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월남사지 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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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4-15 20:17 조회2,070회 댓글0건본문
월남사지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 298호
월남사지(月南寺址)
월남사의 창건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에 「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라 하여 간략한 월남사의 창건내역을 밝히고 있다. 또 『동국여지지』 및 『호남읍지』등에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 내용에 의하면 월남사는 진각국사(1178∼1234)가 창건하였으며, 여기에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진각국사碑가 있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대로라면 월남사는 고려후반기에 창건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지에 유존하고 있는 백제계 석탑이라 일컫는 모전석탑의 편년이 고려초기 또는 고려후기 등 두가지로 추정되는 학계의 견해가 있고, 뿐만아니라 1980년대 중반에 이 寺址(사지)에서 백제계의 와당이 발견되는 등 아직도 사지 전체에 대한 성격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월남사의 폐찰년대는 정확히 전해진 기록은 없으나 『동국여지지』에 「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라 한 점으로 미루어 이 책을 쓸 당시(1649∼1659)에 이미 월남사는 폐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 하는 내용이 「무위사사적기」에 나와 있는데 위 내용에 의하면 월남사는 임진왜란(1592년)때 왜구의 침략에 의해 폐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월남사지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양식의 석탑으로서 고려시대에 왜 이곳 월남사에 백제계통의 석탑이 세워졌을까 하는 의문을 제시하면서 일찍부터 국내에서 주목되어온 탑이다
그러나 이 의문점을 풀어줄만한 관련자료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월남사에 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탑의 기단은 단층이며 밑에 두꺼운 하대석을 놓고 우주석과 면석을 별석으로 하여 그 위에 갑석을 놓았다. 탑신부는 1층탑신이 2∼3층에 비해 높은 편이고 결구수법은 각면이 일정하지 않은데 남쪽에서는 엇물림식으로 서쪽은 1매의 벽판석이며, 북쪽은 또 엇물림식, 동쪽에서는 좁은 1석을 삽입하여 면석을 마련케 하였으나 1매의 삽입석이 유실되어 현재는 잡석을 채워 놓았다. 2층탑신부터는 급격히 높이가 낮아지면서 결구매수도 4매로 줄어들고 각면에 우주가 모각되었다. 3층탑신은 1석으로 되었으며 각면 우주의 모각 등은 그 수법이 동일하다.
옥개석은 추녀끝이 약간 반전되었을뿐 거의 수평이며, 옥개석의 상·하를 수매의 별석으로 결구하여 층급받침을 이루었는데, 하면의 층급받침은 3단이나 중앙받침은 하면에 모를 죽인 각형이고, 상하의 2단은 4분원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형식은 2층까지 계속되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줄었다.
상륜부는 탑신과 같은 석재와 소로형의 옥개석을 올렸으나 이들 전체는 노반으로 볼 수 있으며 그위로 복발과 양화가 있다.
이 탑은 塼塔(전탑)을 닮았다 하여 모전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는 탑재의 각 부재를 수매의 여러조각으로 결구하였을 뿐으로 그 석재 자체가 塼(전)을 닮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석탑은 월남사지석탑 또는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해야 옳겠다. 또 이 탑은 좁은기단, 가벼운 배흘림이 보인 탑신, 옥개받침에서 나타난 형식 등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라 하겠다.
이 탑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이 탑을 조각하게 된 석공에게는 아릿답고 젊은 부인이 있었다. 석공은 이 불사가 끝나기까지 나를 찾아오지 말고 집을 잘 지키라고 당부한 후 왔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운 남편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었다. 어느날 그녀는 몰래 이곳 월남사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먼 발치로 석탑일에 열중한 남편을 훔쳐보았다. 불사에 열중한 남편은 그 일에만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지 수척해 보였다.
돌아서려던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봤다. 사랑하는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그가 완성직전에 있던 석탑은 조각나고 그의 사랑하는 부인은 돌로 변해버렸다. 석공은 돌이 되어버린 부인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석공은 인근을 뒤져 석재를 구했으나 쓸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그의 부인이 화신한 돌을 쪼아 다시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소재지: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이 석탑은 호남지방에서는 규모로 보나 양식으로 보나 매우 중요한 모전탑(模塼塔)의 일례이다.
단층기단(單層基壇)위에 삼층탑으로 기단구조(基檀構造)에서 부터 탑신부(塔身部)에 이르가까지다수의 작은 석재로 각부를 구성하고 있는 점이다.특히 석탑의 옥개(屋蓋) 형식이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地) 석탑의 옥개 받침 형식을 연상하게 하는 형식이며, 추녀는 매우 넓고 상하수평으로나가다가 우각(遇角)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反轉)을 하고 있다.
전체 형식이 모전탑(模塼塔)이면서 석재결구(石材結構)에 있어 다분히 백제탑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특히 옥개 이면(裏面)의 수법이 탑신위에 소로형(小 木盧 形)의 1석이 첨가 되어 정림사지 탑과 흡사하다. 따라서 전탑(塼塔)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백제탑 양식을 전승한 양식으로 이 지역에서 백제계 모방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모전탑이다.
▣ 김윤만 -
▣ 김윤식 -
월남사지(月南寺址)
월남사의 창건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에 「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라 하여 간략한 월남사의 창건내역을 밝히고 있다. 또 『동국여지지』 및 『호남읍지』등에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 내용에 의하면 월남사는 진각국사(1178∼1234)가 창건하였으며, 여기에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진각국사碑가 있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대로라면 월남사는 고려후반기에 창건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지에 유존하고 있는 백제계 석탑이라 일컫는 모전석탑의 편년이 고려초기 또는 고려후기 등 두가지로 추정되는 학계의 견해가 있고, 뿐만아니라 1980년대 중반에 이 寺址(사지)에서 백제계의 와당이 발견되는 등 아직도 사지 전체에 대한 성격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월남사의 폐찰년대는 정확히 전해진 기록은 없으나 『동국여지지』에 「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라 한 점으로 미루어 이 책을 쓸 당시(1649∼1659)에 이미 월남사는 폐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 하는 내용이 「무위사사적기」에 나와 있는데 위 내용에 의하면 월남사는 임진왜란(1592년)때 왜구의 침략에 의해 폐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월남사지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양식의 석탑으로서 고려시대에 왜 이곳 월남사에 백제계통의 석탑이 세워졌을까 하는 의문을 제시하면서 일찍부터 국내에서 주목되어온 탑이다
그러나 이 의문점을 풀어줄만한 관련자료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월남사에 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탑의 기단은 단층이며 밑에 두꺼운 하대석을 놓고 우주석과 면석을 별석으로 하여 그 위에 갑석을 놓았다. 탑신부는 1층탑신이 2∼3층에 비해 높은 편이고 결구수법은 각면이 일정하지 않은데 남쪽에서는 엇물림식으로 서쪽은 1매의 벽판석이며, 북쪽은 또 엇물림식, 동쪽에서는 좁은 1석을 삽입하여 면석을 마련케 하였으나 1매의 삽입석이 유실되어 현재는 잡석을 채워 놓았다. 2층탑신부터는 급격히 높이가 낮아지면서 결구매수도 4매로 줄어들고 각면에 우주가 모각되었다. 3층탑신은 1석으로 되었으며 각면 우주의 모각 등은 그 수법이 동일하다.
옥개석은 추녀끝이 약간 반전되었을뿐 거의 수평이며, 옥개석의 상·하를 수매의 별석으로 결구하여 층급받침을 이루었는데, 하면의 층급받침은 3단이나 중앙받침은 하면에 모를 죽인 각형이고, 상하의 2단은 4분원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형식은 2층까지 계속되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줄었다.
상륜부는 탑신과 같은 석재와 소로형의 옥개석을 올렸으나 이들 전체는 노반으로 볼 수 있으며 그위로 복발과 양화가 있다.
이 탑은 塼塔(전탑)을 닮았다 하여 모전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는 탑재의 각 부재를 수매의 여러조각으로 결구하였을 뿐으로 그 석재 자체가 塼(전)을 닮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석탑은 월남사지석탑 또는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해야 옳겠다. 또 이 탑은 좁은기단, 가벼운 배흘림이 보인 탑신, 옥개받침에서 나타난 형식 등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라 하겠다.
이 탑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이 탑을 조각하게 된 석공에게는 아릿답고 젊은 부인이 있었다. 석공은 이 불사가 끝나기까지 나를 찾아오지 말고 집을 잘 지키라고 당부한 후 왔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운 남편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었다. 어느날 그녀는 몰래 이곳 월남사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먼 발치로 석탑일에 열중한 남편을 훔쳐보았다. 불사에 열중한 남편은 그 일에만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지 수척해 보였다.
돌아서려던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봤다. 사랑하는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그가 완성직전에 있던 석탑은 조각나고 그의 사랑하는 부인은 돌로 변해버렸다. 석공은 돌이 되어버린 부인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석공은 인근을 뒤져 석재를 구했으나 쓸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그의 부인이 화신한 돌을 쪼아 다시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소재지: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이 석탑은 호남지방에서는 규모로 보나 양식으로 보나 매우 중요한 모전탑(模塼塔)의 일례이다.
단층기단(單層基壇)위에 삼층탑으로 기단구조(基檀構造)에서 부터 탑신부(塔身部)에 이르가까지다수의 작은 석재로 각부를 구성하고 있는 점이다.특히 석탑의 옥개(屋蓋) 형식이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地) 석탑의 옥개 받침 형식을 연상하게 하는 형식이며, 추녀는 매우 넓고 상하수평으로나가다가 우각(遇角)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反轉)을 하고 있다.
전체 형식이 모전탑(模塼塔)이면서 석재결구(石材結構)에 있어 다분히 백제탑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특히 옥개 이면(裏面)의 수법이 탑신위에 소로형(小 木盧 形)의 1석이 첨가 되어 정림사지 탑과 흡사하다. 따라서 전탑(塼塔)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백제탑 양식을 전승한 양식으로 이 지역에서 백제계 모방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모전탑이다.
▣ 김윤만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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