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고과서의 고려사>-삼별초편(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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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4-09 01:46 조회1,549회 댓글0건본문
<현대 교과서의 고려사>-삼별초편(4-끝)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이 용감하게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지역의 주민들까지도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와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몽고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의 결과였다.
그러나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항쟁에 앞장 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 이처럼 삼별초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고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석>
1.<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이 용감하게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지역의 주민들까지도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기록은 몽고에 대한 항몽 자세에 있어 지배층은 우유부단한 자세로, 일반 민중과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대처한 것으로 보는 2분법적 기술은 지나친 구분론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2. <이처럼 삼별초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고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기록은 삼별초가 당시 일반민중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은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3. 현행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삼별초 관련 기록은 자주의식과 적극적 항몽의식, 애국정신을 강조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려는 강한 의도 때문에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종합적이고 정확하게 기술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현재의 우리 역사책은 일정시대의 식민사관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삼별초 기록도 일정시대 친일 어용학자에 의해 왜곡된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부회 - 삼별초의 조직 배경과 목적은 참으로 민족과 정부를 지키려는 매우 훌륭한 조직 이였습니다. 그러나 몽골과 힘의 균형이 시작부터 불균형이였기 때문에 화해정책이 먹혀들고 줄것을 주고 얻을 것을 얻은 것은 정부로서는 큰 다행스런 결과 였습니다.
▣ 김부회 - 문제는 개경으로 환도함에 따라 최씨정권 배중손 등 무인세력이 몰락하고 이들의 입지가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는데 정부를 상대로 한 새로운 항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 김부회 - 강화도 까지는 아름다웠으나 정부가 결론 낸일에 반기를 들면서 삼별초 난으로 둔갑되는 아픈 과정을 겪습니다. 이들은 진도 제주도로 도피하면서 물자 조달을 위한 도둑 모략질을 잔인하게 진행했습니다. 아깝게도 이들은 반정부 활동을 자행한 깡패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들의 진압은 정부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삼별초 본래의 목적에서 크게 변질된 이들은 정부로서는 당연히 진압해야 할 일입니다.
▣ 김부회 - 진도와 제주도에서의 나동을 애국 애족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 김부회 - - 진도와 제주도에서의 난동을 애국 애족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 김부회 - 숙종이 필요에 따라 사육신을 충신으로 둔갑시킨것 처럼 박정희가 삼별초 말기 인물들 즉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깡패집단을 항쟁으로 볼력고 한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 김부회 - 역사를 필요에 따라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충렬공 할아버지가 우리의 조상이래서가 아니라 맞는것을 맞는다 하고 트리는 것을 틀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 김태형 - 깡패집단, 맞습니다, 맞고요, 몽고를 이길수도 없는 주제에 장수 몇놈 살아보려고 날뛴 미중희생의 사기극입니다. 박정희는 구테타일으키고 혹시 기댈데 없나해서 기웃거려본 웃지 못할 역사 왜곡입니다
▣ 김부회 - 민중희생
▣ 김태완 - 우리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외세의 침략을 받은것이 941회나 됩니다. 그중에서도 몽고(원나라)의 7-8차의 침략은 참으로 괴로운 전쟁이였습니다.천민에서 국왕에 이르기까지 단합된 힘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8만대장경을 만들기까지 했습니까. 오늘날의 미국과 이락크가 싸우는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 김영윤 - 수많은 인명을 잃은 이라크 전쟁을 피하지 않은 후세인 정권을 이라크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물론 직접 피해를 입지않은 사람들이나 후세에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민족정신이나 이슬람의 자존심으로 미화하여 칭송하겠지요 최후의 일인까지 옥쇄하여 나라를 지키는것은 국민된 도리이며 숭고한 의무로서 명분있는 일이지만 국민(백성)이 없는 나라의 존재가 무슨의미가 있으며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채 명분만을 외치는 지도자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지 의문입니다 이른바 항복문서를 쓰는 사람도 그것을 찢는사람도 공히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같다는것일진대 어찌 불사항전을 미화하기위해 보국애민을 가볍게 볼것인가 묻지않을수 없습니다
▣ 김윤식 - 노고가 크셨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정중 - 지식을 새롭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삼별초는 새로운 권력을 지향하며 자신들의 주인을 끊임없이 권좌에서 몰아내거나 살해하였다. 즉 김준을 추종하여 최의를 제거하였고, 임연이 김준을 죽일 때도 삼별초를 동원하였으며, 뿐만아니라 대몽항쟁을 꾀하던 임유무 마저 삼별초가 제거하였다. 이것으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란 구호는 허구인 것이다.
▣ 김윤만 - 또한 삼별초는 승화후 온은 왕으로 삼고 30여년간의 전쟁으로 힘이 달리는 고려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고려 정부의 정통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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