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안정공파 김뉴(金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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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05 22:31 조회2,170회 댓글0건본문
안정공파 김뉴(金紐)
안정공 김구덕의 중손자인 조선초기의 문신 김뉴(金紐)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 모아 보았습니다.
▣ <신고한국서예사, 김기승, 1975>
金紐의 書畵詩琴 (김뉴의 서화시금)
김뉴(1420- ? )는 본관이 안동, 김방경의 후손, 자가 子固(자고)요, 호가 琴軒(금헌), 翠軒(취헌), 雙溪齋(쌍계재), 觀後庵(관후암), 上洛居士(상락거사) 등으로 많았다.
그는 세조10년(1464)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호조좌랑이 되어서 [경국대전] 중의 [吏典]을 校(수교)하였다.
1466년에 발영시급제, 동년의 등준시에도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書畵詩琴(서화시금)으로 이름이 높았다.
[四佳集(사가집)]에 의하면 ---(중략)---
그가 초서와 행서를 잘 썼다는 사실은 [ 齋叢話(용재총화)]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즉 ---(중략)---
▣ <근역서화징, 오세창, 1928>
20. 김유(金紐)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상락거사(上洛居士). 본관은 안동. 상락공 방경의 7대손. 세종2년 경자 (1420) 생, 세조9년 갑신 (1463) 에 문과하고 벼슬은 참판
초서행(草書行)을 지어서 김자고(金子固)에게 주기를
이장(二張: 張芝,張旭)도 이미 갔고 우군(右軍: 王羲之)도 갔으니 二張己浙右軍非
장초(章草)에서 성인이라 일컬을 이가 별로 없다. 章草稱聖天下稀
그 사이에 명필이란 자가 빗발같이 많으나 中間作者多似雨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같은 것은 쳐줄 필요조차 없다 家鷄野?不須數
그대는 어디에서 초결(草訣)을 얻어 왔는고 君從何處得草訣
당신의 글씨는 모두 기이하고 뛰어나게 되었다 筆劃超諸?奇絶
지금 나를 위하여 두어 장을 썼으니 如今爲我書數張
마루 가운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다 風雨??生中堂
난(鸞)새가 춤추는 듯, 봉황이 나는 듯, 용이 뛰는 듯 鸞翊鳳? 龍躍
옥수(玉樹)가지에 쇠사슬이 얽히고 설켰구나 玉樹交柯?鐵索
여윈 뼈와 통통한 살이 고루 배치되었으니 一肥一?骨肉均
날고 뛰고 변화하여 귀신을 놀래키는구나 飛動變化驚鬼神
---(하략)--- <사가집>
자고는 평양부원군 조준(趙俊)의 외손이니 부귀가에 나서 젊을 때부터 방랑하여 단속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짓는 데에 능했으며 또 행서와 초서를 잘 썼고 거문고까지도 뛰어났다.
여러번 대과(大科)에 당선되어서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대신들이었다. 잔치 베풀기를 좋아했으니 술잔 같은 모든 도구들이 지극히 호화롭고 사치했으며, 문아(文雅)가 한 시대를 휩쓸었다.
서재를 남강(南江)에 짓고 또 반궁(泮宮) 북쪽 골짜기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서 매양 봄이면 친구들을 불러 시를 짓고 실컷 마시며 멋지게 놀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지목했으니, 시와 글씨와 거문고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년에 두 발이 마비되어서 일어나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얘기하고 술 마시고 시 읊조리는 것은 여전하였다. <용재총화>
이李자는 金자의 잘못이다 유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세조때 사람. 문과하여 벼슬은 판서. 그림을 잘 그렸다. <연려실기술 별집>
필적모간 <해동명적> <초로관주>
*章草(장초) : 초서의 일종으로 필획에 隸書(예서)의 파임이 있고 매 글자를 독립해 쓴다. <書斷 上> 또는 초서를 章奏文(장주문)에 통용해 쓰므로 이렇게 부른다 <日知錄, 草書>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 晉(진) 庾翼(유익)의 고사. 유익이 글씨를 잘 썼는데 아들들이 자신의 글씨를 배우지 않고 王羲之(왕희지)의 글씨만 배우므로 "우리 아이들은 집안의 닭은 싫어하고 들판에 있는 따오기만 좋아한다" 고 했다. <晉中興書>
*草訣(초결) : 草書를 쓰는 비결
*泮宮(반궁) : 반궁은 周代 諸侯(제후)의 學宮(학궁). 여기에서는 成均館의 별칭
*子固 : 원문에는 子缺로 되어 있으나 출전인 <연려실기술 별집> (권16, 地理典故, 山川形勝)에 子固로 되어 있으므로 바로 잡는다.
▣ <근역서화징, 오세창, 1928>
153.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 익재 이제현의 손녀이며 좌의정 홍응의 외조모
홍응이 김유(金紐)가 소장한 [팔경시(八景詩)] 발문에 쓰기를,
"우리집 외조모는 바로 익재의 손녀이시니, 그 분의 시문과 필적이 한 상자에 가득했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그다지 아낄 줄을 몰라서 쉽게 여기고 잘 보관하지 못했다. 아 슬프다. 자손으로서 경솔하여 제구실하지 못함이 이러했구나.
그런데 지금 자고(子固, 金紐) 가 보관한 8장의 그림을 보니 시체(詩體)도 진실로 따라갈 수 없으니 해서법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자고의 독실하게 좋아함이 없었다면, 내가 오늘날 어떻게 다시 그 진적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익성(益城)의 야로(野老)는 쓰노라 <해동명적>
*金紐 (세종2, 1420- ?) :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三絶.
*野老 : 노인의 별칭
▣ <서울600년 4권, 김영상, 1996>
琴軒의 雙溪齋 (금헌의 쌍계재)
성균관 북쪽 운치 깃든 절경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유의 본관은 안동으로 --- (중략) --- 시와 글씨, 거문고에 뛰어나서 당대의 3絶이라 일컬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서울 성안에서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다.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쌍계재 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생략) ---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강희맹(1424-1483)은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당대의 으뜸이어서 죽은 뒤에 성종 임금께서 친히 서거정을 시켜 그의 유고를 편집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서울을 명소를 소개하는 글 가운데 지금의 이화동 근방에 있던 쌍계동과 이곳의 쌍계재를 혼동하는 예가 자주 눈에 띄나, 성균관 반수 위에 있던 쌍계재와 낙산기슭의 상계동은 전혀 별개의 명소였다.
(그림) 금헌 김유의 雪憔圖(설초도)
▣ 조선 문과방목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뉴(金紐)
세조(世祖)10년(146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20년, 경자
자(字) 자고(子固)
호(號) 쌍계(雙溪)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중엄(金仲淹)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오문(金五文)
증조부(曾祖父) 김구덕(金九德)
외조부(外祖父) 조대림(趙大臨)
처부(妻父) 이항,전양겸(李恒,全梁謙)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술1466(丙戌1466)
전력(前歷) 녹사(錄事)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안정공 김구덕의 중손자인 조선초기의 문신 김뉴(金紐)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 모아 보았습니다.
▣ <신고한국서예사, 김기승, 1975>
金紐의 書畵詩琴 (김뉴의 서화시금)
김뉴(1420- ? )는 본관이 안동, 김방경의 후손, 자가 子固(자고)요, 호가 琴軒(금헌), 翠軒(취헌), 雙溪齋(쌍계재), 觀後庵(관후암), 上洛居士(상락거사) 등으로 많았다.
그는 세조10년(1464)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호조좌랑이 되어서 [경국대전] 중의 [吏典]을 校(수교)하였다.
1466년에 발영시급제, 동년의 등준시에도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書畵詩琴(서화시금)으로 이름이 높았다.
[四佳集(사가집)]에 의하면 ---(중략)---
그가 초서와 행서를 잘 썼다는 사실은 [ 齋叢話(용재총화)]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즉 ---(중략)---
▣ <근역서화징, 오세창, 1928>
20. 김유(金紐)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상락거사(上洛居士). 본관은 안동. 상락공 방경의 7대손. 세종2년 경자 (1420) 생, 세조9년 갑신 (1463) 에 문과하고 벼슬은 참판
초서행(草書行)을 지어서 김자고(金子固)에게 주기를
이장(二張: 張芝,張旭)도 이미 갔고 우군(右軍: 王羲之)도 갔으니 二張己浙右軍非
장초(章草)에서 성인이라 일컬을 이가 별로 없다. 章草稱聖天下稀
그 사이에 명필이란 자가 빗발같이 많으나 中間作者多似雨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같은 것은 쳐줄 필요조차 없다 家鷄野?不須數
그대는 어디에서 초결(草訣)을 얻어 왔는고 君從何處得草訣
당신의 글씨는 모두 기이하고 뛰어나게 되었다 筆劃超諸?奇絶
지금 나를 위하여 두어 장을 썼으니 如今爲我書數張
마루 가운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다 風雨??生中堂
난(鸞)새가 춤추는 듯, 봉황이 나는 듯, 용이 뛰는 듯 鸞翊鳳? 龍躍
옥수(玉樹)가지에 쇠사슬이 얽히고 설켰구나 玉樹交柯?鐵索
여윈 뼈와 통통한 살이 고루 배치되었으니 一肥一?骨肉均
날고 뛰고 변화하여 귀신을 놀래키는구나 飛動變化驚鬼神
---(하략)--- <사가집>
자고는 평양부원군 조준(趙俊)의 외손이니 부귀가에 나서 젊을 때부터 방랑하여 단속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짓는 데에 능했으며 또 행서와 초서를 잘 썼고 거문고까지도 뛰어났다.
여러번 대과(大科)에 당선되어서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대신들이었다. 잔치 베풀기를 좋아했으니 술잔 같은 모든 도구들이 지극히 호화롭고 사치했으며, 문아(文雅)가 한 시대를 휩쓸었다.
서재를 남강(南江)에 짓고 또 반궁(泮宮) 북쪽 골짜기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서 매양 봄이면 친구들을 불러 시를 짓고 실컷 마시며 멋지게 놀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지목했으니, 시와 글씨와 거문고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년에 두 발이 마비되어서 일어나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얘기하고 술 마시고 시 읊조리는 것은 여전하였다. <용재총화>
이李자는 金자의 잘못이다 유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세조때 사람. 문과하여 벼슬은 판서. 그림을 잘 그렸다. <연려실기술 별집>
필적모간 <해동명적> <초로관주>
*章草(장초) : 초서의 일종으로 필획에 隸書(예서)의 파임이 있고 매 글자를 독립해 쓴다. <書斷 上> 또는 초서를 章奏文(장주문)에 통용해 쓰므로 이렇게 부른다 <日知錄, 草書>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 晉(진) 庾翼(유익)의 고사. 유익이 글씨를 잘 썼는데 아들들이 자신의 글씨를 배우지 않고 王羲之(왕희지)의 글씨만 배우므로 "우리 아이들은 집안의 닭은 싫어하고 들판에 있는 따오기만 좋아한다" 고 했다. <晉中興書>
*草訣(초결) : 草書를 쓰는 비결
*泮宮(반궁) : 반궁은 周代 諸侯(제후)의 學宮(학궁). 여기에서는 成均館의 별칭
*子固 : 원문에는 子缺로 되어 있으나 출전인 <연려실기술 별집> (권16, 地理典故, 山川形勝)에 子固로 되어 있으므로 바로 잡는다.
▣ <근역서화징, 오세창, 1928>
153.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 익재 이제현의 손녀이며 좌의정 홍응의 외조모
홍응이 김유(金紐)가 소장한 [팔경시(八景詩)] 발문에 쓰기를,
"우리집 외조모는 바로 익재의 손녀이시니, 그 분의 시문과 필적이 한 상자에 가득했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그다지 아낄 줄을 몰라서 쉽게 여기고 잘 보관하지 못했다. 아 슬프다. 자손으로서 경솔하여 제구실하지 못함이 이러했구나.
그런데 지금 자고(子固, 金紐) 가 보관한 8장의 그림을 보니 시체(詩體)도 진실로 따라갈 수 없으니 해서법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자고의 독실하게 좋아함이 없었다면, 내가 오늘날 어떻게 다시 그 진적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익성(益城)의 야로(野老)는 쓰노라 <해동명적>
*金紐 (세종2, 1420- ?) :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三絶.
*野老 : 노인의 별칭
▣ <서울600년 4권, 김영상, 1996>
琴軒의 雙溪齋 (금헌의 쌍계재)
성균관 북쪽 운치 깃든 절경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유의 본관은 안동으로 --- (중략) --- 시와 글씨, 거문고에 뛰어나서 당대의 3絶이라 일컬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서울 성안에서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다.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쌍계재 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생략) ---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강희맹(1424-1483)은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당대의 으뜸이어서 죽은 뒤에 성종 임금께서 친히 서거정을 시켜 그의 유고를 편집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서울을 명소를 소개하는 글 가운데 지금의 이화동 근방에 있던 쌍계동과 이곳의 쌍계재를 혼동하는 예가 자주 눈에 띄나, 성균관 반수 위에 있던 쌍계재와 낙산기슭의 상계동은 전혀 별개의 명소였다.
(그림) 금헌 김유의 雪憔圖(설초도)
▣ 조선 문과방목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뉴(金紐)
세조(世祖)10년(146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20년, 경자
자(字) 자고(子固)
호(號) 쌍계(雙溪)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중엄(金仲淹)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오문(金五文)
증조부(曾祖父) 김구덕(金九德)
외조부(外祖父) 조대림(趙大臨)
처부(妻父) 이항,전양겸(李恒,全梁謙)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술1466(丙戌1466)
전력(前歷) 녹사(錄事)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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