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 수원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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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4-01 18:20 조회1,690회 댓글0건본문
수원백씨(水原白氏)
◆시조(始祖) 및 본관(本貫)의 유래(由來)◆
白氏(백씨)의 姓源(성원)은 「帝王傳承姓源圖(제왕전승성원도)」에 黃帝(황제)의 後孫(후손)인
白乙丙(백을병)의 後裔(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白乙丙(백을병)의 遠孫(원손) 白宇經(백우경)이 蘇州(소주) 출신으로 唐朝時代(당조시대)에
出仕(출사)하여 僉議事(첨의사)·吏部 尙書(이부상서)에 이르렀으나, 간신(●臣) 杜以奇(두이기)·
裵玄墨(배현묵) 등의 모함을 당하자 서기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 스스로 唐(당)을 떠나 新羅
(신라)로 건너와서 鷄林 紫玉山(계림자옥산)밑에 迎月堂 萬歲菴(영월당만세암)을 짓고 定着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白氏(백씨)의 淵源(연원)이 된다.
그후 世界(세계)가 失傳(실전)되어 신라 景明王(경명왕) 때 中郞將(중랑장)을 지낸 昌稷(창직)을
一世祖(일세조)로 하여 繼代(계대)하고 있으며, 昌稷(창직)의 曾孫(증손) 揮(휘)가 高麗(고려) 穆宗
(목종)조에 大司馬 大將軍(대사마대장군)으로 水原君(수원군)에 봉해져 水原(수원) 지방을 封土
(봉토)로 下賜(하사)받았고, 9세손天藏(천장)이 元(원)나라에서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吏部 尙書(이부상서)를 지내고 고려 忠宣王(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隨城(수성:수원의
옛 지명) 伯(백)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본관)을 水原(수원)으로 하게 되었다.
白氏(백씨)의 本貫(본관)은 「朝鮮氏族統譜(조선씨족통보)」에 184本(본)이 전하며 「增補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에는 157本(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水原 白氏(수원백씨)의 分派(분파)이므로
「甲子大同譜(갑자대동보)」 發刊(발간) 당시 각派(파)의 代表(대표)들이 會合(회합)하여 貫鄕
(관향)을 水原(수원)으로 單一化(단일화) 하기로 합의(合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藍浦(남포)·
大興(대흥)·淸道(청도)·扶餘(부여)·林川(임천)·泰仁(태인) 등을 貫鄕(관향)으로 삼고 있는 白氏(백씨)가
있으나, 少數(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白氏(백씨)는 水原(수원)을 本貫(본관)으로 하고 있다.
「白氏己亥大同譜(백씨기해대동보)」에 의하면 白氏(백씨)는 24개 파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壬戌大同譜(임술대동보)」에는 5개 파가 증가되어 29개 파로 分類(분류)하고 있다.
白氏(백씨)는 역사상 비교적 많은 人物(인물)을 배출하여 京畿(경기)·湖南(호남)과 關西 地方
(관서지방)에서 名門(명문)으로 알려져 왔으며, 특히 學文(학문)과 藝術(예술)의 가문으로 더욱 빛났다.
그중에서 文節(문절)의 아들 이정(이正)은 安珦(안향)의 門下(문하)에서 글을 읽고 고려 忠烈王
(충렬왕) 때 燕京(연경:중국 북평의 옛 이름)에 들어가 朱子學(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性理學(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파시키는데 큰 功(공)을 세웠으며, 門下生(문하생)인 李齊賢(
이제현)에게 학문을 전승시켜 뒷날 朝鮮朝(조선조)에서 찬란하게 開花(개화)하였다.
昇平 副使(승평부사) 堅(견)의 맏아들 文寶(문보)는 權溥(권부)에게 글을 배워 당대의 名臣(명신)이자
學者(학자)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排佛論(배불론)을 주장했고 문집으로 「淡庵逸集(담암일집)」
이 전한다.
조선 중엽의 名臣(명신)인 仁傑(인걸)은 趙光祖(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워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스승과 동문들을 잃고 金剛山(금강산)에 들어가 學問(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뒤에 大科(대과)에
급제하여 三司(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쳐서 부른 속칭)의 여러 벼슬을 지낸 후 宣祖(선조) 때
大司憲(대사헌)을 거쳐 右參贊(우참찬:의정부의 정2품 문관 벼슬)에 이르렀다.
성격이 강직하고 所信(소신)이 굳었던 그는 일찌기 明宗(명종) 때 권신 尹元衡(윤원형)에게 마음을
사서 파직당한 일도 있었으며, 大司憲(대사헌)으로 있을 때 朝廷(조정)의 권신들을 거리낌없이
탄핵했고 內外政勢(내외정세)를 밝혀 軍備(군비)의 강화(强化)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門下(문하)에서 成渾(성혼)·辛應時(신응시) 등 훌륭한 學者(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死後(사후)
淸白吏(청백리:청렴 결백한 벼슬아치)에 錄選(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惟咸(유함)도 光海君(광해군) 때 直提學(직제학:집현전의 종3품, 예문관·홍문관의 정3품
벼슬)을 지냈으며, 明軍(명군)의 軍糧調達(군량조달) 임무를 맡기도 했으나 大北派(대북파)의 탄핵을
받았다.
한편 仁傑(인걸)의 형 仁豪(인호)와 사촌 仁英(인영)·仁雄(인웅) 등이 모두 文章(문장)에 뛰어나
「四白文章(사백문장)」으로 불리워졌으며, 이들 兄弟(형제)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水原 白氏(
수원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외 宣祖(선조) 때 詩人(시인)으로서 文筆(문필)로 일세를 풍미한 光勳(광훈)과 詩客(시객)으로
명성을 떨친 振南(진남), 「關西別曲(관서별곡)」으로 國文學史(국문학사)를 빛낸 광홍(光弘) 등이
뛰어났다.
憲宗(헌종) 때 兵曹 參判(병조참판) 弘洙(홍수)와 高宗(고종) 때 西洋文物(서양문물)의 선구자인
春培(춘배)는 獨立運動(독립운동)으로 이름을 떨친 貞基(정기)·龍城(용성)·一圭(일규)·寬洙(관수)·
南採(남채)·南俊(남준)·日鎭(일진) 등과 함께 韓末(한말)에 와서 家門(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 김항용 -
▣ 김주회 -
▣ 김윤식 -
▣ 김윤만 -
◆시조(始祖) 및 본관(本貫)의 유래(由來)◆
白氏(백씨)의 姓源(성원)은 「帝王傳承姓源圖(제왕전승성원도)」에 黃帝(황제)의 後孫(후손)인
白乙丙(백을병)의 後裔(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白乙丙(백을병)의 遠孫(원손) 白宇經(백우경)이 蘇州(소주) 출신으로 唐朝時代(당조시대)에
出仕(출사)하여 僉議事(첨의사)·吏部 尙書(이부상서)에 이르렀으나, 간신(●臣) 杜以奇(두이기)·
裵玄墨(배현묵) 등의 모함을 당하자 서기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 스스로 唐(당)을 떠나 新羅
(신라)로 건너와서 鷄林 紫玉山(계림자옥산)밑에 迎月堂 萬歲菴(영월당만세암)을 짓고 定着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白氏(백씨)의 淵源(연원)이 된다.
그후 世界(세계)가 失傳(실전)되어 신라 景明王(경명왕) 때 中郞將(중랑장)을 지낸 昌稷(창직)을
一世祖(일세조)로 하여 繼代(계대)하고 있으며, 昌稷(창직)의 曾孫(증손) 揮(휘)가 高麗(고려) 穆宗
(목종)조에 大司馬 大將軍(대사마대장군)으로 水原君(수원군)에 봉해져 水原(수원) 지방을 封土
(봉토)로 下賜(하사)받았고, 9세손天藏(천장)이 元(원)나라에서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吏部 尙書(이부상서)를 지내고 고려 忠宣王(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隨城(수성:수원의
옛 지명) 伯(백)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본관)을 水原(수원)으로 하게 되었다.
白氏(백씨)의 本貫(본관)은 「朝鮮氏族統譜(조선씨족통보)」에 184本(본)이 전하며 「增補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에는 157本(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水原 白氏(수원백씨)의 分派(분파)이므로
「甲子大同譜(갑자대동보)」 發刊(발간) 당시 각派(파)의 代表(대표)들이 會合(회합)하여 貫鄕
(관향)을 水原(수원)으로 單一化(단일화) 하기로 합의(合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藍浦(남포)·
大興(대흥)·淸道(청도)·扶餘(부여)·林川(임천)·泰仁(태인) 등을 貫鄕(관향)으로 삼고 있는 白氏(백씨)가
있으나, 少數(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白氏(백씨)는 水原(수원)을 本貫(본관)으로 하고 있다.
「白氏己亥大同譜(백씨기해대동보)」에 의하면 白氏(백씨)는 24개 파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壬戌大同譜(임술대동보)」에는 5개 파가 증가되어 29개 파로 分類(분류)하고 있다.
白氏(백씨)는 역사상 비교적 많은 人物(인물)을 배출하여 京畿(경기)·湖南(호남)과 關西 地方
(관서지방)에서 名門(명문)으로 알려져 왔으며, 특히 學文(학문)과 藝術(예술)의 가문으로 더욱 빛났다.
그중에서 文節(문절)의 아들 이정(이正)은 安珦(안향)의 門下(문하)에서 글을 읽고 고려 忠烈王
(충렬왕) 때 燕京(연경:중국 북평의 옛 이름)에 들어가 朱子學(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性理學(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파시키는데 큰 功(공)을 세웠으며, 門下生(문하생)인 李齊賢(
이제현)에게 학문을 전승시켜 뒷날 朝鮮朝(조선조)에서 찬란하게 開花(개화)하였다.
昇平 副使(승평부사) 堅(견)의 맏아들 文寶(문보)는 權溥(권부)에게 글을 배워 당대의 名臣(명신)이자
學者(학자)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排佛論(배불론)을 주장했고 문집으로 「淡庵逸集(담암일집)」
이 전한다.
조선 중엽의 名臣(명신)인 仁傑(인걸)은 趙光祖(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워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스승과 동문들을 잃고 金剛山(금강산)에 들어가 學問(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뒤에 大科(대과)에
급제하여 三司(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쳐서 부른 속칭)의 여러 벼슬을 지낸 후 宣祖(선조) 때
大司憲(대사헌)을 거쳐 右參贊(우참찬:의정부의 정2품 문관 벼슬)에 이르렀다.
성격이 강직하고 所信(소신)이 굳었던 그는 일찌기 明宗(명종) 때 권신 尹元衡(윤원형)에게 마음을
사서 파직당한 일도 있었으며, 大司憲(대사헌)으로 있을 때 朝廷(조정)의 권신들을 거리낌없이
탄핵했고 內外政勢(내외정세)를 밝혀 軍備(군비)의 강화(强化)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門下(문하)에서 成渾(성혼)·辛應時(신응시) 등 훌륭한 學者(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死後(사후)
淸白吏(청백리:청렴 결백한 벼슬아치)에 錄選(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惟咸(유함)도 光海君(광해군) 때 直提學(직제학:집현전의 종3품, 예문관·홍문관의 정3품
벼슬)을 지냈으며, 明軍(명군)의 軍糧調達(군량조달) 임무를 맡기도 했으나 大北派(대북파)의 탄핵을
받았다.
한편 仁傑(인걸)의 형 仁豪(인호)와 사촌 仁英(인영)·仁雄(인웅) 등이 모두 文章(문장)에 뛰어나
「四白文章(사백문장)」으로 불리워졌으며, 이들 兄弟(형제)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水原 白氏(
수원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외 宣祖(선조) 때 詩人(시인)으로서 文筆(문필)로 일세를 풍미한 光勳(광훈)과 詩客(시객)으로
명성을 떨친 振南(진남), 「關西別曲(관서별곡)」으로 國文學史(국문학사)를 빛낸 광홍(光弘) 등이
뛰어났다.
憲宗(헌종) 때 兵曹 參判(병조참판) 弘洙(홍수)와 高宗(고종) 때 西洋文物(서양문물)의 선구자인
春培(춘배)는 獨立運動(독립운동)으로 이름을 떨친 貞基(정기)·龍城(용성)·一圭(일규)·寬洙(관수)·
南採(남채)·南俊(남준)·日鎭(일진) 등과 함께 韓末(한말)에 와서 家門(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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