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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진주성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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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1-10-05 19:35 조회2,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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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충무공 시호를 받으신 분은 두분이신데, 우리문중에 김시민장군과 이순신장군 입니다.

김시민장군의 진주성 전투를 소개할까 합니다.



김성일이 의병장 곽재우.이달등을 보내어 진주를 구원하게 하고, 사잇길로 군기를 수송하게 하였는데,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크게 격파하여 진주가 포위에서 풀렸다. 당초 왜장이 군사 수만 명을 모두 동원



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의 군사는 3천여 명이었다. 김시민이 여러 성첩을 나누어지키게 하면



서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니 성 안이 적요하였다. 적이 기치와 개삽을 많이 설치하고 금으로 꾸민 가면에



의복을 이상하게 차려 입어 햇빛에 번쩍이고 바람에 펄럭이니 온갖 형상에 눈이 부시고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왜장 6명이 진을 나누어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총수수천 명이 항상 산 위에서 성 안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그 형세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는 듯하였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김시민은 군사들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고 적들의 소리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즉시 포를 쏘고 북을



울리며 응전하게 하였다. 적이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많이 베어 엮어서 막이를 만들고 흙을 쌓아 그 속



을 채워 우리 군사가 모르게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었는데 한 칸 너비쯤 되는 것으로 그 위에 망석



을 덮어 많은 군사가 동시에 일제히 오르게 하려 하였으며, 3층의 산대를 만들어 성첩을 내려다 보게 하



였다. 김시민은 화구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어 성 위에 감춰두게 하고 대포및 대석



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적이 공격



할 장비를 모두 갖추고 사면으로 육박하자, 성 안에서 현자총을 쏘아 산대의 적을 맞춰 떨어뜨리고, 화약



과 풀로 송장을 태웠으며, 대포루 대나무로 엮을 긴 사다리를 부수고, 끓인 물을 퍼붓기도 하고 큰 돌을



던지기도 하여 여러 가지의 공격용 장비를 격파하였다. 9월 10일 밤중에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다가



몰래 되돌아와 적의 대장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서



처음에는 동문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



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



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



시켰다. 바야흐로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또 하나의 대진이 동문의 경우처럼 갑자기 북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만호 최덕량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항해 싸우며 일사불란하게 막아내었는데, 동녘이 밝아오자 조



금 뜸해졌다. 성 안의 나무와 돌, 기와,띠풀 등이 거의 없어졌으며 시민도 탄환에 맞아 누워 있었다. 이때



곤양 군수 이광악이 왜장을 쏘아 죽이니 한낮이 되어서야 적진이 미로소 퇴각하며 시체를 태우고 포위를



풀고 흩어졌다. 성이 포위당한 10여 일 동안 4~5차례 큰 전투를 벌이면서 안팎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적



이 먼저 도망하였다. 바아흐로 포위하고 주둔할 때에 양도의 구원병은 모두 요새에 웅거하여 결진하고서



밤이면 가까운 산에 올라 성 안과 함께 불을 들어 북을 치며 서로 응원하였으나 감히 함부로 공격하지 못



하였다. 적이 나누어 이웃 고을을 노략질하자, 구원병이 요로에서 막고 습격하여 상당수를 살해하거나 상



처를 입혔는데, 김준민은 여러 번 싸움에서 완전하였으므로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미 퇴



각하여 본 소굴로 돌아갔으므로 여러 고을이 모두 수복되었다. 김시민의 병이 심해지자 김성일이 서예원



을 대신하게 하였다. 서예원은 완력은 있으나 어리석은 겁장이로 재능이 없는데, 그의 형 서인원이 명사



이기 때문에 특별히 발탁하여 변수를 삼았었다. 그가 북도에 있을 때에는 수급을 거짓으로 만들어 공을



자랑하여 직질이 올랐었으므로 조헌이 매번 상소하여 그의 죄를 논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해 부사로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김성일을 따라다녔으므로 김시민을 대신하였는데, 이때부터 진주성의 수비는



다시 전일과 같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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