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국가지정중요민속자료 제143호 서정우 가옥과 안동김문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3-05-03 04:27 조회1,603회 댓글0건

본문

▣ 국가지정중요민속자료 제143호 서정우 가옥과 안동김문 ▣



--공(公)의 휘(諱)는 정인(鼎仁)이요 자는 원길(元吉)이며 영종 임진(英宗 壬辰 : 영조48년, 1772년) 9월 초9일에 태어나 을사(乙巳 : ☞ 헌종11년, 1845년) 6월 25일 졸하니 수 74이다. 묘는 선영 국내(局內)에 있으며 자좌(子坐)이다. 배(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인데 경인(庚寅 : ☞ 영조46년, 1770년)년에 태어나 갑인(甲寅 : ☞ 정조18년, 1794년) 7월 초6일에 졸하니 수는 25이며 낳아 기르지 못하였다. 부(父)는 양진(亮鎭)이요 조(祖)는 주구(周耈)이며 증조(曾祖)는 광오(光五)요 외조(外祖)는 강릉 최광하(江陵 崔光夏)이다. 계배(繼配)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인데 계사(癸巳 : ☞ 영조49년, 1773년)년에 태어나 임오(壬午 : ☞ 순조22년, 1822년) 7월 17일 졸하니 수 42세(? ☞ 50세)이다. 부(父)는 희택(希택 ☞ 雨변 밑에 澤자)이요 조(祖)는 유실(有實)이며 증조(曾祖)는 최진(崔震)이요 외조(外祖)는 장수 황익헌(長水 黃翼憲)이다. 2남(二男)을 길렀는데 맏이는 의철(義喆)이요 다음은 의명(義明)이다. 셋째 할머니께서는 2남(二男)을 두었는데 맏이는 의석(義奭)이요 다음은 의봉(義鳳)이다. 묘는 선영(先塋) 아래에 2위(二位)를 합폄(合窆)하였는데 묘좌(卯坐)이다.

--공(公)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아우에게 우애하며 돈목(敦睦)하고 인후(仁厚)한 풍도(風度)는 불초손(不肖孫이) 감히 붓을 들어 논할 수 없다. 대체로 하늘의 이치에 기필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한 기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집안은 대대로 가난하였다. 공은 본래 없는 곳에서 소임(所任)을 수행하여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모를 잘 봉양하고 제사를 잘 받들었다. 손을 접대하는 일에 있어 전혀 어찌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 지성(至誠)을 다하였고 부지런한 마음으로 살림과 농사에 힘을 써 점점 그 집의 형편을 이루었다. 갑술(☞ 甲戌, 순조14년, 1814년) 10월 공(公)은 친상(親喪)을 맞아 례(禮)를 갖추어 후히 장사(葬事)를 모셨으니 공의 마음에 한 됨이 없으며 중년(中年)에 불행하여 아우의 상(喪)을 맞으니 고아가 된 조카와 상부(孀婦 ☞ 과부)가 된 제수(弟嫂)를 극력 어루만지고 보호하였다. 6종형매(六從兄妹)의 혼인에 있어 모두 그 시기를 잃지 않았고 그 사종형제(四從兄弟)가 분가(分家)함에 있어 산업(産業)이 넉넉하여 편히 앉아 먹게 하였다. 이는 공(公)의 인후(仁厚)로서 이웃 마을에서 칭송이 무궁하였는데 모두 ‘문호(門戶)가 창대(昌大)하기로 공(公)의 일문(一門)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앞서 말한 하늘의 이치에 기필할 수 있다는 경우이다. 갑신 2월에 이르러 갑자기 선고(先考)의 상(喪)을 당하니 공(公)에게 있어 리(理)에 거스르는 참척(慘慽)이었다. 이 상변(喪變)을 당한 이후 공(公)은 자탄(自嘆)하기를 ‘자손(子孫)과 산업(産業)은 빙탄(氷炭)이라 할 수 있다.’하고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고 명승을 찾아 유상(遊賞)하니, 금강산(金剛山)이다. 속리산(俗離山)이다. 4군(四郡)이다. 하는 곳을 모두 소요(逍遙)하였다. 내 백부(伯父, 경례(慶禮)의 백부(伯父)이니 곧 정인(鼎仁)의 맏아드님 의철(義喆)을 가리킴)의 여러 차례의 발해(拔解 : 과거시험)에 성력(誠力)을 다하여 싸주고 빌고 하셨는데 실은 과도하였으며 끝내 열매도 맺지 못하였다. 공(公)이 졸거(卒去)하신 뒤 불초자손(不肖子孫)은 동서로 유리(流離)되고 산업은 탕패하여 공(公)의 제사에 례(禮)를 갖출 수 없이 되었으니 앞서 말한 바 하늘의 이치를 기필할 수 없다.라고 한 경우이다. 대체로 공(公)의 사업(事業)을 논한다면 6대 묘소(墓所)에 석물(石物)을 영건(營建)하였고 8종형제의 가산(家産)을 풍족케하였으니 이는 공(公)의 치산(治産)이 얼마나 되는 돈인지 알 수 없으며 매년 감시(監試)·회시(會試)·잡과(雜科)와 인아족속(姻婭族屬) 및 원근의 구호(救護)에 용도(用度) 또한 몇 천금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을유(乙酉 : ☞순조25년, 1825년)년에 공산정(公山亭)에 옮겨 살면서 남의 폐국(弊局)을 사서 내외 와가(內外 瓦家) 수십칸을 지었고 그 가[邊]에 나를 위하여 역시 와가(瓦家) 십여칸과 초가(草家)를 지었다(주1). 상촌(桑村)과 공산(公山) 두 곳에 공(公)이 명하여 지은 것이 백칸 가까이 되었으며 그 외에 낭호(廊戶)가 명을 받들어 세운 것이 수십 좌(座)요, 종가(宗家)는 공(公)의 생전에 감(減)함이 없었으니 만금(萬金)이었다. 대체로 공(公)의 지조(志操)는 고결하고 집심(執心)은 굳고 컸으며 인(仁)을 베풀고 후한 덕이 있는 분이었다. 초년에는 갖은 가난을 겪었고 중년에는 농상(農桑)을 부지런히하여 부요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천하게 말하여 범인(凡人)으로 말하면 하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하겠으나 공(公)은 그러하지 않았다. 장호(長湖) 저자[市]의 사창(社倉)은 거리가 불과 10리였으나 평생에 한 번도 창시(倉市)에 들어가신 일이 없었으니 이는 지조가 고결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농사를 지을 때 의관(衣冠)을 벗지 않았고 늘 나막신을 신으셨다. 이웃 사람이 말하기를, ‘보기에 매우 불편하니 나막신을 벗고 짚신을 신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공(公)이 답하기를 ‘갖신(가죽신)은 한사(寒士)에게 부당하고 짚신은 시하(侍下)의 인사(人事)에 있어 더욱 부당하다.’ 하고 집안을 일으키기 전에는 한 번도 바꾸지 않았으니 어찌 마음이 커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을 구호(救護)하고 거두어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등 돌리게 하지 않아 공(公)의 임종(臨終) 때에 마을에서 애통해 한 자가 몇인지 모르며 장례(葬禮) 때에 먼 곳에서 와서 전(奠)을 드린 경우가 또 몇인지 모르니 이 어찌 후덕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불초(不肖)는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선고(先考)의 얼굴도 뵙지 못하고 슬하(膝下)에서 양육이 되었다. 입학(入學)하게 되어서는 나에게 사부(師傅)로 심계항(沈啓恒)씨를 정하고 온 식구의 의식 일용(衣食 日用)을 전담(專擔)하셨으니 자손을 교육하는 도(道)에 있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약간의 자손이 남북으로 흩어져 있어 공(公)의 마음 만분의 일도 본받음이 없으니 이는 하늘의 이치를 더욱 기필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복선화음(福善禍淫 :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줌)에 더딘 것도 있고 빠른 것도 있다. 앞날에 자손이 창대(昌大)하여 문호(門戶)가 덕으로 하여 다시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늘의 이치는 기필할 수 있는 것이다. 불초(不肖)는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공(公)의 생시에 보고 들은 바 약간을 기록하여 자손된 자로 하여금 선조의 유업(遺業)과 공덕(功德)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이상과 같이 적는다.

--해는 기사(己巳 : ☞ 고종6년, 1869년)년 가을 7월 16일에 불초손 경례(慶禮 주2)는 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편집인 김재희(金在熙)/1996. 8.30》



☞의 연대는 옮긴이가 확인하여 기록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본 가보의 기록을 근거로 우선 옮긴이의 큰 형님이신 홍만 님께서 2003년 봄 “감곡면지편찬위원회”에 공산정 서정우 가옥은 우리 안동김문의 정인공께서 건립하셨다는 내용을 참고자료로 제공하였습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1) : 서정우 가옥

● 국가지정중요민속자료 제143호

● 소재지 :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585-3

● 시 대 : 조선후기

--서정우 가옥의 건축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안채의 상량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24년에 중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랑채는 안채가 중수될 당시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구성을 보면 일자형의 사랑채가 배치되고 사랑채 우측 끝부분에 행랑채를 덧대어 ㄱ자형을 이루고 이곳에 대문을 설치하였으며 안마당에 면해서 ㄱ자형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이 가옥의 전체 구성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의 평면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꺽어져서 정면 4칸 측면 2칸을 덧붙여 ㄱ자형을 이루는데 중부 방식으로 부엌 안방 웃방을 배열하고 꺾어져서 2칸의 대청과 전퇴가 달린 건너방을 두었다. 사랑채는 사랑방을 내세우고 대문간은 뒤의 측면으로 냈다. 이 가옥의 특징은 부엌 위로 함각을 만들어 그곳으로 연기가 빠지도록 까치구멍으로 한 점과 대문간을 사랑채 뒤의 측면으로 낸 점이다. 이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전축의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출전 : http://www.gamgok.or.kr/n_mun_3.php》



(주2) : 경례(慶禮)의 자는 운경(雲卿)인데 순묘 갑신(純廟 甲申 : 순조24년, 1824년) 8월 16일에 태어나 기사(己巳 : 고종6년, 1869년, ☞ 유복자(遺腹子)이다) 11월 16일에 졸(卒)하니 수(壽) 46이며, 묘는 원주 부론면 손곡(原州 富論面 蓀谷)에 있다. 배(配)는 청주한씨인데 기묘(己卯 : 순조19년, 1819년) 6월 24일에 태어나 을유(乙酉 : ☞ 고종22년, 1885년)3월 초4일에 졸(卒)하였다. 부는 치승(致昇)이요, 조(祖)는 광의(光義)이며, 증조(曾祖)는 세최(世最)요, 외조(外祖)는 재령 이후(載寧 李垕)이다. 3남을 길렀는데 맏이는 상하(相夏)요, 다음은 상직(相稷)이며, 다음은 상설(相卨)이다. 묘(墓)는 선영(先塋)아래 묘좌(卯坐)이다.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편집인 김재희(金在熙)/1996. 8.30》





▣ 김재원 - 감사합니다.연일 귀한자료 발굴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김태서 - 자료 발굴에 수고하셨습니다.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가보의 귀한 내용을 편히 보니 송구스럽고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태영 -

▣ 김주회 - 귀한 자료 잘 보고 있습니다. ---공산정 서정우 가옥은 우리 안동김문의 정인공께서 건립하셨다는 --- 내용 기억하겠습니다.

▣ 김은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