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퇴계(退溪) (02) - 퇴계 이황의 출사와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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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4-17 17:14 조회1,684회 댓글0건본문
아! 퇴계(退溪) (02) - 퇴계 이황의 출사와 관직
우리나라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이황 선생은 조선중기 사색당쟁의 시대에도 당파와 지역을 초월하여 전국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어 門人수가 320여명이 이르렀다 합니다.
퇴계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에 수록된 310여명의 門人중 우리문중 선조님도 여러분이 있어 이를 살펴보고, 퇴계시풀이 국역본을 몇권 구입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의 행적도 살펴보면서 퇴계학 공부를 같이 하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 디지털한국학
2. 출사와 관직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임명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뒤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책06: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
죽은지 4년 만에 고향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주회님 그간 편안 하셨습니까?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은회 형님! 그동안 장기 출장 다녀 오셨나 봅니다. 자주 뵙기를...
▣ 김윤만 - 잘 일었습니다.
▣ 솔내영환 - 퇴계연구가 시작되셨군요.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끝없는 열정 늘 부럽고, 다른 한편으론 제 게으름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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