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퇴계(退溪)의 문인 (14-1) - 김사원 김사형 김사정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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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5-02 17:54 조회1,518회 댓글0건본문
퇴계(退溪)의 문인 (14-1) - 김사원 김사형 김사정 후손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6/13 07:18 (from:211.219.142.219) 조회 : 50
■ 의성군지(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
바. ★김사원(金士元 1539∼1601)
(전략)
그 가운데 장손 ★김상원(金尙瑗)은 호를 남애(南厓)라 하고 어려서는 수암 ★유질(修岩 柳 )에게, 장성한 뒤에는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사가 뛰어났다. 병자(丙子) 강화 후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자수 강학하여 세인이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부르고 효우도 출중했다. 호군을 지내고 유고가 전하며
다음 손자 ★상기(尙琦)는 호를 사오(沙塢)라 했으며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고 문행이 뛰어나 당사의 명사와 교우가 빈번하고 유집이 전하며,
자여당 ★상각(自餘堂 尙珏)은 천성이 관후하고 효우가 극진하여 향리에 널리 알려졌고,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여 사촌에 자여당(自餘堂)을 창건 관리하며,
다음 손자 ★상인(尙璘) 또한 가학을 이어 받아 문장이 훌륭하고, 특히 숭조와 교손에 더욱 힘써 일향의 추앙을 받고, 만년에 양진당(養眞堂)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며 여생을 보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증직을 받았다.
현손대에 이달(履達), ★이규(履規)는 모두 문행이 있어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집도 전하며,
증손 ★성좌(聖佐)는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을 사사하여 문행이 높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고 청백리로 추앙받았다.
★도응(道應)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회인 현감(縣監)을 지냈다.
★양좌(良佐), ★추응(秋應) 등 모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되고 문적이 남았으며,
소암 ★재응(素巖 載應)은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에게 배우고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구사당 ★김락행(九思堂 金樂行) 등과 친교가 있었으며, 유집과 사례집사(四禮輯辭)가 전한다.
6세손 이하에 와서 ★종구(宗九)는 호를 운암(云庵)이라 했고 문과에 급제 전적(典籍)을 역임했으며,
★성응(誠應), ★양직(養直), ★청진(淸進), ★성진(誠進)은 모두가 족친인 천사 ★김종덕에게 학문을 닦아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명망이 원근에 알려졌다.
★양휴(養休)는 호를 율원(栗園)이라 하고 ★천사(川沙)와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에게 수학하여 경사에 밝았고 후학을 장진한 공이 있으며, 유집 5권이 전한다.
이어서 ★양경(養絅)은 진사이었으며 서고 ★우유(西皐 佑裕)는 경사에 밝고 후덕했으며,
사촌 ★희유(思村 羲裕)는 대과를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고,
기산 ★석유(奇山 奭裕)는 정제 ★유치명의 고제로서 후진 양성에 힘써 당세에 공헌했으며,
★수익(壽翼), ★상호(相鎬), ★호직(浩直) 등은 한말에 진사에 합격되었다.
운산 ★상종(云山 象鍾)은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의도가 준정하고 기우가 광심했으며, 1896년 병신년에 창의하여 의성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되고, 금성면 산운(山雲)과 옥산면 황산(黃山)에서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후에 파병조칙에 의거 융복을 거두고 61세로 서거했으며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았다. 좌산
★수욱(左山 壽旭)은 소모장(召募將), ★권대직(權大稷)은 중군(中軍), ★수담(壽聃)은 선봉장(先鋒將), ★수협(壽莢)은 관향장(管餉將)으로 의성 의병을 주도한 바 있다.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6/13 07:18 (from:211.219.142.219) 조회 : 50
■ 의성군지(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
아. ★김사정(金士貞)(1552∼1620)
(전략)
그 손자 오계 ★상유(玉溪 尙瑜)는 장사랑을 지내고 문행이 있었으며 유집이 전한다.
현손인 북오 ★이중(北塢 履中)은 무과에 올라 선전 오위장(宣傳 五衛將)에 이르렀고 식략이 절인하고 무신란에 의장(義將)으로 추대되어 군공을 세운 바 있다.
5세손 성고 성(省고 聲)과 귀은 오응(龜隱 五應)은 다같이 문과에 급제했는데 ★성(聲)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지내고 경학에 고명하여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초휘는 성응(聲應)이었으나 어전에서 강경할 때 성(聲)음이 청아함으로 어명으로 성(聲)자 만을 이름하게 되었고,
★오응은 사헌부 감찰, 병조정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여러 주, 읍을 다스림에 청백리로 알려 졌다. 정희량의 반란이후 사론이 분분할 때, 소수로서 직언(直言) 충간하여 조의(朝議)를 바로 잡아 전 영남이 신원(伸寃)된 일이 있으며, 함평에 치적비가 세워졌다.
6세손 ★종필(宗泌)은 문장이 뛰어났고, ★종헌(宗憲), ★종국(宗國), ★종식(宗軾)은 각각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 모두가 경사에 능통했고 명망이 있었으며
★형진(馨進)은 호가 괴음(槐陰)으로 족대부 ★재응(載應)에게 수학하여 지국이 준정하고 경학에 정통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유집 4권이 있으며 ★경진(景進)도 진사에 합격했다.
★양정(養楨)과 그의 아들 ★노선(魯善), 양정의 아우 ★양식(養植)과 그 아들 ★기선(驥善)은 모두 생진과에 합격하여 향방에 널리 알려졌다. ★양정(養楨)은 ★정종로(鄭宗魯)를, ★노선(魯善)은 ★유치명(柳致明)을 사사하여 문장이 능하고 율기와 검약으로 후덕하게 처신했다. 한 때 도천의 물망에 올랐으나 사양했고, 양정은 문집 8권, 노선은 12권을 펴 냈으며, 양식, 기선 부자 또한 행의가 근엄하고 문사(文辭)가 탁월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고 유집이 전한다.
▣ 한말 의병활동. PP 205∼206
---옛 한말의 의병은 1895년 민비(옮긴이 註 : 민비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해로
명성황후가 바른 것임) 시해와 당발령 실시로 일어난 것이 제1기이고, 1905년을
사조약 체결로 일어난 것이 제2기, 1907년 고종황제의 양위와 군대해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제3기의 의병운동으로 대별할 수가 있다.
---의성의 의병활동은 구한말 의병활동의 제1기에 속하는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운동인데 이 두가지 사건이 다같이 일본의 대한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반감은(의) 열기가 자못 높았으므로 두드러진 군내
의 활약상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모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일어난 지방유생들의 항일정신은 외세를 몰아내
기 위한 결연한 투쟁으로 나타났다. 점곡지방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의병장은 ★김상종(金象鍾), 초모장(招募將)에 ★김수욱(金壽旭) 중군에 권대직 선
봉장(先鋒將)에 ★김수담(金壽聃) 관향장(管餉將)에 ★김수협(金壽莢) 등이었다. 당시
이들은 모두가 전통적인 유가(儒家)사상을 이어 받아서 경전을 공부하다가 을미
(乙未)년(서기 1895)에 민비가 왜적에게 시해되자 이 소식을 늦게 나마 전해 듣고
분연히 궐기한 것이다. 이들은 우국일념으로 뭉쳐서 궐기하였을 뿐 전혀 전투 경
험이 없고 장비마저 너무나 한심하여 정예화된 적군 앞에서 참패하고 점곡일대에
서 퇴거하여 옥산과 점곡을 접해 있는 황산(黃山)으로 후퇴하였다.
---이 곳은 점곡면 소재지에서 6㎞가량 떨어진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약 80도의
경사와 절벽을 이루는 곳으로 남천(南川)이 우측을 끼고 흐른다. 동편 산등을 완
만하게 타고 오르면 차차 가파른 산세가 나타나면서 이끼낀 산성이 산정상을 끼
고 3㎞가량 뻐쳤다. 경사 70도를 이루면서 석축산성이 견고하게 쌓여 있다.
---비교적 지세를 유리하게 점유하여 항전을 기다려 1896년 3월 29일 왜군과 접
전했으나 그들의 구비된 화력 앞에서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했으며 ★김수담(金
壽聃) ★김수협(金壽莢) 등이 이곳에서 비분의 전사를 당하게 되었다. 비록 그들의
항전은 패전에 이르렀으나 본래부터 승산을 계획하고 나선 일이 아닌 순수 우국
일념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더욱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 김태영 -
▣ 김태서 -
▣ 김재원 - 연일 자료 발굴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감사합니다.
▣ 김재익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
▣ 김윤식 -
▣ 김윤만 - 시군지순례 때 의성 문중과 괴산 문중의 대단함을 질과 량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 김우회 - 우리가 해야하는것을 선각자가 올려주니 고맙기 그지없군요,의성군지 보기는 여러번 보았으나 올리는것은 좀 어색해서, 의성군지 점곡면 서촌의 역사 우리안동김문(도평의공)의 역사라 영광이면서도 비극의장입니다.왜 연산군 이후에 왜 벼슬을 멀리했는가..임진란때, 민비시해이후의 피의 능선이 되었다는 아는이는 우리문중의 한이 서립니다.또 6.25때도 그나마 다타고...생각하면 눈시울이 서려 이글도 겨우 올립니다.
▣ 김우회 - 오타조정 : 서촌--사촌으로, 문중의 영광도 좋지만 국가의 위기때는 종들을 보내기만은 하지 않고 우리스스로 맨 앞장서서 싸웠음을 더 자랑있게 생각되는 긍지입니다.
▣ 김우회 - 의성군지 과거와 긍지사는 근 90%이상이 사촌 우리문중사 그자체가 의성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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