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 - 안동대도호부
페이지 정보
김태영 작성일03-04-14 19:06 조회1,507회 댓글0건본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경상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인물: 본성은 김씨(金氏)니 신라의 대성(大姓)이다. 김창(金敞) : 처음 이름은 효공(孝恭)이다. 한림(翰林) 민성(敏成)의 아들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14세손이다. 희종 조(熙宗朝)에 급제하여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 판이부사(太師門下侍郞判吏部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효인(金孝印) : 창(敞)의 아우이다. 예자(隸字)를 잘 썼으며,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실력을 중외(中外)에 드날렸다. 벼슬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 김방경(金方慶) : 효인(孝印)의 아들이다. 예전에 방경의 어머니가 임신(妊娠)하였을 때에 꿈에 구름과 노을을 먹고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구름 기운이 아직도 나의 입과 코에 있다. 아기는 반드시 신선(神仙)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출생한 뒤에는 조금만 성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시가(市街)의 큰 길에 누어서 울었는데 소와 말이 피해 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고종 조(高宗朝)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는데 진도(珍島)ㆍ탐라(眈羅)ㆍ일본(日本)을 정벌하여 다 전공(戰功)이 있었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충직(忠直)하고 믿음직하고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자신(自身)을 근검(勤儉)하게 다루었다. 늙어서도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았으며 추위나 더위에도 병드는 일이 없었다. 비록 치사(致仕)하고 한가하게 살 때일지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자기집안 일과 같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의논이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咨問)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흔(金忻) :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에 뽑히고, 세 번 영전(榮轉)하여 장군(將軍)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탐라(耽羅)를 쳐서 승첩(勝捷)하고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또 일본 정벌(日本征伐)에 나가서 공(功)을 세워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이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승습하여 상락공(上洛公)에 봉직되었다. 김순(金恂) :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방경(方慶)이 일본을 정벌할 때 순(恂)이 몰래 배에 올라서 좇아갔으며, 돌아와 전중(殿中)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김영돈(金永旽) : 순(恂)의 아들이다. 충렬왕 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조적(曹頔)의 난리에 시종(侍從)한 공로가 있어서 일등(一等)에 책훈(策勳)되고 추성병의익찬공신(推誠秉義翊贊功臣)의 호를 내리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충목왕(忠穆王) 때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아들 진(縝)은 벼슬이 중대광(重大匡) 상락백(上洛伯)에 이르렀다. 김영후(金永煦) : 순(恂)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숙하고 침중하였으며, 친척이나 친구 중에 빈곤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구휼해 주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 나라에 붙잡혔을 때에 모든 관원들은 다 달아나 숨었으나 홀로 영후(永煦)만은 왕을 호위(護衛)하다가 창에 찔리었다. 그의 손자는 사형(士衡)ㆍ사안(士安)이다. 나이가 20세를 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째서 손자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손자들이 과연 현능(賢能)하다면 나라에서 알아서 등용할 것이며, 현능하지 않다면 비록 벼슬을 얻은들 그 벼슬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김구용(金九容) : 방경(方慶)의 증손(曾孫)이며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계속 올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힘써 후학(後學)들을 진학(進學)하게 하고 교훈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비록 휴가로 집에 있을 때라도 여러 생도들 가운데 질문(質問)하러 오는 자가 잇따랐다. 신우(辛禑) 때에 이인임(李仁任)이 북원(北元)의 사자(使者)를 맞아들이고자 하거늘 구용(九容)이 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글을 도당(都堂)에 올려 북원의 사자를 물리치려고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좇지 아니하였다. 이에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더니, 뒤에 명 나라에 가는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가다가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경사(京師)로 옮겨졌다가 대리위(大理衛)로 귀양가 그곳에서 병졸(病卒)하였다.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세상에 전한다. 김제안(金齊顔) :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공민왕 조에 급제하였다.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서 전록생(田祿生)을 좇아 하남왕(河南王)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에게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연경(燕京)에 이르니 황태자(皇太子)가 그와 통신(通信)하는 것을 미워하여 저지(沮止)시켰다. 녹생(祿生)은 곧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제안(齊顔)이 홀로 연경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국서(國書)를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달하였다. 뒤에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일이 누설(漏泄)되어서 죽었다. 김구덕(金九德) : 제안(齊顔)의 아우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서 숭정(崇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여러 번 이름난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죽은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함이 있었다. 본조 김사형(金士衡) : 영후(永煦)의 손자이다. 신우(辛禑) 때에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같이 대간(臺諫)으로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적임(適任)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벼슬이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김익정(金益精) ; 태종 조(太宗朝)에 장원급제하였다.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돈(金墩) :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썼다. 세종(世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돈(墩)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을 발표할 때,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裕)하기를, “내가 경(卿)을 보고자 하였는데 경이 문득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고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에 들게 하고 항상 경연(經筵)을 겸직하게 하였다. 돈(墩)이 어머니가 강진(康津)에 있다고 하여 여러 번 지방관직(地方官職)으로 나가기를 요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역마(驛馬)를 내려주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효도로 봉양하기에 편의하게 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돈(墩)이 의상(儀像)을 만드는데 정교(精巧)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ㆍ보루각(報漏閣)을 제작할 때에 돈(墩)이 김조(金銚)와 함께 참여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은 지 7년이나 되었는데, 병이 들자 승격시켜 인수 부윤(仁壽府尹)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졸(卒)하였다. 김수녕(金壽寧) :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나이 18세 때에 계유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렬하였으며,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고, 복창군(福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다. 김질(金礩) : 사형(士衡)의 증손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누전(累轉)하여서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이르렀다. 세조(世祖) 초년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음모(陰謀)를 고변(告變)하여 그 공(功)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에 봉작되고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으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김작(金碏) : 질(礩)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김뉴(金紐) : 갑신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중시(重試)와 등준(登俊) 두 과거에 장원하였고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詩)에 능(能)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였다.
신증 김수동(金壽童) : 사형(士衡)의 후손이다. 단중(端重)하고 온아하였다. 어려서 급제하였으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렬하였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희수(金希壽) : 급제하여 맑은 벼슬과 높은 벼슬을 역임하여 이름을 드날렸다. 해서(楷書)를 잘 썼는데 글씨가 매우 법도가 있었다. 벼슬은 관찰사에 이르렀다.
제영 산수무비구안청(山水無非舊眼靑) : 고려 김방경(金方慶)의 시에, “산과 물은 어느 것이나 예대로 있어 반갑고, 누대(樓臺) 또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슬프다, 고국의 유풍(遺風)으로 남아 있는,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수습(收拾)하여 나의 길 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 김주회 - 태영 종친님! 잘 보았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무궁무진한 선조님 기록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 김윤식 -
▣ 김항용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