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몇 세손(世孫)입니까? 김억 대부님 안녕 하시지요?(대부님 내신 내고향 사촌 내용 일부입니다)
페이지 정보
김정중 작성일03-04-03 20:55 조회1,886회 댓글0건본문
<입향후대소등과(入鄕後大小登科) 및 문학저세자략록(文學著世者略錄)>
■ 김 자 첨(金子瞻) : 1369년 ~ 1454년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5세손(世孫)으로 사촌(沙村)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입향조(入鄕祖)이시다. 조정(朝庭)에서는 전조명신(前朝名臣) 후손(後孫)의 예우로 감목관(監牧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손(後孫)의 세거(世居) 기업(基業)을 정리하고 86세(歲)의 향수(享壽)를 누렸다.
■김 효 온(金孝溫) : 1412년 ~ ?
자첨(子瞻)의 아들이며 1434년 세종(世宗) 갑인(甲寅)에 생원(生員)을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직(司直)의 벼슬을 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문과(文科) 동방(同榜)인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과 친교(親交)가 있었다.
■김 극 해(金克諧) : 1440년 ~ ?
효온(孝溫)의 아들이며 1459년 세조(世祖) 기묘(己卯)에 생원(生員)이 되고 문과(文科)에 올라 북평사(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역임했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김 광 수(金光粹) : 1468년 ~ 1563년
극해(克諧)의 아들이며 호(號)가 송은(松隱)이다. 1501년 연산(燕山) 신유(辛酉)에 진사(進士)가 되고 태학(太學)에서 연수중(硏修中) 연산정란을 예견하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남산록(南山麓) 소담상(小潭上)에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청빈하게 생애를 보냈다. 사후(死後)에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송은집(松隱集)과 경심잠(警心箴)이 세상에 전한다. 한편 임란(壬亂)에 출상입상(出將入相)으로 산하(山河) 재조(再造)의 위업(偉業)을 남긴 유성룡(柳成龍)은 외손(外孫)이며 증손(曾孫)인 사원(士元), 사형(士亨), 사정(士貞)도 각각 창의하여 국란에 유공하고 외증손(外曾孫) 김치중(金致中)은 의병장(義兵將)으로 순절(殉節)했다. 영귀정(詠歸亭)은 문화재(文化財) 234호로 지정(指定)되었다.
■ 김 사 원(金士元) : 1539년 ~ 1601년
광수(光粹)의 증손(曾孫)으로 호(號)가 만취당(晩翠堂)이다.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월란정사(月瀾精舍)에서 수업(修業)하였으며 덕량(德量)이 심후(深厚)했다. 임란(壬亂)에 창의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었으며 난후(亂後)에는 기민(飢民)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알려졌다. 사후(死後)에 후산정사(後山精舍)에 제향(祭享)하였으며 실기(實記)가 전(傳)한다.
■ 김 사 형(金士亨) : 1541년 ~ ?
호(號)는 독수헌(獨秀軒)이며 사원(士元)의 동생이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인(門人)이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임란(壬亂)에는 동생 사정(士貞)과 더불어 창의하여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협찬하고 유공하였다. 창의록(倡義錄)에 실려있다.
■ 김 사 정(金士貞) : 1578년 ~ 1641년
호(號)가 후송재(後松齋)로 사원(士元)의 동생이다. 어려서 재예(才藝)와 총명이 있었으나 연미급(年未及)으로 계문(溪門)에 나아가지 못하고 사숙(私淑)하였다. 중형(仲兄)인 사형(士亨)과 함께 곽재우(郭再祐) 의진(義陣)에서 공을 세웠다. 사후(死後)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추증(追贈)되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되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 김 회(金 淮) : 1578년 ~ 1641년
사정(士貞)의 아들이며 호(號)는 경암(敬菴)이다. 26세(歲)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612년 광해 임자(光海 壬子)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했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만년(晩年)에는 향리에서 수덕(修德)하고 문집(文集)이 있다.
■ 김 상 원(金尙瑗) : 1598년 ~ 1687년
사원(士元)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남애(南厓)이다.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의 문인(門人)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독실이 받아들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을 한스러워하며 대명통기(大明統紀)를 숭상하니 세인(世人)들은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다.
■ 김 상 기(金尙琦) : 1602년 ~ 1670년
상원(尙瑗)의 동생이고 호(號)는 사오(沙塢)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으며 문학행의(文學行誼)와 시문(詩文)에 능하여 영하(嶺下) 사우(士友)와 교유(交遊)하며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상 유(金尙瑜) : 1605년 ~ 1678년
호(號)는 옥계(玉溪)이고 회(淮)의 아들이다.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과장(科場)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계도하였고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다.
■ 김 상 인(金尙璘) : 1616년 ~ 1675년
사원(士元)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양진당(養眞堂)이다. 숭선효우(崇先孝友)로 이름이 높았다. 만년(晩年)에는 양진당(養眞堂)을 세우고 학문(學問)을 연수(硏修)했다. 경술(庚戌) 신해(辛亥)의 팔도기근시(八道飢饉時)에는 영남(嶺南) 소수(疏首)로 추대(推戴)되었으며 사복사정(司僕寺正)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 김 양 좌(金良佐) : 1636년 ~ 1708년
상인(尙璘)의 아들이고 호(號)는 사주(沙洲)이다. 1681년 숙종(肅宗) 신유(辛酉)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 등과 교유(交遊)가 깊었으며 문집(文集) 4권이 있다.
■ 김 성 좌(金聖佐) : 1639년 ~ 1708년
양재(良佐)의 동생이고 호(號)는 송리(松里)이다. 1663년 현종(顯宗) 계묘(癸卯)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여러 고을을 역임하고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재임중(在任中)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있었으며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만년(晩年)에는 빙계계곡(氷溪溪谷)에 세심정(洗心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 김 이 달(金履達) : 1656년 ~ 1736년
상기(尙琦)의 손자(孫子)이며 호(號)는 덕은(德隱)이다. 1696년 숙종(肅宗) 병자(丙子)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이 중(金履中) : 1657년 ~ 1731년
상유(尙瑜)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북오(北塢)이다. 1693년 숙종(肅宗) 계유(癸酉)에 무과(武科)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무신(戊申)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동(活動)하였다.
■ 김 이 규(金履規) : 1658년 ~ 1732년
자(字)는 자범(子範)이며 양재(良佐)의 아들이다. 1689년 숙종(肅宗) 기사(己巳)에 진사(進士)가 되고 문사(文詞)가 뛰어났다.
■ 김 이 구(金履矩) : 1662년 ~ 1722년
양좌(良佐)의 아들이며 호(號)는 정락재(靜樂齋)이다. 일찍이 학문(學問)과 시례(詩禮)에 밝아 향당에 알려졌다. 유집(遺集)이 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빙청옥결(氷淸玉潔)이라고 칭찬하였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 김 도 응(金道應) : 1685년 ~ ?
사원(士元)의 5세손(世孫)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역임하였다.
■ 김 성(金 聲) : 1686년 ~ 1760년
상유(尙瑜)의 증손(曾孫)이고 호(號)는 성고(省皐)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초휘(初諱)는 성응(聲應)이였으며 강경시(講經時) 어명(御命)으로 개명(改名)하여 성(聲)이 되었다.
■ 김 오 응(金五應) : 1699년 ~ 1749년
회(淮)의 현손(玄孫)이며 호(號)는 구은(龜隱)이다.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사(文詞)와 필법(筆法)이 뛰어났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고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치적(治績)을 남겼다. 무신란(戊申亂)으로 영남(嶺南) 피무(被誣) 당시 재위(再爲) 소수(疏首)로서 전(全) 영남(嶺南)이 신원(伸輔)하였다.
■ 김 추 응(金秋應) : 1700년 ~ 1788년
상원(尙瑗)의 증손(曾孫)이다. 1717년 숙종(肅宗) 정유(丁酉)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재 응(金載應) : 1704년 ~ 1758년
상인(尙璘)의 증손(曾孫)이고 호(號)는 소암(素巖)이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에게 배우고 경사(經史)에 밝으며 문장(文章)이 온아(溫雅)하였다. 유집(遺集)과 사례집사(四禮集辭)가 있다.
■ 김 성 응(金誠應) : 생몰미상
사원(士元)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서파(西坡)이다. 족종(族從) 종덕(宗德)에게 배우고 생원시(生員試)에 입방(入榜)하였다.
■ 김 종 덕(金宗德) : 1724년 ~ 1797년
상인(尙璘)의 현손(玄孫)이며 호(號)는 천사(川沙)이다. 일찍이 가학(家學)을 익히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배웠다. 1753년 영조(英祖) 계유(癸酉)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779년에는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경사(經史)와 이학(理學)을 궁구(窮究)하여 문하(門下)에 많은 제자(弟子)를 배출(輩出)하였으며 퇴계(退溪學統)의 맥(脈)을 이었다. 저서(著書)로는 문집(文集) 10책(冊)과 성학정로(聖學正路), 성학입문(聖學入門), 공문일통(孔門一統), 석학정적(釋學正賊), 정본(政本), 고증(考證), 초려문답(草廬問答), 부록(附錄)을 남겼으며 동몽교재(童蒙敎材)인 입본(立本)도 있다. 1992년에는 계명한문학연구회(啓明漢文學硏究會)에서 연구자료(硏究資料) 총서 3집(輯)으로 전집(全集)이 간행(刊行)되었다.
■ 김 종 필(金宗泌) : 1730년 ~ 1789년
오응(五應)의 아들이고 호(號)는 반농(半聾)이다. 성도(性度)가 청아(淸雅)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 김 종 경(金宗敬) : 1732년 ~ 1785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구재(苟齋)이다. 재예(才藝)와 총명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이상정(李象靖)의 제자(弟子)가 되었다. 1774년 영조(英祖) 갑오(甲午)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고 스승의 지시로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의 찬술에 힘썼으며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종 구(金宗九) : 1732년 ~ 1778년
상기(尙琦)의 현손(玄孫)이고 호(號)는 운암(云菴)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文人)으로 간담청아(簡談淸雅)하였으며 정조조(正祖朝)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이 되었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종 헌(金宗憲) : 1735년 ~ 1805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역포(歟圃)이다. 1795년 정조(正祖) 을묘(乙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경학(經學)이 높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종 신(金宗臣) : 1733년 ~ 1813년
종덕(宗德)의 종제(從弟)이고 호(號)는 경재(絅齋)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정조조(正祖朝)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유고(遺稿)가 있다.
■ 김 종 국(金宗國) : 1739년 ~ 1801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경보(景輔)이다. 1768년 영조(英祖) 무자(戊子)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종 발(金宗發) : 1740년 ~ 1812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용연(容淵)이다. 1777년 정조(正祖) 정유(丁酉)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했다. 문집(文集) 4권(卷)과 유가요람(儒家要覽), 예서(禮書) 등(等)이 세상(世上)에 전(傳)한다.
■ 김 종 섭(金宗燮) : 1743년 ~ 1791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제암(濟菴)이다. 어릴적부터 총명이 뛰어났으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다. 1768년 영조(英祖) 무자(戊子)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학행(學行)이 높았으며 문집(文集) 4권(卷)이 있다.
■ 김 종 식(金宗軾) : 1745년 ~ 1816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며 호(號)는 가은(稼隱)이다. 1777년 정조(正祖) 정유(丁酉)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학문이 깊고 사우간(士友間)에 중망이 있었다.
■ 김 종 준(金宗駿) : 1747년 ~ 1821년
종덕(宗德)의 종제이고 호(號)는 근곡(芹谷)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다. 1789년 정조(正祖) 기유(己酉)에 생원(生員)이 되고 필법(筆法)이 능(能)했으며 유고(遺稿) 2권(卷)이 있다.
■ 김 형 진(金馨進) : 1741년 ~ 1807년
사정(士貞)의 8세손(世孫)이고 호(號)는 괴음당(槐陰堂)이다. 족대부(族大父) 재응(載應)에게 배우고 경학(經學)이 깊었다. 중용도(中庸圖)와 강목감작편(綱目感作篇)이 있으며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 김 양 직(金養直) : 1742년 ~ 1774년
사원(士元)의 8세손(世孫)이고 자(字)는 덕여(德汝)이다. 1771년 영조(英祖) 신묘(辛卯)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청 진(金淸進) : 1757년 ~ 1837년
사원(士元)의 7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칠송(七松)이다. 족숙(族叔) 종덕(宗德)에게 배우고 경학(經學)이 높았다. 1801년 순조(純祖) 신유(辛酉)에 생원(生員)이 되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경 진(金景進) : 1767년 ~ ?
회(淮)의 7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절계(折桂)이다. 1809년 순조(純祖) 기사(己巳)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성 진(金誠進) : 1768년 ~ 1837년
상기(尙琦)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서오(西塢)이다. 1814년 순조(純祖) 갑술(甲戌)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족부(族父) 종덕(宗德)을 사사(師事)하였으며 독학역행(篤學力行)으로 사우간(士友間)에 중망이 있었다.
■ 김 양 휴(金養休) : 1777년 ~ 1854년
양좌(良佐)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율원(栗園)이다. 일찍이 족대부(族大父) 종덕(宗德)과 외왕고(外王考) 이종수(李宗洙)를 사사(師事)하고 만년(晩年)에는 남한조(南漢朝)에게 배워 학문(學問)이 높았다.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양 경(金養絅) : 1784년 ~ 1838년
양좌(良佐)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미언(美彦)이다. 1831년 순조(純祖) 신묘(辛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 김 양 정(金養楨) : 1785년 ~ 1847년
회(淮)의 7세손(世孫)이며 호(號)는 정암(定菴)이다. 1834년 순조(純祖) 갑오(甲午)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일찍이 정종로(鄭宗魯)를 사사(師事)하여 학문(學問)이 고명(高明)하고 후진(後進)을 지도했다. 문집(文集) 8권(卷)이 있다.
■ 김 양 식(金養植) : 1791년 ~ 1862년
양정(養楨)의 동생이고 호(號)는 지암(止菴)이다. 1831년 순조(純祖) 신묘(辛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형(兄) 양정(養楨)과 더불어 독지호학(篤志好學)하고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 김 양 징(金養徵) : 1794년 ~ 1856년
종섭(宗燮)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백암(栢菴)이다. 1849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자성이 명민하고 시집(詩集)이 있다.
■ 김 양 인(金養麟) : 1796년 ~ 1870년
종경(宗敬)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죽하(竹下)이다. 1835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고 경사(經史)에 박습하고 시집(詩集)이 있다.
■ 김 희 유(金羲裕) : 1800년 ~ 1854년
사원(士元)의 9세손(世孫)이며 호(號)는 사촌(思村)이다. 1836년 순조(純祖) 병신(丙申)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정언(正言)이 되었다. 문장(文章)과 덕망(德望)이 있었다.
■ 김 양 범(金養範) : 1802년 ~ 1879년
종발(宗發)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만동(晩同)이다. 1844년 헌종(憲宗) 갑진(甲辰)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合格)했다. 왕고(王考)의 심법(心法)을 전수받아 독행호학(篤行好學)하였다. 만동서숙(晩同書塾)을 지어 문생(門生)을 기르고 유고(遺稿)가 있다.
■ 김 석 유(金奭裕) : 1805년 ~ 1868년
희유(羲裕)의 동생이고 호(號)는 기산(奇山)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사사(師事)하여 경학(經學)이 높고 사우(士友)의 추중(推重)이 있었다.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기 선(金驥善) : 1806년 ~ 1883년
양식(養植)의 아들이고 호(號)는 기서(沂墅)이다. 1835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유집(遺集) 2권(卷)이 있다.
■ 김 노 선(金魯善) : 1811년 ~ 1886년
양정(養楨)의 아들이고 호(號)는 기계(奇溪)이다. 1865년 철종(哲宗) 을축(乙丑)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사사(師事)하여 학행(學行)이 높았고 도천(道薦)의 물망이 있었다. 유집(遺集) 10권(卷)이 있다.
■ 김 수 익(金壽翼) : 1815년 ~ 1872년
사원(士元)의 9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운고(雲皐)이다. 1852년 철종(哲宗) 임자(壬子)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탁락대절(卓落大節)의 높은 기개가 있었다.
■ 김 상 종(金象鍾) : 1848년 ~ 1908년
수익(壽翼)의 아들이고 호(號)는 운산(云山)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배웠다. 문장(文章)이 웅휘(雄輝)하고 행금이 독실했다. 1896년 고종(高宗) 병신(丙申)에는 의성(義城)의 의병대장(義兵大將)에 추대(推戴)되어 구성산(九成山) 전투(戰鬪)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으나 봉산(鳳山) 전투에서 참패하고 파병조칙(破兵詔勅)에 의해 전진(戰陣)을 해산(解散)했다. 연방집(聯芳集)이 있으며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회 종(金會鍾) : 1852년 ~ 1916년
수익(壽翼)의 아들이고 호(號)는 소운(小雲)이다. 숙조 기산공 석유(叔祖 奇山公, 奭裕)의 문하에서 배우고 병신년(丙申年)에 중씨(仲氏) 운산공(云山公)을 따라 아들 호직(浩直)과 함께 백의 종군(白衣 從軍)하여 의병(義兵)의 작전(作戰) 및 보급 등을 도운 공로로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敍)받았다.
저서(著書)에는 사례간요(四禮簡要), 성조기휘 3권(聖朝紀彙 三卷), 소추유림(據臭類林) 등이 있으며 유고집이 있다.
■ 김 수 욱(金壽旭) : 1852년 ~ 1902년
종덕(宗德)의 현손(玄孫)이고 호(號)는 좌산(左山)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하(門下)에서 배우고 문학(文學)과 시례(詩禮)에 밝아 몸소 실천했다. 병신(丙申)에는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소모장(召募將)이 되고 전쟁에 참여했다.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수 담(金壽聃) : 1852년 ~ 1896년
양징(養渟)의 손자(孫子)이고 자(字)는 근수(謹璟)이다. 강인한 성품(性品)에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선봉장(先鋒將)이 되고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 29일 봉산(鳳山)전투에서 순국(殉國)했다.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수 협(金壽莢) : 1853년 ~ 1896년
상원(尙瑗)의 8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영수(英璟)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丙申에 창의(倡義)하여 관향장(管餉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 29일 봉산(鳳山) 전투에서 김수담(金壽聃)과 함께 순국(殉國)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을 추서(追敍)받았다.
■ 김 상 호(金相鎬) : 1865년 ~ ?
양좌(養佐)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우창(遇昌)이다. 1894년 고종(高宗) 갑오(甲午)에 진사가 되었다.
■ 김 시 호(金時鎬) : 1876년 ~ 1916년
종발(宗發)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죽헌(竹軒)이다. 한말(韓末)에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 김 호 직(金浩直) : 1876년 ~ 1916년
세종(世鍾)의 아들이고 호(號)는 우강(雨岡)이다. 1894년 고종(高宗) 갑오(甲午)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에게 배우고 경사(經史)에 독실(篤實)했다. 외화(外華)가 준수(俊秀)하고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문집(文集) 4권(卷)과 속집(續集), 동천자(東千字), 한양가(漢陽歌) 등의 저서(著書)가 있으며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敍)받았다.
▣ 김윤만 -
▣ 김주회 - 도평의공파 주요 선조님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한분한분 기억해 두겠습니다.
■ 김 자 첨(金子瞻) : 1369년 ~ 1454년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5세손(世孫)으로 사촌(沙村)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입향조(入鄕祖)이시다. 조정(朝庭)에서는 전조명신(前朝名臣) 후손(後孫)의 예우로 감목관(監牧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손(後孫)의 세거(世居) 기업(基業)을 정리하고 86세(歲)의 향수(享壽)를 누렸다.
■김 효 온(金孝溫) : 1412년 ~ ?
자첨(子瞻)의 아들이며 1434년 세종(世宗) 갑인(甲寅)에 생원(生員)을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직(司直)의 벼슬을 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문과(文科) 동방(同榜)인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과 친교(親交)가 있었다.
■김 극 해(金克諧) : 1440년 ~ ?
효온(孝溫)의 아들이며 1459년 세조(世祖) 기묘(己卯)에 생원(生員)이 되고 문과(文科)에 올라 북평사(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역임했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김 광 수(金光粹) : 1468년 ~ 1563년
극해(克諧)의 아들이며 호(號)가 송은(松隱)이다. 1501년 연산(燕山) 신유(辛酉)에 진사(進士)가 되고 태학(太學)에서 연수중(硏修中) 연산정란을 예견하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남산록(南山麓) 소담상(小潭上)에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청빈하게 생애를 보냈다. 사후(死後)에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송은집(松隱集)과 경심잠(警心箴)이 세상에 전한다. 한편 임란(壬亂)에 출상입상(出將入相)으로 산하(山河) 재조(再造)의 위업(偉業)을 남긴 유성룡(柳成龍)은 외손(外孫)이며 증손(曾孫)인 사원(士元), 사형(士亨), 사정(士貞)도 각각 창의하여 국란에 유공하고 외증손(外曾孫) 김치중(金致中)은 의병장(義兵將)으로 순절(殉節)했다. 영귀정(詠歸亭)은 문화재(文化財) 234호로 지정(指定)되었다.
■ 김 사 원(金士元) : 1539년 ~ 1601년
광수(光粹)의 증손(曾孫)으로 호(號)가 만취당(晩翠堂)이다.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월란정사(月瀾精舍)에서 수업(修業)하였으며 덕량(德量)이 심후(深厚)했다. 임란(壬亂)에 창의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었으며 난후(亂後)에는 기민(飢民)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알려졌다. 사후(死後)에 후산정사(後山精舍)에 제향(祭享)하였으며 실기(實記)가 전(傳)한다.
■ 김 사 형(金士亨) : 1541년 ~ ?
호(號)는 독수헌(獨秀軒)이며 사원(士元)의 동생이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인(門人)이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임란(壬亂)에는 동생 사정(士貞)과 더불어 창의하여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협찬하고 유공하였다. 창의록(倡義錄)에 실려있다.
■ 김 사 정(金士貞) : 1578년 ~ 1641년
호(號)가 후송재(後松齋)로 사원(士元)의 동생이다. 어려서 재예(才藝)와 총명이 있었으나 연미급(年未及)으로 계문(溪門)에 나아가지 못하고 사숙(私淑)하였다. 중형(仲兄)인 사형(士亨)과 함께 곽재우(郭再祐) 의진(義陣)에서 공을 세웠다. 사후(死後)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추증(追贈)되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되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 김 회(金 淮) : 1578년 ~ 1641년
사정(士貞)의 아들이며 호(號)는 경암(敬菴)이다. 26세(歲)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612년 광해 임자(光海 壬子)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했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만년(晩年)에는 향리에서 수덕(修德)하고 문집(文集)이 있다.
■ 김 상 원(金尙瑗) : 1598년 ~ 1687년
사원(士元)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남애(南厓)이다.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의 문인(門人)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독실이 받아들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을 한스러워하며 대명통기(大明統紀)를 숭상하니 세인(世人)들은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다.
■ 김 상 기(金尙琦) : 1602년 ~ 1670년
상원(尙瑗)의 동생이고 호(號)는 사오(沙塢)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으며 문학행의(文學行誼)와 시문(詩文)에 능하여 영하(嶺下) 사우(士友)와 교유(交遊)하며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상 유(金尙瑜) : 1605년 ~ 1678년
호(號)는 옥계(玉溪)이고 회(淮)의 아들이다.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과장(科場)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계도하였고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다.
■ 김 상 인(金尙璘) : 1616년 ~ 1675년
사원(士元)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양진당(養眞堂)이다. 숭선효우(崇先孝友)로 이름이 높았다. 만년(晩年)에는 양진당(養眞堂)을 세우고 학문(學問)을 연수(硏修)했다. 경술(庚戌) 신해(辛亥)의 팔도기근시(八道飢饉時)에는 영남(嶺南) 소수(疏首)로 추대(推戴)되었으며 사복사정(司僕寺正)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 김 양 좌(金良佐) : 1636년 ~ 1708년
상인(尙璘)의 아들이고 호(號)는 사주(沙洲)이다. 1681년 숙종(肅宗) 신유(辛酉)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 등과 교유(交遊)가 깊었으며 문집(文集) 4권이 있다.
■ 김 성 좌(金聖佐) : 1639년 ~ 1708년
양재(良佐)의 동생이고 호(號)는 송리(松里)이다. 1663년 현종(顯宗) 계묘(癸卯)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여러 고을을 역임하고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재임중(在任中)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있었으며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만년(晩年)에는 빙계계곡(氷溪溪谷)에 세심정(洗心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 김 이 달(金履達) : 1656년 ~ 1736년
상기(尙琦)의 손자(孫子)이며 호(號)는 덕은(德隱)이다. 1696년 숙종(肅宗) 병자(丙子)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이 중(金履中) : 1657년 ~ 1731년
상유(尙瑜)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북오(北塢)이다. 1693년 숙종(肅宗) 계유(癸酉)에 무과(武科)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무신(戊申)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동(活動)하였다.
■ 김 이 규(金履規) : 1658년 ~ 1732년
자(字)는 자범(子範)이며 양재(良佐)의 아들이다. 1689년 숙종(肅宗) 기사(己巳)에 진사(進士)가 되고 문사(文詞)가 뛰어났다.
■ 김 이 구(金履矩) : 1662년 ~ 1722년
양좌(良佐)의 아들이며 호(號)는 정락재(靜樂齋)이다. 일찍이 학문(學問)과 시례(詩禮)에 밝아 향당에 알려졌다. 유집(遺集)이 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빙청옥결(氷淸玉潔)이라고 칭찬하였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 김 도 응(金道應) : 1685년 ~ ?
사원(士元)의 5세손(世孫)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역임하였다.
■ 김 성(金 聲) : 1686년 ~ 1760년
상유(尙瑜)의 증손(曾孫)이고 호(號)는 성고(省皐)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초휘(初諱)는 성응(聲應)이였으며 강경시(講經時) 어명(御命)으로 개명(改名)하여 성(聲)이 되었다.
■ 김 오 응(金五應) : 1699년 ~ 1749년
회(淮)의 현손(玄孫)이며 호(號)는 구은(龜隱)이다.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사(文詞)와 필법(筆法)이 뛰어났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고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치적(治績)을 남겼다. 무신란(戊申亂)으로 영남(嶺南) 피무(被誣) 당시 재위(再爲) 소수(疏首)로서 전(全) 영남(嶺南)이 신원(伸輔)하였다.
■ 김 추 응(金秋應) : 1700년 ~ 1788년
상원(尙瑗)의 증손(曾孫)이다. 1717년 숙종(肅宗) 정유(丁酉)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재 응(金載應) : 1704년 ~ 1758년
상인(尙璘)의 증손(曾孫)이고 호(號)는 소암(素巖)이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에게 배우고 경사(經史)에 밝으며 문장(文章)이 온아(溫雅)하였다. 유집(遺集)과 사례집사(四禮集辭)가 있다.
■ 김 성 응(金誠應) : 생몰미상
사원(士元)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서파(西坡)이다. 족종(族從) 종덕(宗德)에게 배우고 생원시(生員試)에 입방(入榜)하였다.
■ 김 종 덕(金宗德) : 1724년 ~ 1797년
상인(尙璘)의 현손(玄孫)이며 호(號)는 천사(川沙)이다. 일찍이 가학(家學)을 익히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배웠다. 1753년 영조(英祖) 계유(癸酉)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779년에는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경사(經史)와 이학(理學)을 궁구(窮究)하여 문하(門下)에 많은 제자(弟子)를 배출(輩出)하였으며 퇴계(退溪學統)의 맥(脈)을 이었다. 저서(著書)로는 문집(文集) 10책(冊)과 성학정로(聖學正路), 성학입문(聖學入門), 공문일통(孔門一統), 석학정적(釋學正賊), 정본(政本), 고증(考證), 초려문답(草廬問答), 부록(附錄)을 남겼으며 동몽교재(童蒙敎材)인 입본(立本)도 있다. 1992년에는 계명한문학연구회(啓明漢文學硏究會)에서 연구자료(硏究資料) 총서 3집(輯)으로 전집(全集)이 간행(刊行)되었다.
■ 김 종 필(金宗泌) : 1730년 ~ 1789년
오응(五應)의 아들이고 호(號)는 반농(半聾)이다. 성도(性度)가 청아(淸雅)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 김 종 경(金宗敬) : 1732년 ~ 1785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구재(苟齋)이다. 재예(才藝)와 총명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이상정(李象靖)의 제자(弟子)가 되었다. 1774년 영조(英祖) 갑오(甲午)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고 스승의 지시로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의 찬술에 힘썼으며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종 구(金宗九) : 1732년 ~ 1778년
상기(尙琦)의 현손(玄孫)이고 호(號)는 운암(云菴)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文人)으로 간담청아(簡談淸雅)하였으며 정조조(正祖朝)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이 되었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종 헌(金宗憲) : 1735년 ~ 1805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역포(歟圃)이다. 1795년 정조(正祖) 을묘(乙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경학(經學)이 높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종 신(金宗臣) : 1733년 ~ 1813년
종덕(宗德)의 종제(從弟)이고 호(號)는 경재(絅齋)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정조조(正祖朝)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유고(遺稿)가 있다.
■ 김 종 국(金宗國) : 1739년 ~ 1801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경보(景輔)이다. 1768년 영조(英祖) 무자(戊子)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종 발(金宗發) : 1740년 ~ 1812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용연(容淵)이다. 1777년 정조(正祖) 정유(丁酉)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했다. 문집(文集) 4권(卷)과 유가요람(儒家要覽), 예서(禮書) 등(等)이 세상(世上)에 전(傳)한다.
■ 김 종 섭(金宗燮) : 1743년 ~ 1791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제암(濟菴)이다. 어릴적부터 총명이 뛰어났으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다. 1768년 영조(英祖) 무자(戊子)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학행(學行)이 높았으며 문집(文集) 4권(卷)이 있다.
■ 김 종 식(金宗軾) : 1745년 ~ 1816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며 호(號)는 가은(稼隱)이다. 1777년 정조(正祖) 정유(丁酉)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학문이 깊고 사우간(士友間)에 중망이 있었다.
■ 김 종 준(金宗駿) : 1747년 ~ 1821년
종덕(宗德)의 종제이고 호(號)는 근곡(芹谷)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다. 1789년 정조(正祖) 기유(己酉)에 생원(生員)이 되고 필법(筆法)이 능(能)했으며 유고(遺稿) 2권(卷)이 있다.
■ 김 형 진(金馨進) : 1741년 ~ 1807년
사정(士貞)의 8세손(世孫)이고 호(號)는 괴음당(槐陰堂)이다. 족대부(族大父) 재응(載應)에게 배우고 경학(經學)이 깊었다. 중용도(中庸圖)와 강목감작편(綱目感作篇)이 있으며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 김 양 직(金養直) : 1742년 ~ 1774년
사원(士元)의 8세손(世孫)이고 자(字)는 덕여(德汝)이다. 1771년 영조(英祖) 신묘(辛卯)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청 진(金淸進) : 1757년 ~ 1837년
사원(士元)의 7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칠송(七松)이다. 족숙(族叔) 종덕(宗德)에게 배우고 경학(經學)이 높았다. 1801년 순조(純祖) 신유(辛酉)에 생원(生員)이 되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경 진(金景進) : 1767년 ~ ?
회(淮)의 7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절계(折桂)이다. 1809년 순조(純祖) 기사(己巳)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성 진(金誠進) : 1768년 ~ 1837년
상기(尙琦)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서오(西塢)이다. 1814년 순조(純祖) 갑술(甲戌)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족부(族父) 종덕(宗德)을 사사(師事)하였으며 독학역행(篤學力行)으로 사우간(士友間)에 중망이 있었다.
■ 김 양 휴(金養休) : 1777년 ~ 1854년
양좌(良佐)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율원(栗園)이다. 일찍이 족대부(族大父) 종덕(宗德)과 외왕고(外王考) 이종수(李宗洙)를 사사(師事)하고 만년(晩年)에는 남한조(南漢朝)에게 배워 학문(學問)이 높았다.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양 경(金養絅) : 1784년 ~ 1838년
양좌(良佐)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미언(美彦)이다. 1831년 순조(純祖) 신묘(辛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 김 양 정(金養楨) : 1785년 ~ 1847년
회(淮)의 7세손(世孫)이며 호(號)는 정암(定菴)이다. 1834년 순조(純祖) 갑오(甲午)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일찍이 정종로(鄭宗魯)를 사사(師事)하여 학문(學問)이 고명(高明)하고 후진(後進)을 지도했다. 문집(文集) 8권(卷)이 있다.
■ 김 양 식(金養植) : 1791년 ~ 1862년
양정(養楨)의 동생이고 호(號)는 지암(止菴)이다. 1831년 순조(純祖) 신묘(辛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형(兄) 양정(養楨)과 더불어 독지호학(篤志好學)하고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 김 양 징(金養徵) : 1794년 ~ 1856년
종섭(宗燮)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백암(栢菴)이다. 1849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자성이 명민하고 시집(詩集)이 있다.
■ 김 양 인(金養麟) : 1796년 ~ 1870년
종경(宗敬)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죽하(竹下)이다. 1835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고 경사(經史)에 박습하고 시집(詩集)이 있다.
■ 김 희 유(金羲裕) : 1800년 ~ 1854년
사원(士元)의 9세손(世孫)이며 호(號)는 사촌(思村)이다. 1836년 순조(純祖) 병신(丙申)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정언(正言)이 되었다. 문장(文章)과 덕망(德望)이 있었다.
■ 김 양 범(金養範) : 1802년 ~ 1879년
종발(宗發)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만동(晩同)이다. 1844년 헌종(憲宗) 갑진(甲辰)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合格)했다. 왕고(王考)의 심법(心法)을 전수받아 독행호학(篤行好學)하였다. 만동서숙(晩同書塾)을 지어 문생(門生)을 기르고 유고(遺稿)가 있다.
■ 김 석 유(金奭裕) : 1805년 ~ 1868년
희유(羲裕)의 동생이고 호(號)는 기산(奇山)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사사(師事)하여 경학(經學)이 높고 사우(士友)의 추중(推重)이 있었다.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기 선(金驥善) : 1806년 ~ 1883년
양식(養植)의 아들이고 호(號)는 기서(沂墅)이다. 1835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유집(遺集) 2권(卷)이 있다.
■ 김 노 선(金魯善) : 1811년 ~ 1886년
양정(養楨)의 아들이고 호(號)는 기계(奇溪)이다. 1865년 철종(哲宗) 을축(乙丑)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사사(師事)하여 학행(學行)이 높았고 도천(道薦)의 물망이 있었다. 유집(遺集) 10권(卷)이 있다.
■ 김 수 익(金壽翼) : 1815년 ~ 1872년
사원(士元)의 9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운고(雲皐)이다. 1852년 철종(哲宗) 임자(壬子)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탁락대절(卓落大節)의 높은 기개가 있었다.
■ 김 상 종(金象鍾) : 1848년 ~ 1908년
수익(壽翼)의 아들이고 호(號)는 운산(云山)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배웠다. 문장(文章)이 웅휘(雄輝)하고 행금이 독실했다. 1896년 고종(高宗) 병신(丙申)에는 의성(義城)의 의병대장(義兵大將)에 추대(推戴)되어 구성산(九成山) 전투(戰鬪)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으나 봉산(鳳山) 전투에서 참패하고 파병조칙(破兵詔勅)에 의해 전진(戰陣)을 해산(解散)했다. 연방집(聯芳集)이 있으며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회 종(金會鍾) : 1852년 ~ 1916년
수익(壽翼)의 아들이고 호(號)는 소운(小雲)이다. 숙조 기산공 석유(叔祖 奇山公, 奭裕)의 문하에서 배우고 병신년(丙申年)에 중씨(仲氏) 운산공(云山公)을 따라 아들 호직(浩直)과 함께 백의 종군(白衣 從軍)하여 의병(義兵)의 작전(作戰) 및 보급 등을 도운 공로로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敍)받았다.
저서(著書)에는 사례간요(四禮簡要), 성조기휘 3권(聖朝紀彙 三卷), 소추유림(據臭類林) 등이 있으며 유고집이 있다.
■ 김 수 욱(金壽旭) : 1852년 ~ 1902년
종덕(宗德)의 현손(玄孫)이고 호(號)는 좌산(左山)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하(門下)에서 배우고 문학(文學)과 시례(詩禮)에 밝아 몸소 실천했다. 병신(丙申)에는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소모장(召募將)이 되고 전쟁에 참여했다.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수 담(金壽聃) : 1852년 ~ 1896년
양징(養渟)의 손자(孫子)이고 자(字)는 근수(謹璟)이다. 강인한 성품(性品)에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선봉장(先鋒將)이 되고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 29일 봉산(鳳山)전투에서 순국(殉國)했다.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수 협(金壽莢) : 1853년 ~ 1896년
상원(尙瑗)의 8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영수(英璟)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丙申에 창의(倡義)하여 관향장(管餉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 29일 봉산(鳳山) 전투에서 김수담(金壽聃)과 함께 순국(殉國)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을 추서(追敍)받았다.
■ 김 상 호(金相鎬) : 1865년 ~ ?
양좌(養佐)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우창(遇昌)이다. 1894년 고종(高宗) 갑오(甲午)에 진사가 되었다.
■ 김 시 호(金時鎬) : 1876년 ~ 1916년
종발(宗發)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죽헌(竹軒)이다. 한말(韓末)에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 김 호 직(金浩直) : 1876년 ~ 1916년
세종(世鍾)의 아들이고 호(號)는 우강(雨岡)이다. 1894년 고종(高宗) 갑오(甲午)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에게 배우고 경사(經史)에 독실(篤實)했다. 외화(外華)가 준수(俊秀)하고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문집(文集) 4권(卷)과 속집(續集), 동천자(東千字), 한양가(漢陽歌) 등의 저서(著書)가 있으며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敍)받았다.
▣ 김윤만 -
▣ 김주회 - 도평의공파 주요 선조님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한분한분 기억해 두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