졸하였다. 흔은 성품이 활달하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으며, 친척 중에서 곤궁한 자를 더욱 구휼하였다.





▣ 솔내영환 - 충렬왕과 충선왕의 부자간 세력다툼 사이에서 충렬공과 아드님(김흔)의 입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을 일목요연히 정리하여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일목요연한 자료정리에 감사드립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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