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崔氏) 일파의 무인정권(武人政權)이 무너지자, 강화도의 고려조정에서는 출륙문제(出陸問題), 즉 개경환도(開京還都)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원종(元宗)을 중심한 문신(文臣)들은 대개 출륙을 찬성하고, 삼별초에 속한 무신(武臣)들은 출륙은 곧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의 중신회의(重臣會議)에서 개경환도를 결의하고 환도기일을 공고하기에 이르자 삼별초의 태도는 더욱 경화(硬化)되었다. 당시 원종은 몽골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삼별초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270년(원종 11) 5월 27일 원종이 개경에 귀환했을 때 비빈(妃嬪)과 조정의 백관(百官)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왕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출륙문제는 사실상 해결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고려조정에서는 출륙환도에 불응하는 삼별초의 폐지를 결의하고 그 해 5월 29일 장군 김지저(金之底)를 강화도에 파송(派送)하여 이를 통고하는 동시에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군에게 넘겨져 자신들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여 6월 1일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지휘자인 배중손(裵仲孫)은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은 후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한편 연안 경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도내(島內)의 인심은 동요되고, 문무관 중에서 강화도를 탈출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므로, 배중손은 1,000여 척의 배에 공사(公私) 재물과 도내의 자녀들을 싣고 전라도 진도(珍島)에 들어가 그 곳을 대몽항쟁(對蒙抗爭)의 근거지로 삼았다.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한 삼별초는 한때 거제(巨濟) ·탐라(耽羅) 등의 30여 도서(島嶼)를 지배하여 하나의 해상(海上) 왕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방경(金方慶) 등이 거느린 고려의 관군과 몽골군으로 형성된 연합군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꺾였다. 이렇게 되자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탐라, 즉 지금의 제주도에 들어가 대몽항전을 계속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회유책(懷柔策)을 썼으나 삼별초가 끝까지 이에 불응하므로, 1273년(원종 14) 고려 ·몽골 연합군에 의한 탐라 공격으로 삼별초는 패망(敗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