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의 문인 (13) - 김충갑 김제갑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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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5-02 03:07 조회1,528회 댓글0건본문
퇴계(退溪)의 문인 (13) - 김충갑 김제갑 형제
■ 퇴계문하 6哲의 삶과 사상 (1999,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지산 조호익
112. 金悌甲
생몰년-1525∼1592
호-毅齋
거주-京
문집명-
문인록소재 사승관계-계묘년(19세)에 拜謁, 師事
개인문집소재 사승관계-
■ 퇴계문인록 (1983, 이희대 편저, 제자 서봉 김사달)
p75
毅齋 金悌甲
선조때의 문신인 김제갑의 자는 順初요 호는 毅齋(의재)이며 본관이 안동이니 명종 즉위 초에 일어난 을사사화때 희생당한 명신 김충갑의 아우이다.
중종19년(1525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19세 때에 先鄕인 안동으로 내려와 퇴계선생의 薰炙(훈자-고기구울,친히가르침을받을자)를 받았으며 사마시를 거쳐서 29세때인 명종8년(155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홍문관과 세자시강원, 성균관의 정자, 수찬, 전적, 사서, 직강, 사성등 여러 관직을 거쳐서 원주목사에 올랐던 의재는 선조25년(1592년) 원주성을 사수하다가 순직하니 향년이 68세였다.
선조가 세자로 있을 때 왕자사부를 역임한 바도 있는 그가 원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一隅孤城萬古三綱"(일우고성만고삼강) 이란 글을 내려 애도하고 충절을 찬양하는 한편 영의정의 증직과 文肅公(문숙공)의 시호를 내렸다.
그후 현종때에는 고려때 무신 원충갑 상장군과 함께 원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 안동김씨 홈페이지
---전 략---
이곳에서(괴산군 문광면 문법리) 공은(김석) 5男 2女를 낳고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 결과 아들 모두는 과거에 합격하였고 크게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영광이 있었으며 문운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자녀들은 부친께서 학문수업을 받다가 공이 몰하자 공의 매부인 묵재 이문건(李文楗. 주:星州人. 호는 默齋. 趙光祖 문하생. 기묘사화로 9년간 停擧를 당하여 괴산 호암리(현 문광면 유평리)로 낙향, 은둔불사 하다가 별시문과하여 丞旨에 오름. 淸白吏에 녹선. 乙巳士禍로 성주에 23년간 유배. 유배지에서 사망. 괴산의 花巖書院에 배향됨. 詩書에 능함. 저서<默休唱酬>)에게서 공부하였다.
특히 四子 悌甲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으로부터 수업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 때 ★忠甲은 퇴계와 아주 친분이 두터웠고 자신이 직접 아우인 제갑을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공부시키기도 했다 한다.
一子 휘 ★忠甲은 안악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二子 휘 ★孝甲은 아산군수를 지냈고,
三子 휘 ★友甲은 진사로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홀로되신 할머니 의성김씨와 어머니 행주기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四子 휘 ★悌甲은 충청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원주목사로 재직중 임진란을 만나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부인과 아들 시백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숙의 시호를 받았다.
五子 휘 ★仁甲은 비안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 五子의 훌륭한 업적으로 인해 이들을 일컬어 특별히 오갑파(五甲派)라 하며 제학공파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 천안시지(1987)
金忠甲(김충갑)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龜巖(귀암)이다. 1543(중종38) 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때 정암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어 고생하였다. 뒷날 풀려서 괴산에 살았는데 김충갑은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뛰어났다.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나이어려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고려조에 실시하였던 승과를 다시 실시하고 승 보우를 입궐시켜 정치에 참여케 하였다.
그래서 유생들과 관리들은 모두 보우를 배척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는데 이때 김충갑이 많은 관리들과 더불어 보우를 배척하는 데 앞장서서 성리학자들 간에 이름이 높아졌다.
홍문관에서 수찬 벼슬을 하던 충갑의 매서 李(불화변)渾이 을사사화때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충갑은 이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장송가를 한 수 지어 시체 옆에 놓았다
代之耳 伐之耳
落落長松 伐之耳
小焉傾置之 棟材成之耳
大廈將傾式于 何以柱之
1546(병종1)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을사사화때의 간신들을 탄핵하다가 청주땅에 귀양가게 되어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선조초에 유배로부터 풀리는 은전을 입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의 헌납(정5품직)에 이르렀으며
뒷날 보조공신 좌찬성 상락군에 봉하여졌다. 또 충청도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서원을 세워 김충갑의 곧은 영혼을 제향하였다고 한다.
김충갑이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땅에 머물러 산 것이 안동김씨의 집단 거주지인 병천면의 가전리 잣밭 부락이다.
■ 디지털한국학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 20)∼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진사 석(錫)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정자(正字), 병조좌랑·정언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부사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領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요새만을 믿고 따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966년에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가 세워졌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孝宗實錄, 肅宗實錄, 朝鮮金石總覽. 〈徐炳國〉
▣ 김태서 -
▣ 김윤만 - 영원산성에서의 문숙공 제갑 선조의 최후의 장면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렬했습니다. 김구용. 김시약. 김응하 장군 등 선조님들의 최후의 비장한 모습을 한번 모아보고 싶습니다.
▣ 김태영 - 계속 수고가 많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잘 보고있습니다.
▣ 김항용 -
▣ 김발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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