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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렴사(金安廉使)의 시권(詩卷) 뒤에 제(題)하다.-이달충(李達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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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4-30 09:21 조회1,4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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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안렴사(金安廉使)의 시권(詩卷) 뒤에 제(題)하다 ▣

--이달충(李達衷 : 주)--



--내가 계축년 가을에 산중(山中)으로부터 오니 김군 경지(金君敬之)가 선뜻 여우(旅寓)로 찾아와 말하기를‘내가 관동(關東)을 안찰(按察)하게 됨에 있어 우인(友人)들이 길 떠나는 데에서(서(序))와 시(詩)를 증여하여 영예롭게 해주었는데 오직 그대와는 서로 만날 수 없어 한 마디 말의 행자(行資)를 얻지 못하여 자못 마음에 서운하였소.’하고 권후(卷後)에 발(跋)을 청하며 소매에서 한 권축(卷軸)을 꺼내 보이는데 모두 한 때의 큰 문필(文筆)들이었다. 우리 경지(敬之)의 재주와 덕의 아름다움은 제공(諸公)들이 포장(襃章)하고 면려(勉勵)한 뜻에 덧붙일 만한 것이 없어 다시 그 사이에 중언부언할 것이 있겠는가? 또 일찍이 듣건대, 바다를 본 자와는 물을 말하기 어렵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배운 자와는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경지(敬之)는 공훈(功勳)과 선경(善慶)의 가문에서 생장하였고, 도덕과 문장의 문하에서 배웠다. 관동에서 사명(使命)을 받듦에 있어 회우(淮右)를 관광(觀光)하여 흉금(胸襟)이 더욱 활달하고 기상(氣像)이 더욱 호탕할 것이므로, 우리들이 눈을 비비고 기다림은 대체로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내 어찌 감히 말 발굽에 괸 물로 큰 물에, 개미 둑[蟻

垤(의질)]으로 큰 산에, 푸성귀로 기름진 음식에, 노가(蘆笳 : 갈대로 만든 피리)로 금슬(琴瑟 : 비단으로 치장한 비파)에 끼이려 하겠는가? 이렇게 함은 어리석지 않으면 곧 미치광이로서 반드시 괴탄(怪嘆)스런 일일 것이다. 내가 장차 붓을 대려다가 곧 다시 그침도 이러해서다. 경지(敬之)의 청이 두 번씩이나 있게 되므로 말막음이나 하여 발(跋)을 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신우(辛禑) 원년,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 왔을 때에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이 맞이하려 하였다.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전리총랑(典理總郞) 이숭인(李崇仁)·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예문응교(藝文應敎) 권근(權近)이 도당(都堂)에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만약 원사(元使)를 맞이한다면 한나라 신민(臣民)이 모두 난적(亂賊)의 죄에 빠질 것입니다. 앞날 무슨 면목으로 지하(地下)에서 현릉(玄陵 : 공민왕)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이 그 상서(上書)를 물리쳐 받지 아니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사(元使)를 맞이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경복흥의 집으로 가서 말하기를, ‘나는 원사(元使)의 목을 베어 오겠소. 그렇지 않으면 명(明)나라로 묶어 보내겠소.’ 하고 말이 자못 불손(不遜)하였으며 또 태후(太后)에게 아뢰기를, ‘맞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니 경복흥·이인임이 화를 내어 정도전을 회진(會津)에 유배하였다.

--《포은연보(圃隱年譜)》에 이르기를, 신우(辛禑) 1년,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 왔다. 이인임(李仁任)이 또 맞이하려 하니, 선생이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 등 10여인과 더불어 상서(上書)하여 항의하였고 대관(臺官)의 상소도 역시 이인임을 논핵(論劾)하였다. 원소(元疏)는 《포은집(圃隱集)》및《동국통감(東國通鑑)》에 보인다.

--《동국통감(東國通鑑)》신우(辛禑) 원년 가을 7월에 응양군 상호군(鷹揚軍 上護軍) 우인열(禹仁烈)·친종 호군(親從 護軍) 한리(韓理)가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빌붙어 말하기를, ‘간관(諫官)이 재상(宰相)을 논박(論駁)하였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첨(簷)에 내리고 백영(伯英)이 최영(崔塋)·지윤(池奫)으로 하여금 국문(鞠問)하게 하여 장형(杖刑)을 가하고 유배하였다. 또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임효선(林孝先)·염정수(廉廷秀)·염흥방(廉興邦)·박형(朴形)·정사도(鄭思道)·이성림(李成林)·윤호(尹虎)·최을의(崔乙義)·조문신(趙文信) 등이 자기를 모해(謀害)하려 한다고 아울러 유배(流配)하였다.

--《려사제강(麗史提綱)》 공민왕(恭愍王) 16년, 이색을 성균 대사성(成均 大司成)으로, 정몽주(鄭夢周)를 박사(博士)로 삼았다. 이색이 생원을 증원(增員)하고 경술사(經術士)를 선발하니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이 모두 타관(他官)으로 교관을 겸하였다. 이에 앞서 학관생(學館生)은 수십에 불과하였는데 이색이 학식(學式)을 다시 정하고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경서(經書)를 나누어 수업(授業)하였으며, 강(講)을 마치매 서로 논란(論難)하기에 권태(倦怠)를 잊었다. 이에 학자가 모여 들어 서로 보고 느끼니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일어났다.

--신우(辛禑) 10년 봄 정월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구용(金九容)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에 갔다. 이에 앞서 의주천호(義州千戶) 조계룡(曺桂龍)이 하정사(賀正使)를 호송(護送)하여 요동에 이르렀는데 도지휘(都指揮) 매의(梅義)가 속여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나라에 공사(公事)가 있을 적마다 마음 다해 시행하였는데 너의 나라에서 어찌 한 번도 문안하지 않는가?’하매, 재상(宰相)이 이를 믿어 김구용(金九容)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아 서(書)를 받들어 겸하여 백금(白金) 백냥, 저 마포(苧 麻布) 각 50필을 주어 보냈다. 총병(摠兵) 반경(潘敬)과 섭왕(葉汪)이 매의(梅義) 등과 말하기를, ‘인신(人臣)은 의리에 있어 사교(私交)가 없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하고 붙들어 경사(京師)로 돌아가 김구용(金九容)을 대리(大理)에 유배하니, 길에서 병으로 졸(卒)하였다.

--《성옹시화(醒翁詩話) ☞ 오기로 허균의 惺수詩話가 바름》에 이르기를, 김척약재(金惕若齋) 구용(九容)의 시(詩)는 매우 맑고 넉넉하여 목노(牧老 : 목은 이색(李穡))가 말한 바, ‘ 경지(敬之)가 붓을 댄 것은 구름과 연기와 같다.’라고 한 경우이다. 일찍이 회례사(回禮使)로 요동도사(遼東都司)에 폐백(幣帛)을 가져갔는데 반규(潘奎 : ☞반경(潘敬)의 오기임)가 붙들어 경사(京師)로 보냈다. 그 자문(咨文)에 말 50필을 5천필로 잘못 썼다. 고황제(高皇帝)는 사교(私交)에 화를 내고 5천필을 풀어 돌려보내는 것이 지당하다 하였다. 이 때 이광평(李廣平)이 나라의 정사를 맡고 있었는데 본래 공(公) 등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마침내 말[馬]를 바치지 않으니 황제(皇帝)는 공(公)을 대리(大理)에 유배하였다. 시를 지어 부르기를. ‘사생(死生)은 운명으로 말미암은 것, 천명(天命)을 어찌할 것인가, 동쪽으로 부상(扶桑 : 해뜨는 곳)을 바라보니, 길을 멀고 아득하기만 할 뿐, 양마(良馬) 5천은 언제 도착할 것인가, 도화관(桃花關) 밖은 풀만이 더부룩하네.’

--무창시(武昌詩)에 이르기를, 황학루(黃鶴樓) 앞 물은 굽이치고 연강(沿江)의 염막(簾幕)은 몇 천 집인가. 돈 걷우어 술을 사 회포(懷抱)를 여니 대별산(大別山)은 푸르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성옹(醒翁)은 곧 균(筠)·광평 이인임(廣平 李仁任)이다)

--이도은(李陶隱 : 이숭인(李崇仁))이 각림상인(覺林上人)의 상죽헌기(霜竹軒記)에 제(題)하여 이르기를, ‘금년 가을에 상인(上人)이 산에서 내려 왔다. 내가 보고 기뻐서 머무르게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상인(上人)이 한 권축(卷軸)을 꺼내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상죽(霜竹)으로 나의 헌(軒)에 이름을 붙이었는데 육우 김비판(六友金秘判 : 김구용(金九容)을 지칭)에게 청하여 대자(大字)를 만들었소. 장차 영가(永歌)를 구하여 신간(紳間 : 진진(搢搢) 즉 선비들 사이)에 천거하려 하니 그대가 써주면 다행이겠소. 운운(云云).‘ 하였다.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편집인 김재희(金在熙)/1996. 8.30》





(주) 이달충 : 영환 대부님의 경주이씨와 안동김문 기록 중에서(2001.12. 1)



--안동김문과 경주이씨와 혼맥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문온공파에서는 특히 돈독한 관계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문온공(척약재 김구용)의 아드님이신 성천도호부사공 휘 명리공의 배위께서 바로 경주이씨 이십니다. 계림군부인에 봉해진 경주이씨할머님의 친정 아버님은 고려말 대 정치가요, 대 문장가이신 이달충선생이십니다. 특히 제정선생과 척약재선조와는 사돈을 떠나 아주 돈독한 친분을 유지 하여 척약재집의 발문도 쓰시고 척약재 잠언도 쓰신것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문온공파 후손이 거의 전부 이 경주이씨 할머니 후손입니다.(99.9%)

--또한 척약재(김구용)선조님은 무려 9명의 매부가 계셨는데 그중 둘째 매부가 이장로입니다. 이분이 바로 익제 이제현선생의 아드님이시니, 문온공파와 경주이씨는 서로 외손이 되는 셈이지요.



[이달충(李達衷)]

--?∼1385(우왕 11). 고려말의 유학자·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지중(止中), 호는 제정(霽亭). 첨의참리(僉議參理) 천(#천45)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서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호부상서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호부상서로 있던 1360년 팔관회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으나, 훌륭한 학자였으므로 1366년에 밀직제학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신돈이 전횡하던 때에 그에게 주색을 일삼는다고 공석에서 직언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신돈이 주살(誅殺)된 뒤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1385년(우왕1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는 《제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김항용 -

▣ 김주회 - 김안렴사(金安廉使) 라고 해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안렴사(휘사렴) 할아버지 인지 알고요. 척약재 할아버지도 안렴사를 지내셨군요. 시권(詩卷) 이라 함은 시집을 말함인가요?

▣ 솔내영환 - 척약재 할아버님이 강릉도안렴사로 나가시게 되니 지인들이 모여 시회를 한 것 같습니다. 이때의 시를 모아 시권은 매었는데. 이때 서문은 목은이 짓고, 발문은 제정(이달충)이 쓰셨습니다. 이 시권은 전해지지 않고, 이때 다른 분들이 지은 시 몇편만 전해저 옵니다.

▣ 솔내영환 - 나재(한복), 담암(백문보) 경산(이인복),야은(전녹생),추재(이원필), 등 여러분의 시가 전해저 옵니다. 척약재학음집 부록에 실려 있습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익 -

▣ 김은회 -

▣ 김발용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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