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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기문(涪溪記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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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11 01:32 조회2,0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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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涪溪)는 즉 종성(鐘城)의 다른 이름으로, 공이 광해 임자년(1612)에 귀양살이하였음.

김시양(金時讓) 찬

북쪽 지방은 바로 풍패(豊沛)주D-001의 땅인데, 요황(要荒)주D-02 밖에 있어서 풍속이 오랑캐와 다름없이 포악하였다.

선조(宣祖) 초년에 청련(靑蓮)이후백(李後白)이 관찰사로 있으면서 함흥(咸興)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을 짓고 문교(文敎)로 교도(敎導)를 하였다. 주현(州縣)의 백성들 중에 시서(詩書)를 외우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이 있으면 친히 그와 주객(主客)의 예(禮)를 차리니 사람들이 다 다투어 권면되므로,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성하여 신적(臣籍)에 이름이 적히고 조정에 등용된 자가 서로 뒤를 이었다.

임진년 난리에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시킴이 모두 유생(儒生)이라고 불리는 자들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이공(李公)과 같은 이야말로 참다운 관찰사라고 하겠다.

이청련(李靑蓮)은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그의 집에서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록 그 명망이 백집사(百執事)주D-003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혹 사사로이 부탁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끊어버리니, 인재를 아끼는 이들은 그런 처사를 대부분 병통으로 여겼다.

대부분 병통으로 여긴 것은 진실로 옳지만, 오직 돈이면 좋다고 하여 문 앞이 시장을 이루게 하는 자들과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현격한 것이다.

명종(明宗)이 어렸을 때에 정권이 동조(東朝)주D-004에 있었다. 권세를 잡은 간신들이 왕명을 절취(窃取)하였으니, 을사년의 옥사주D-005는 명종이 아는 바가 아니었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훙(薨)하니, 명종은 매우 심하게 애통해 하다가 조금 뒤에 탄식하기를,

“내가 어찌 통곡할 것인가. 을사년에 충성하고 어진 선비들이 죄없이 줄을 지어 죽는데도 내가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금지시키지 못하였느니, 내 집에 어찌 대대로 군왕(君王)이 있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위대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천년의 먼 후세에 이르기까지 신하와 백성들을 울게 할 만하구나.

미암(眉巖)유희춘(柳希春)은 을사사화 때 종성에서 귀양살이한 것이 19년 동안이나 되었다. 곤궁하게 살아가면서도 만 권이나 되는 서적을 독파(讀破)하고 《속몽구(續蒙求)》를 저술하여 선비들에게 혜택을 주니, 그에게 찾아가서 배우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북쪽 사람들이 지금까지 유정언(柳正言)이라고 하면서 칭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정언으로 와서 귀양살이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부인 또한 문장에 능하였는데, 홀로 만리길을 걸어서 미암을 종성에까지 따랐다. 그 부인은 마천령(蘑天嶺)을 지날 때에 시를 짓기를,

걷고 걸어서 드디어 마천령에 닿으니/行行遂至磨天嶺

끝없는 동해 바다 거울처럼 판판하구나/東海無涯鏡面平

만리길을 부인이 무슨 일로 왔던가/萬里婦人何事到

삼종(三從)주D-006의 의는 무겁고 일신은 가벼워서라네/三從義重一身輕

라고 하였으니,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암은 바둑을 잘 두었다. 참판 유경심(柳景深) 또한 바둑을 잘 둔다고 자부하였다. 미암이 종성에서 귀양살이할 때, 유경심은 원수(元帥)로서 행영(行營)에 주둔하고 있었다. 매번 빈객을 물리치고 사잇길로 달려와서 승부 내기를 하였으며, 간간이 글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한 달에 3~4회씩 오기만 하면 이틀밤을 묵었는데, 북쪽 사람들은 지금까지 훌륭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재(蘇齋)노수신(蘆守愼)이 진도(珍島)에 귀양살이할 때에 수령이 당시 재상들의 눈치를 살펴서 여러 모로 곤욕을 보여,

“죄인이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산군(山郡)에서 기장쌀을 사다가 공급하였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소재가 아이종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수령이 말하기를,

“죄인이 어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 종을 옥에 가두었다. 선조 때에 소재가 크게 등용되니, 그 사람은 드디어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쳤다.

나는 귀양살이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시사(時事)는 날로 더욱 심해져서 수령이 된 자는 모두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다. 식량의 공급이 항상 끊어지니 기장쌀인들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또한 세태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승지 강서(姜緖)는 의정(議政)사상(士尙)의 아들이다. 거짓 미친 체하고 술을 마시며 지내니, 사람들이 그를 매취(每醉)라고 불렀다. 그는 두 다리를 뻗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길가에 쓰러져 있으니, 어린 아이들이 희롱하기를,

“영공(令公)께서는 길에 눕지 마십시오. 옥관자(玉貫子)주D-007가 깨질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니, 강서는 말하기를,

“금관자(金貫子)로 바꾸면 되지.”

라고 하였다. 그때는 바야흐로 태평한 때였다.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이 하급 관료로 침체되어 있으니, 남들은 그를 뛰어난 인물로 생각지 않았다. 강서는 그를 볼 때마다 번번이 말하기를,

“국가에 큰 변란이 있으면 이 사람이 반드시 눈물 흘리며 담당할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은 다 웃더니, 임진년에 이르러 드디어 그 말이 맞았다.

승지 조인복(趙仁復)과 전한 김홍민(金弘敏)은 한때 함께 중한 명망이 있었다. 김 합천 창일(金陜川昌一 합천은 고을 이름으로 고을 원님을 나타내는 것)이 강서에게 묻기를,

“조인복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강서는 두 다리를 앞으로 뻗고 앉아서 대답하기를,

“나의 종이오.”

하였다.

“김홍민은 어떤 사람이오?”

하니, 꿇어 앉아서 말하기를,

“나의 스승이오.”

라고 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조인복이 그 본성을 잃고 일처리가 잘못되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상사(上舍)주D-008유극신(柳克新)의 자(字)는 여건(汝健)인데, 젊을 때에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진사 백진민(白振民)은 참의 유양(惟讓)의 아들인데, 유극신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그대와 유색신(柳色新)주D-009과는 몇 촌간인가?”

하니, 유극신이 그 말을 받아 곧 대답하기를,

“유색신은 가계(家系)가 위성이고 나는 가계가 문성(文城)이니, 자연 아무런 관계도 없네. 그런데 모르겠네만 백유가(白遊街)와 너의 아버지와는 몇 촌간인가?”

라고 하니, 백진민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몹시 웃었다. 여기서 백유가라는 것은 거리의 이름이다. 그런데 유(遊)와 유(惟), 양(讓)과 양(羊), 가(街)와 개[狗]는 속음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저작(著作)김성립(金誠立)의 아내는 허균(許筠)의 누나인데, 문장을 잘 지었다. 일찍 죽으니 허균이 그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제목을 《난설헌집(蘭雪軒集)》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에게 발문(跋文)을 받기까지 하여 그 전함을 빛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는 남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많다.’고 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종성으로 귀양오게 되어 《명시고취(明詩鼓吹)》를 구해 보니, 허씨의 시집 속에 있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눈에 떨치니 봄구름 따사롭고/瑤琴振雪春雲暖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 달이 차가워라/環珮鳴風夜月寒

라고 한 율시(律詩) 여덟 구절이 《고취(鼓吹)》에 실려 있는데, 바로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忠)의 작품이다.

나는 이에 비로소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작품을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이 이씨인 무인(武人)이 종성 판관(鍾城判官)으로 있다가 체직된 뒤에 병영(兵營)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의 누나가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몸종이 판관이 왔다고 알렸다. 그의 누나가 매우 기뻐하여 즉시 인도해 들어오게 하니, 의복이 평일과 같았다. 문에 들어와서는 말하기를,

“내가 먼저 가묘(家廟)에 배알해야 되겠습니다.”

고 하고, 바로 사당 앞에 이르러 꿇어앉더니 사라져 버렸다. 온 집안이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뒤에 들으니, 바로 그가 죽은 날이었다고 한다. 그의 누나는 바로 나의 벗 이직부(李直夫)의 종조고모(從祖姑母)로서 직부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직부의 이름은 경여(敬輿)이다.

김애헌(金艾軒)의 휘(諱)는 시헌(時獻)으로, 나의 종형(從兄)이다. 역학(易學)에 조예가 있어서 안목(眼目)이 한 세상에 높았다. 비록 역학을 안다는 이름이 있는 자일지라도 인정하는 일이 없었다.

신묘년에 병부랑(兵部郞)으로 대궐에 쇄직(鏁直)주D-010한 일이 있는데, 낭관 유극량(劉克良) 또한 위장(衛將)으로서 입직(入直)하고 있었다. 하룻밤에는 술자리를 벌이고 생대추를 먹으면서 서로 잔을 권하였다. 이어 이야기가 만물이 생식(生殖)하는 이치에 미치니, 유극량이 음양(陰陽)이 변화하는 오묘한 이치를 말하되 천지에 형체가 없는 물건에까지 도달하여 그 말이 무궁하였다. 애헌이 매우 놀라 탄복하였다. 취하여 그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었으므로 새벽에 일어나 가서 물으니, 유극량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취중의 미친 말을 깨고나니 기억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인인데, 어찌 역경(易經)의 이치를 알겠습니까?”

라고 하고는 끝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진란에 유극량은 임진(臨津)에서 전사하였는데, 애헌은 말년에 매양 그의 오묘한 뜻이 전해지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탄식해 마지않았다.



유공 극량(劉公克良)의 선조는 우리 마을 정아무개의 잃어버린 계집종이라고 한다. 유극량이 과거에 급제한 뒤에 정씨(鄭氏)를 찾아가니 정씨가 알지 못하고 방으로 맞아들이니, 유극량은 엎드린 채 감히 좌석에 오르지 않고 하인의 예를 행하였다. 정씨는 괴이하게 여겨 물어본 뒤에 비로소 그의 어짊을 알고 그를 위하여 그 사실을 세상에 숨겼다. 유극량은 비록 지위가 높아졌으나 여전히 옛 주인으로서 정씨를 섬겨 동네 어귀에 들어오면 반드시 걸어서 갔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다 어질게 여겼다. 이것으로 하여 유극량의 이름은 더욱 드러났으며, 벼슬은 병사(兵使)에 이르고, 마침내 나라를 위해서 죽으니, 충성스럽다고 할 만하다.

을사사화 때에 이기(李芑) ㆍ 윤원형(尹元衡) 등은 스스로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있다고 하여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고,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그때 사문(斯文) 유감(柳堪)은 이부 낭중(吏部郞中)으로 있었는데, 아전이 《무정보감》을 인쇄할 것을 청하니, 유감은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사람마다 인쇄해야 하겠느냐?”

고 하였는데. 드디어 죄를 받고 경흥(慶興)에 귀양살이를 17년 동안이나 하였다.

선조 초에 석방되어 돌아와서 돌아와서 장령이 되었다. 대사헌박공 응남(朴公應南)과 관청에서 만나니, 박응남이 말하기를,

“공은 북쪽에 귀양가 있은 지 여러 해이므로 마땅히 수령의 치적(治績)의 득실(得失)을 알 것이니, 누가 가장 극진하였소?”

아니, 유감이 말하기를,

“이언충(李彦忠)이 어사로 있을 때에 그 임무를 잘 살폈습니다.”

라고 하였다. 언충은 권간(權奸)의 앞잡이로 가장 공론(公論)에 죄를 얻은 자였다. 박응남은 조정에서 주장하기를,

“유아무개가 오랫 동안 곤궁한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본심을 상실하였습니다. 온정으로 돌봐준 은혜를 생각하여 감히 바르지 못한 사람을 칭찬하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박응남이 그때 바야흐로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유감의 벼슬이 드디어 떨치지 못하였다.



참찬 백인걸(白仁傑)은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으로서 창평 현령(昌平縣令)이 되었다.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서 드디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나무람을 듣게 되자, 감사 최보한(崔輔漢)이 파면시켰다. 그런데 최보한이 일찍이 백인걸에게 탄핵을 당했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보복이라고 말하였다.

인종(仁宗)총에 최보한은 국상(國喪) 때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고 하여 죄를 받고 파면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니, 최보한이 다시 채용되었다. 대간이 그를 탄핵하려고 하니, 백인걸이 그때 헌납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말하기를,

“최보한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것은 소문에서 나온 말이니,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군자는 너무 심한 처사를 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다시 사람을 태평 시대에 금고(禁錮)시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최보한이 드디어 탄핵을 면하였다.

최보한은 백인걸이 묵은 원한을 마음껏 갚을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백인걸이 태연하게 마음에 두지 않으니, 최보한은 매우 고맙게 여겼다.

밀계(密啓)주D-011로 사화(士禍)가 일어났을 때에 대간 중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많이 죽었다. 백인걸이 맨 먼저 법망에 걸렸으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최보한의 힘이었다.



참찬 백인걸은 허자(許磁)와 이웃 관계여서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허자가 별다른 맛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백인걸에게 나눠주곤 하였는데, 백인걸의 가난을 알았기 때문이다.

밀계가 처음으로 조정에 내려오니, 인심이 어수선 하였다. 대사헌 민제인(閔齊仁)과 대사간 김광준(金光準)이 원형(元衡)의 사주를 받고 종적이 비밀스러워 아침 저녁도 보전할 수 없었다.

허자가 백인걸을 초청하여 저녁밥을 함께 먹으면서 묻기를,

“내일 대간들이 밀계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인데, 그대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백인걸이 말하기를,

“이미 몸을 임금께 바쳤으니, 어찌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자가 여러 가지 말로 권유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백인걸이 끝내 듣지 않으니, 허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일 그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고 하였다. 백인걸이 작별하고 나가니, 허자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일은 그대는 군자가 되고, 나는 소인이 되는 날이 되겠네.”

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소인이 소인되는 것을 소인 또한 스스로 아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국사(國史)는 대부분이 다 그때에 득세(得勢)한 자가 편찬한 것이어서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많다. 그러니 그 말이 반드시 다 공정하지는 않으며, 야사(野史)는 금령(禁令)이 있고, 풍속 또한 입언(立言)주D-012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선현의 사업이 두드러지게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는 것이 있어도 겨우 수십 년을 지나서 사람들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게 되면 찾아볼 길이 없어진다.

정일두(鄭一蠹)는 백세의 유종(儒宗)으로서 상서롭지 못한 시대를 만나 멀리 귀양가서 죽으니, 후인들은 그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하다. 어떤 이는 종성(鍾城)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온성(穩城)이라고도 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이징옥(李澄玉)이 배반하니 종성 판관정종(鄭悰)이 그를 죽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종성의 《선생안(先生案)주D-013》을 상고하니, ‘정종’이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부사 정종(鄭種)이 부사로 온 것이 징옥이 배반하였다가 죽은 시기와 서로 맞는다. 아마 《야언》의 기록은 전해 들은 것에서 나온 것이고 처음부터 의거할만한 전고(典故)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부사를 잘못 판관이라고 하고, 정종(鄭種)을 정종(鄭悰)으로 잘못 전하였던 것이리라.

경원 부사(慶源府使) 송희미(宋希美)의 죽음을 《해동야언》에서는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의거하여 송흠(宋欽)이라 쓰고 있고, 《서북정록(西北征錄)》에서는 송희미로 쓰고 있다. 경원부의 《선생안》을 살펴보니, 희미라고 하였다. 흠(欽)과 희미(希美)는 속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전한 것이다. 성명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뒤에 내가 이도장(李道長)을 사위로 삼았는데, 그의 양모(養母)정씨(鄭氏)는 바로 정종(鄭鍾)의 후예였다. 징옥을 베어 죽인 공으로 녹훈(錄勳)되었고, 자손은 대대로 충의위(忠義衛)가 된다.

고 하였다

북경을 가는 사신이 강을 건널 때면 으레 어사(御史)가 금지 물품을 가진 것이 없는가를 수색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명종 때에 사문 김덕곤(金德鵾)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평사(評事)로서 어사 일을 겸임하였는데, 홀로 어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역관이 궁내의 물건이라고 칭탁하고 금지 물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빛이 없었다. 김덕곤이 강개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수색은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하고, 모두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 역관이 와서 호소하니, 궁중에서 모두 분하게 여겨 이를 갈았다. 사문 홍인경(洪仁慶)이 듣고 탄복하여 그를 천관랑(天官郞 이조의 낭관(郞官))으로 추천하니, 상이 몹시 성내어 이르기를,

“이처럼 미친 자를 누가 추천하는가?”

라고 하고, 홍인경을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김덕곤 또한 일찍 죽어서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



영평군(鈴平君)윤사분(尹士昐)은 정희대비(貞熹大妃 세조비 世祖妃)의 아우이다. 성종 때에 북경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는데, 참판 권경우(權景祐)가 서장관이 되었다. 사분이 대비의 세력을 믿고 재물을 탐한다는 비방을 들었다. 돌아와 의주에 도착하였을 때에 권공(權公)이 그 재물을 다 가져다가 상께 아뢰었다. 성종이 즉시 사분을 형리(刑吏)에게 내리고, 경우를 발탁하여 종관(從官)을 삼으니, 동조(東朝 정희대비)에서도 감히 그의 목숨을 구해주기를 요구하지 못하였다. 사분은 근심하다가 죽었다.

경우는 이때부터 날로 총애를 입었다. 윤씨(尹氏 연산(燕山)의 생모)가 폐위되어 사제(私第)에 거처하니, 경우가 상소하기를,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 어머니가 여염집에 섞여 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성종이 크게 성내어 그가 후일의 은혜를 바란다고 하여 국문하기를 명하였다. 경우가 사리를 들어서 항변(抗辯)하여 조금도 굴복하거나 동요함이 없으니, 상은 위엄을 거두었다.

연산이 폐후(廢后)를 복위시킬 적에 재상들의 논의를 수합하라고 명하였다. 포악한 위세로 살육을 자행하니, 사람들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는데,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만이 항론(抗論)하기를,

“폐비는 선대에 득죄하여 선왕의 유교(遺敎)가 영갑(令甲 법령)에 드러나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주D-014이나 견후(甄后)주D-015와는 같이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경전을 많이 인용하여 증명하되 논의가 매우 정당하니, 비록 연산의 포악으로도 죄를 줄 수가 없었다.

목사 정인인(鄭麟仁)이 연산 때 전한(典翰)으로 있을 적에 단오(端午)의 문첩시(門帖詩)를,

궁인이 승호(蠅虎)주D-016 잡기 한가히 일삼으니/宮人閑事捕蠅虎

옥 위에 한 점의 티끌인들 어찌 생길소냐/玉上那生一點瑕

라고 지었더니, 연산이 성내어 말하기를,

“인인은 내가 참소를 믿는다고 풍자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허백(虛白)홍귀달(洪貴達)이 아뢰기를,

“남의 신하된 자가 경계하는 말을 올리는 것은 옛날부터 이와 같았으니, 감히 풍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자, 연산은 거짓 놀라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라고 하고, 당상관에 승진시키도록 명하였다.

후일에 문신 시사(文臣試射)에서 정인인이 일등의 성적을 얻으니, 연산은 말하기를,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하였다.”

하고, 특별히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제수하였다. 얼마 안 되어 발이 희고 이마가 흰 말을 요구하여 얻지 못하였더니, 드디어 명을 거역한다 하고 베어 죽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하를 예우하여 일찍이 무죄한 자를 경솔히 죽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연산의 광포함으로도 함부로 주륙(誅戮)을 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제왕가(帝王家)의 법이라고 할 만하다.

성이 유씨(柳氏)인 관리가 있었다. 그가 종남산(終南山) 아래에 집에 샀는데, 홀연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루는 일찍 일어나니 벽에 종이 조각이 걸려 있었다. 가져다 보니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밤이 다하도록 천리길을 가니/終夜行千里

아득히 옛 땅은 비었네/蒼茫古地空

슬피 부르짖어도 일월은 없고/悲呼無日月

머리를 돌리니 피는 붉게 흘렀네/回首血流紅

그때부터 소란을 부림이 더욱 심하고, 자주 벽에 쓰기를,

“집 주인이 나가지 않으면 장차 큰 화가 있을 것이다.”

고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 그러자 귀신이 드디어 크게 날뛰어서 그 집에 들어와 사는 자는 번번히 죽곤 하여 드디어 폐가(廢家)가 되었다.

그런데 유씨는 이사한 뒤로 왕실과 잇달아 혼인하여 금관자 ㆍ 옥관자가 집에 가득하여 부귀의 성대함이 근고에 아직 그만한 집안이 없었으니, 아마 복록이 후한 집에는 귀신 또한 보호해 돕기 때문인가. 이는 필시 까닭이 있으리라. 유씨는 바로 광해의 폐비의 아버지 자신(自新)이었다.

황효건(黃孝健)이란 사람은 나의 벗 이사언(李思彦)의 사촌 매부인데, 소시적에 글을 잘 지었다.

하루는 그가 간 곳을 알 수가 없어서 집안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뜰에 고송(古松)이 있었는데 높이가 수십 척이었다. 해가 비추니 소나무 그림자가 땅에 깔렸는데 사람의 그림자가 있는 것 같았다. 쳐다보니 가지 위에 묶여 있었다. 집안 사람들이 매우 놀라 사다리를 놓고 끌어내리니, 좌우를 보며 말없이 붓을 찾아서 쓰기를,

하루살이 같은 신세가 하늘 □에 손이 되었으니/蜉蝣身世客天□

가시나무 숲속이 나의 고향이라네/荊棘叢中是我鄕

밝은 달빛 산에 가득하고 사람은 적적한데/明月滿山人寂寂

머리 돌리니 흐르는 눈물 견딜 수 없어라/不堪回首淚淋浪

라고 하였다. 두어 달 뒤에 다시 없어져 3일 동안을 찾지 못하였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남읍(南邑)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빈집이 성 남쪽에 있었다. 시험삼아 가서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책방(冊房)이 매우 견고하게 잠가져 있는데, 창틈으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문종이를 뚫고 엿보니, 그 속에 앉아서 조그만 등불 심지를 가지고 서적을 태우고 있었다. 매우 놀라서 문을 여니 누워서 말을 하지 못하더니, 하룻밤을 지나 죽었다고 한다.

사언이 소시적에 그 일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에게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사언의 이름은 이급(李伋)이다.

선조 때에 권공 덕여(權公德輿)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사문 이승양(李承楊)이 서장관이 되었다. 늙어서 위풍이 없었으므로 역관들이 그를 업신여기고 금지 물품을 많이 사서 요동(遼東)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의주 사람들이 수송을 곤란히 여겨 많이 서장관의 실수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여 그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이승양은 성내어 압록강 가에 닿았을 때에 일행의 물건을 모두 가져다가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권공(權公)이 말하기를,

“이미 싣고 왔으니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시오.”

라고 하였으나, 이승양이 듣지 않으니, 사람들은 다 그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때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의 호)가 질정관(質正官)주D-017으로 동행하였으므로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지금은 서장관이 서적을 칭탁하고 스스로 상인 노릇을 하여 비록 비방하는 물의는 듣지만,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처사야 하겠는가. 이는 이른바 허물을 보면 어짊을 안다주D-018는 것이다.



세조 때에 정승 김국광(金國光)은 장흥동(長興洞)에 집을 지었는데, 집이 크고 사치스럽다는 탄핵을 받고 다시는 정부(政府)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 집이 뒤에 심일송(沈一松 심희수(沈熹壽)의 호)의 집이 되었다. 내가 여러 번 일송을 뵈었는데, 그 집의 제작을 보니 매우 낮고 좁았다. 오늘날 권세 있는 사람의 집은 그 몇 배나 되는지 알 수도 없는데 사치스럽다고 말하지 않으니, 세상이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 한강 가에 별장을 지었는데, 당시에 그의 사치함을 대단히 말하였다. 안로의 조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이 정자를 즐겨 말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정승상(鄭丞相)은 그 곁에 정자를 지으니 제작의 사치함과 정원의 아름다움이 김안로의 정자보다 백배나 더하였는데도, 사람들은 나무라지 않으니, 아마 하류에는 모든 나쁜 것이 다 돌아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치하고 검소한 것이 세도(世道)의 더럽고 융성함에 따르는 것이어서 사람이 어길 수 없기 때문인가. 반드시 분변하는 자가 있으리라. 정씨는 즉 유길(惟吉)이다.



이암(頣庵) 송인(宋寅)은 중종 때의 부마(駙馬)주D-019이다. 문장에 능숙하고 예서(隸書)를 잘 써서 사류의 인정을 받았다.

일찍이 집을 팔고 이사를 하자 남들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송인은 말하기를,

“이 일은 매우 괴이하다. 매양 밤이 깊어서 인적이 고요하면 행랑채 사이에서 무슨 물건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집안 사람들이 몰래 엿보니 큰 뱀이 있어서 머리는 노루 머리 같고 길이는 두 길이 넘었는데, 사람 소리를 들으면 문득 달아나서 남쪽 계단에 이르러 사라지곤 하였다. 거기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돈 구멍만한 작은 구멍이 있는데, 미끄럽고 평이하여 길을 이루고 있었다. 파보니 깊이가 끝이 없어서 끝까지 파볼 수 없었다. 드디어 큰 돌을 쌓아놓았는데 두어 밤 뒤에는 그 괴물이 다시 나왔다. 날이 밝은 뒤에 그 구멍을 보면 전과 같고 큰 돌들은 다 전에 있던 자리에 돌아가 있어서 파낸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 매우 헤아릴 수 없으므로 드디어 집을 팔았다.”

하였다 한다. 판서 서성(徐渻)이 직접 이암에게서 듣고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기재(企齋)신광한(申光漢)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늙은 여자종의 손에서 길러졌다. 나이 18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글을 알지 못하였다. 이웃 아이와 냇물에서 장난하다가 이웃 아이가 공(公)을 발로 차서 물 속에 엎어지게 하였다. 공이 성내어 꾸짓기를,

“너는 종인데, 어찌 감히 공자(公子)를 업신여기느냐?”

라고 하니,

“그대처럼 글을 모르는 자도 공자란 말인가? 아마 무장공자(無膓公子 게[蟹]의 별명)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크게 부끄럽게 여겨 마음을 고쳐 먹고 글을 읽었는데, 문장이 물 솟아나듯 하였다. 다음해에 만리구(萬里鷗)라는 부(賦)를 지어 예위(禮圍)주D-020에서 장원하고, 얼마 안 가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을 맡은 것이 20년이나 되었다.



기재는 비록 문장에는 능했으나 실무(實務)의 재주는 없었다. 일찍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송(訴訟)이 가득 차 있었으나 판결을 내리지 못하여 죄수가 옥에 가득하니 옥이 좁아서 수용할 수가 없었다. 공이 옥사(獄舍)를 더 짓기를 청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판서를 바꾸는 것만 못하다. 어찌 옥사를 증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허자(許磁)로 대신시켰는데 허자가 당장에 다 처리하여 버리니, 옥이 드디어 비게 되었다고 한다.

충주(忠州) 사람 김개(金漑)는 부유하기로 온 나라 안에 이름이 드날렸다. 자주 음관(蔭官)에 추천되니, 중종이 비답하기를,

“김개가 비록 부자이기는 하나 어찌 자주자주 첫머리에 의망(擬望)되는가?”

하였다. 전관(銓官)이 매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 김개에게 특별히 별좌(別坐)를 제수하였으니, 중종의 누르고 치켜 올림이 이와 같았다.

지금은 재물이 없는 자는 비록 재주가 자기(子奇)주D-021같은 사람이라도 벼슬할 수 없다. 그러나 상하가 태연하여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진 장원 우(陣壯元宇)는 상상(上庠 상사(上舍)와 같음)에 있으면서 시정(時政)의 득실을 말하여 안로(安老)의 뜻을 거스렸더니, 국정(國政)을 비방한다고 하여 사형으로 논죄하였다. 이공 제윤(李公悌胤)은 바로 진우와 동년(同年)주D-022 벗이었다. 진우가 사형에 처해지게 되자, 태학에서 말하기를,

“오늘 진 장원이 죽는다. 우리 동년 중에 누가 나와 함께 가서 그를 전별하겠는가?”

하였으나, 다 호응하지 않았다. 이제윤은 홀로 한 병의 술을 갖고 가서 저자에서 진우를 대접하고 통곡하고 작별하였다. 유서애(柳西厓)가 그를 위하여 전(傳)을 지어서 아름답게 여겼다.

정언 채무일(蔡無逸)은 소시적에 기절(氣節)로 자부하였다.

안로는 즉 그의 고모부였다. 공이 여러 번 그의 과실을 말하니, 안로는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공이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명성이 있게 되니, 안로는 그가 대과에 급제하면 자기에게 방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공의 종형인 무택(無擇)에게 가서 공을 시험해 보게 하였다. 공은 깨닫지 못하고 묻는 대로 그 자리에서 외어 막히는 데가 없었다. 안로는 매우 미워하여 대간들을 사주(使嗾)하여 그를 진우(陣宇)의 일당으로 몰아서 벼슬길을 막아버렸다. 안로가 패망한 뒤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어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다 애석하게 여겼다.

기축년의 화주D-023에 대사간 이발(李潑)이 고문으로 죽으니, 친구 중에 감히 조문하는 자가 없었다. 부윤 허상(許鏛)만이 그 상(喪)을 주관하여 처리하면서 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일 또한 말세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부마 권규(權跬)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호)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권담(權聃)과 권총(權聰)이다. 권담은 나이 10여 세에 돈녕 직장(敦寧直長)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관아에 출사(出仕)하였는데, 지붕에 올라가 새새끼를 찾다가 도정(都正)이 갑자기 오니 미처 영접하지 못하였다. 도정이 성내어 불러다 뜰에 세워 놓고 힐책하였다. 권담이 즉시 들어가 호소하니, 태종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벼슬이 낮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정관(政官)을 불러 권담을 동지(同知)에 임명하였다. 영이 내렸을 때 관야에서는 아직 사무를 마치지 못하였다 도정이 매우 놀라 나가서 영접하였다.

권총은 어릴 때에 태종이 사랑하여 항상 무릎 위에 앉혔다. 시신(侍臣) 중에 수염이 긴 사람이 있었는데, 권담과 권총이 칼을 빼서 잘라버렸다. 여러 신하들이 그들을 죄주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조정의 예는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권총의 죄는 베어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니 그를 살려주는 것이 좋은지 공들의 의견을 따르겠다.”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니, 숭례문(崇禮門) 밖에 유폐(幽閉)시키도록 명하였다. 한 해 남짓하여 태종은 병이 위독하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문병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이미 심하여 의약(醫藥)으로 치료할 수 없다. 공들과 서로 보는 것이 몇 날이나 될는지.”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우니, 태종은 길게 한숨을 쉬며 이르기를,

“나는 손자 권총이 병중에 몹시 보고 싶으나 조정이 두려워 감히 보지 못한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한 세상을 마음대로 다룸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양(李樑)은 인순왕비(仁順王妃)의 외숙이었다. 명종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원형(元衡)을 미워하여 이양을 발탁해서 그이 권세를 나누고자 하였다. 이양이 그 세력을 믿고 전조(銓曹)에 들어가고자 하니, 이조 낭관 홍천민(洪天民)이 들어주지 않았다. 당상관 중에 이양을 돕는 자가 있어서 번번이 이르기를,

“낭관 홍천민이 홀로 관리 임명의 붓을 잡는 것이 수고롭지 않은가?”

라고 하여 은연중 이양을 전조에 끌어들여 줄 것을 권하였으나, 홍천민은 번번이 다른 사람을 추천하곤 하였다. 모든 전도의 추천을 받은 자를 상이 번번이 승진시키거나 배척하거나 하였으니, 대체로 상의 뜻은 이양에게 있었던 것이다.

판서 박호원(朴好元)이 새로 전적(典籍)에 오르고 홍천민이 박응(朴膺)을 추천하니, 상은 관서 지방이 흉년이 들어서 반드시 훌륭한 수령이 필요하다고 칭탁하고, 박응을 용강 현령(龍岡縣令)에 임명하였다. 홍천민이 또한 이양을 추천하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중서(中書)에 들이고자 하니, 판서 박대립(朴大立)이 사인(舍人)으로서 매우 힘써 막았다. 상이 드디어 차례를 뛰어넘어 이양을 응교(應敎)에 임명하였다.

고사(故事)에는 직제학만을 승지에 의망할 수 있고 종부시(宗簿寺)의 정(正)은 종사(宗師)의 자격으로, 보덕(輔德)은 춘방(春坊)의 장(長)이란 자격으로 아울러 승지에 의망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이양을 속히 중용(重用)하고자 하여 옥당의 동벽(東壁)주D-024과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아장(亞長)을 모두 승지에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이양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따라서 그것이 전례가 되어 지금까지도 따라서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종부시정과 보덕을 승지로 의망하는 것은 드디어 폐지되었다.



이양은 이조 판서가 된 뒤에 권리를 마음대로 부리며 스스로 방자하였다.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장원 급제로 뽑으니, 장석(張奭)의 비방이 있었다. 위협하여 정을 전랑(銓郞)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허엽(許曄)등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양은 대간을 사주하여 하루아침에 이문형(李文馨) ㆍ 박대립 ㆍ 박소립(朴素立) ㆍ 허엽 ㆍ 윤두수(尹斗壽) 등 8인을 내쫒고, 정빈이 드디어 전조에 들어가니, 조야(朝野)가 미워하여 흘겨보았다.

마침내 비(妃)의 아우 심의겸(沈義謙)으로 인하여 축출되어 강계에 귀양갔다가 병들어 죽었다.

홍공 담(洪公曇)이 병조 판서에 임명되니, 대사헌 조사수(趙士秀)가 대간에게 말하기를.

“홍담은 나의 마음으로 사귀는 벗입니다. 그러나 홍담의 재주는 이서(吏書)에는 우수하지만 병정(兵政)을 주관하는 데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찌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계달하여 바꾸게 하였다. 그리고는 곧장 가서 홍담을 보고 말하기를,

“이 일이 그대의 뜻에 어떤가?”

하니, 홍담은 말하기를,

“내가 병조 판서에 임명된 것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남모르는 근심이 많았으나, 그대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으므로, 믿고서 근심이 없었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조사수의 사정을 둠이 없음을 탄복하고, 홍담의 자신을 아는 것을 장하게 여겼다. 조종조의 공경(公卿)들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잘 다스려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성안공(成安公)상진(尙震)은 검열(檢閱)에서 파직되어 돌아가는 길에 금천(衿川)의 언덕 위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어떤 노인이 두 마리 소를 먹이고 있으므로 공이 물었다.

“두 마리 중에 어떤 소가 더 좋은가?”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세 번 물어도 끝내 대답이 없으므로, 공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말에 올랐을 때에 노인이 수십 보를 뒤따라와서 비밀히 공에게 대답하기를,

“아까 묻는 것을 즉시 대답해 올리지 못한 것은 두 소가 노역(勞役)에 종사한 지가 여러 해가 되어 차마 하나를 지적하여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작은 소가 더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말에서 내려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숨은 군자(君子)이십니다. 나에게 처세법(處世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드디어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처음 벼슬에 나간 때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남에게 거스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영상 상진의 시호가 성안이다.

을사사화 때에 밀계가 내려지니, 양사(兩司)가 중학(中學)에서 회의하였다.

임구령(林九齡)은 임백령(林百齡)의 아우였는데, 윤돈인(尹敦仁)과 함께 누각 아래에 잠복하고 있었다.

장령 정희등(鄭希登), 사간 박광우(朴光祐), 정언 김난상(金鸞詳), 지평 김저(金䃴), 집의 송희규(宋希奎), 정언 유희춘(柳希春), 장령 이언침(李彦忱), 헌납 백인걸(白仁傑) 등이 크게 그 잘못을 말하고 있었다.

구령이 즉시 궁궐에 나아가 고변하니, 옥사가 드디어 일어났다. 옥사가 일어나서 구령은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선조가 그 녹훈을 삭제하였다.

교리 윤결(尹潔)은 능성위(綾城尉) 구사안(具思顔)과 총죽(葱竹)주D-025의 교우(交友)였다.

안명세(安名世)를 죽게 한 데는 구사안이 유력하였다. 그것을 윤결은 마음으로 원통하게 여겼다. 하루는 구사안과 함께 남산 잠두(蠶頭)에서 술을 마시다가 묻기를,

“명세는 무슨 죄로 죽었는가?”

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삼월 장안에 온갖 풀 향기롭고/三月長安百草香

한강의 흐르는 물은 넘실대는구나/漢江流水正洋洋

성대의 무궁한 뜻을 알고자 하거든/欲知聖代無窮意

왕손의 춤추는 소매 긴 것을 보라/看取王孫舞柚長

라고 하였다. 사안이 대궐에 들어가 아뢰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매우 성내어 윤결을 기시(棄市)주D-026하라고 명하였다.

윤결이 죄수로 끌려가는데 길에서 사안을 만났다. 윤결이 부르짖기를,

“구군(具君) 이것이 정말 무슨 일인가?”

하니, 사안은 말에 채찍을 쳐서 급히 피해가려다가 말이 놀라는 바람에 떨어져 즉사하였다. 사안은 무함하면서 스스로 용한 꾀라고 하였을 것이니, 어찌 윤결보다도 먼저 죽을 것을 알았겠는가?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사람은 두렵지 않더라도 하늘은 두렵지 않느냐?”

라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러하구나.

판서 이시언(李時彦)은 일찍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삼화 현령(三和縣令)으로 있을 때에 생선국을 먹으면서 품관(品官)에게 한 그릇을 나누어 주었더니, 품관은 상을 찌푸리고 먹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난처해 하는 빛이 있었다. 굳이 물었더니 드디어 울면서 말하기를, ‘저의 아버지가 병든 지 여러 해 만에 살빛이 바뀌어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항상 바닷물에 목욕하기를 원하였으나 자녀들이 안된다고 하였더니, 울면서 간청하기를, 만약 바다에 목욕을 한다면 나의 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바다로 이끌고 가니, 아버지는 옷을 벗으면서 기뻐하는 빛이 있었습니다. 물에 들어가 헤엄치더니 조금 뒤에 물고기로 변하여 어릿어릿 하다가 마침내 유유히 가버렸으므로 자녀들은 통곡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감히 물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사문 홍순각(洪純慤) 또한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진주 교수(晋州敎授)로 있을 때에, 진주성에서도 이와 같은 이변(異變)이 있었다.”

한다. 이것은 무슨 이치일까. 사물에 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혹 알고 있으리라.



남이(南怡)라는 이는 의산위(宜山尉)남휘(南輝)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었다. 근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세조 때에 공이 있어서 차례를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예종(睿宗)은 그를 매우 꺼렸다. 어떤 사람이 그가 공주(公主)와 증(烝)하였다주D-027고 고하여 하옥시키고, 이어 모반으로 다스려 죽였다. 바야흐로 남이가 국문을 받게 될 때에 강순(康純)이 영상으로 참여하였다. 남이가 강순이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말하니, 강순은 말하기를,

“신은 본래 편호(編戶)주D-028로서 성상을 만나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사온데, 또 무엇을 얻고자 하여 남이의 음모에 가담하였겠습니까?”

라고 하니, 예종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이가 다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그의 간사한 말을 믿고 사면하신다면 어떻게 죄인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예종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강순은 나이가 이미 80으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하여 남이와 같이 참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부르짖기를,

“남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무함하느냐?”

하니, 남이가

“원통한 것은 나도 너와 같다. 네가 영상으로 나의 원통함을 알고도 한 마디 원해 주는 말이 없으니, 너도 원통하게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하매, 강순은 묵묵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고변한 자와 추관(推官)은 다 녹훈되어 자손들이 그 이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남이가 죽임을 받은 일은 지금까지도 그 진위(眞僞)를 분변할 수 없다.

v 익평공(翼平公)권남(權㩜)에게 딸이 있어서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구혼(求婚)하였다. 익평이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죄를 입고 죽을 것이니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익평은 자기 딸의 수명(壽命)을 점치게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 분은 수명이 지극히 짧고 또 아들도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 복은 함께 누릴 것이고, 그 화(禍)는 보지 않을 것이니, 사위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자, 익평은 그 말대로 하였다. 남이는 나이 17세에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지극히 임금의 총애를 입었으며, 28세에 병조 판서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딸은 이미 죽은 지 몇 해나 되었다.

서울 안에 홍계관리(洪繼寬里)가 있으니, 즉 국초(國初)의 맹인(盲人) 점장이 홍계관이 살던 마을이다. 계관이 점 잘 치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므로 그대로 마을의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한다.

인산군(仁山君)홍윤성(洪允成)은 호서(湖西) 사람으로 젊을 때에 뜻은 컸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 향해(鄕解 향시 鄕試)에 합격하여 서울에 들어왔다가 계관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다. 계관이 그의 운명을 꽤 오랫 동안 점치더니, 꿇어앉아 공경히 말하기를,

“공은 남의 신하로서 더할 수 없이 귀하게 될 운명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어느 해 어느 때에 공께서는 반드시 형조 판서가 될 것입니다. 그때 저의 아들이 반드시 죄를 받고 옥에 갇혀 마땅히 죽게 될 것입니다. 부디 공께서는 나를 생각하여 살려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어 그의 아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기 어느 때에 옥에 갇혀 심문을 받게 되거든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말만 하여라.”

고 하였다. 공은 깜짝 놀라 감히 승낙하지 못하였다.

그 뒤 10년이 못되어서 공은 세조를 추대한 공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큰 옥사를 국문하는데, 한 죄수가 부르짖기를,

“죄수는 맹인 점장이 홍계관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드디어 깨닫고 놓아주었다고 한다.

김안로(金安老)는 정권을 마음대로 행하니 온 조정이 근심하였다. 참판 윤안인(尹安仁)은 곧 문정왕비(文定王妃)의 종부(從父)로, 비밀히 안로를 제거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밀히 왕비에게 아뢰기를,

“안로가 왕비께 불리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왕비가 매우 두려워하여 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니, 상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대답하기를,

“오래도록 좌우에서 모시다가 지금 폐위당할 것이므로 슬퍼합니다.”

하였다. 상이 매우 놀라서 그 까닭을 물으니, 안로의 음모를 아뢰었다.

상이 매우 성내어 즉시 안로를 베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권세가 중한 것을 두려워하여 밀지(密旨)를 안인에게 주어서 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안인이 새벽에 대사헌 양연(梁淵)의 집에 가니, 빈객이 좌석에 가득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아침에 또 가고 저녁에 또 가니, 양연이 비로소 의아하게 생각하고 빈객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려서 침실(寢室)로 인도해 들였다. 안인이 밀지를 보이니, 양연이 즉시 동료들을 거느리고 논핵하였다. 상이 선전관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서 그의 집을 포위하고 체포하여 배소(配所)로 압송(押送)하게 하였다. 갈원(葛院)에 이르렀을 때에 사사(賜死)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안로를 총애하여 그의 집에 사소한 예식(禮式)만 있어도 반드시 선온(宣醞)주D-029하였는데, 이날은 안로의 아들 김지(金禔)를 장가보내려고 하여 빈객이 집에 가득하였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내온(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이 내려오지 않으매, 안로가 마음으로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갑자기 금부도사가 닥치니, 빈객들은 창황히 담을 넘어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안로가 포박되면서 김지에게 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을 당하여 남이 누가 우리와 혼인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안로가 젊었을 때에 중국의 점장이에게 운명을 점치게 하니, 점장이가 써서 주기를,

“더할 수 없는 부귀를 누리겠으나 갈(葛)에서 죽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뜻을 알 수 없었는데, 갈원에 이르러 마침내 징험하게 되었다.

명(名)이란 것은 실(實)의 손[賓]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거의 다 손을 귀하게 여기고 실을 천하게 여긴다. 이제 사람이 한 개의 옛 그릇을 얻으면 반드시 굳이 어느 시대의 물건이라고 이름을 붙인 뒤에야 남들이 다 그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비록 기와처럼 천한 물건이라도 아름다운 구슬과 동등하게 여긴다. 이제 모래와 돌도 다 혼돈(混沌)의 태초(太初)주D-030에 형체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이 그림을 취하는 것은 그것이 실물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괴이하게 생긴 소나무와 이상한 대나무나, 기이한 꽃, 오묘한 풀로 세상에 드문 것도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비록 부러지거나 썩어도 애석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물건들을 잘 그린 것이 있으면 반드시 열 겹으로 싸서 지극한 보물로 여기고, 혹 훼상하는 일이 있으면 애석해하기를 큰 구슬에 비할 정도가 아니다. 어찌 그 진짜를 사랑하기를 도리어 유사한 것보다도 못하는가. 천하의 일에 이와 비슷한 것이 매우 많으니, 나는 그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는 진옥(眞玉)이 지극히 적어 비록 황금일지라도 등급이 진옥에 가까울 수는 없다. 오직 모래로 갈아서 만든 것이라야 세상에서 진옥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아직 진옥일 수는 없다. 다만 옥돌의 정순(精純)한 것만이 진옥이며, 모름지기 정주(定州)의 자석(磁石)의 가시가 상처를 낼 수 없는 것이라야 바로 진옥이라고 한다.”

하였다. 후대의 노옥공(老玉工)에게 물어도 그것이 정말 그런지를 알지 못하니, 옥을 알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지금 정옥(頂玉)주D-031한 자는 무려 천으로 셀 만큼 많은데, 모두들 말하기를,

“나의 옥은 따뜻하고 윤택하니 바로 진옥이다.”

라고 한다. 아, 그것이 진정 좋은 옥일까. 아니면 진정 옥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당(唐) 나라 누사덕(婁師德)의 아우 후덕(厚德)이 말하기를,

“남이 자기 얼굴에 침을 뱉으면 닦을 뿐이다.”

고 하니, 사덕이 근심스런 빛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나를 근심스럽게 하는 것이다. 남이 너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너에게 성낸 것이다. 그런데 네가 그것을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려서 그 성냄을 더하게 할 것이다. 닦지 않고 저절로 마르게 하면서 받아야 한다.”

그의 말을 보니 여름에 들에서 일하는 것보다도 더 힘들어 보이는 것이진만년(陳萬年)주D-032이 아첨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심하다. 군자의 처세하는 길이 과연 이와 같은 것일까. 남이 얼굴에 침을 뱉으면 반드시 닦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그런데 침을 뱉어도 저절로 마르게 한다는 것이 과연 도리이겠는가. 이와 같이 하기를 말지 않는다면 반드시 아첨하여 남의 치질(痔疾)을 핥아주고 남의 종기를 빨아주는 데 이르고야 말것이다. 이는 사덕이 무씨(武氏)의 조정에서 부귀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적인걸(狄仁傑)이 무후(武后)의 주조(周朝)주D-033에 힘써 벼슬하여 심기(心機)를 다한 것은 부귀를 위한 계책에 불과한데도 군자들이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은 중종(中宗)을 태자(太子)로 복위시키기를 청한 일과 장간지(張柬之)를 천거한 한 가지 일 때문이다.

중종의 복위는 두 장(張)씨주D-034의 자신을 도모하는 계책에 근본한 것으로서 길욱(吉頊)주D-35의 한 마디 말에서 결정된 것이고, 처음부터 인걸의 간언(諫言)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또 이때에 장간지의 나이는 이미 80이었다. 인걸이 어찌 무후의 죽음이 반드시 간지의 앞에 있어서 취일지공(取日之功)주D-036을 기필할 수 있음을 미리 알았겠는가. 아, 이것이 노씨(盧氏)가 벼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일찍이 《조남명집(曹南冥集)》을 보니, 문인(門人)진극경(陳克敬)의 기(記)가 있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허봉(許篈)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니,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소미성(少微星)주D-037이 광채가 없으니 동방에 마땅히 은자(隱者)의 죽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허봉이 돌아오니, 선생이 이미 죽었다.”

라고 하였다. 말의 근거 없음이 끝내 이에 이르렀는가. 남명의 죽음은 임신년(선조 5, 1571)에 있었다. 허공(許公)은 이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그가 북경에 간 것은 갑술년으로서 남명의 죽은 지 이미 3년이 지난 뒤이다. 극경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책을 간행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사람은 필시 감히 이상한 이야기 만드는 것을 기탄없이 하는 자일 것이다. 우리 나라처럼 작은 나라의 일절(一節)의 선비로서도 성상(星象)을 움직일 수 있다면 하늘은 고단하겠다.

박원종(朴元宗) ㆍ 성희안(成希顔) ㆍ 유순정(柳順汀) 등이 정난(靖難) 뒤에 서로 이어 정사를 보좌하니, 세상에서는 3대신(大臣)이라고 일컫는다.

중종은 그들을 상례(常例)와 달리 예우하였다. 그들이 조정에서 물러갈 적에는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뒤에야 자리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3대신은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희안이 늙고 병들어서 하루는 궁중에서 물러나오는데, 의젓하게 걸어서 매우 태연스러운 모습으로 중문(中門)에 이르니, 문검(門檢)이 말하기를,

“상공(相公)께서는 상이 서 계신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어찌 그리도 걷는 것이 더디십니까?”

라고 하였다. 희안은 얼굴에 땀을 가득히 흘리면서 말하기를,

“늙은 사람이 죽을 바를 알지 못하겠소.”

라고 하였다.

옛날 곽씨(藿氏)의 화(禍)는 참승(驂乘)주D-038에서 싹텄던 것이다. 남의 신하로서 임금이 두려워할 만큼 권위(權威)를 가지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보전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런데 이 3대신은 다 천명대로 살다가 죽었으니, 우리 중종은 지극한 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산(燕山)이 들에서 사냥하는데, 그때 중종은 진산대군(晋山大君)으로서 호종(扈從)하였다. 사냥이 끝나자 연산은 준마(駿馬)를 타고 중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가고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가는데, 뒤에 온 자는 마땅히 군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중종이 매우 두려워하니, 영산군(寧山君)이 비밀히 중종에게 아뢰기를,

“근심할 것 없습니다. 나의 말이 승마(乘馬)보다 매우 날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미복(微服) 차림으로 말고삐를 잡고 좇으니 그 달리는 것이 나는 듯하였다. 궐문(闕門)에 이르고 난 조금 뒤에 연산이 뒤따라 도착하였으므로 중종은 마침내 화를 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영산군과 말은 다 중종을 위해서 때를 맞추어 나왔다’고 하였다. 영산군은 바로 중종의 서형(庶兄)이다. 세상의 칭찬을 받았는데 이옹(李顒)의 옥사에 연루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해를 입었다.

판윤 기대항(奇大恒)이 부제학으로 있을 적에 청양군(靑陽君)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이양(李墚)을 탄핵하자고 비밀히 약속하였다. 그때 아계(鵝溪)이산해(李山海)는 나이 25세로 정자(正字)로서 입직하여 차자(箚子) 쓰는 일을 담당하였다. 산해가 매우 두려워하여 손이 떨려서 글자를 쓰지 못하니, 대항이 웃으며 말하기를,

“정자는 나이가 어려서 겁을 내는군.”

하였다.

제봉(霽峯)고경명(高敬命)은 교리로 있었는데, 즉 이양의 일당인 맹영(孟英)의 아들이었다. 드디어 말하기를,

“이것은 공론이니 내가 사사로움으로 피할 수 없다.”

하고, 붓을 휘둘러 쓰면서 조금도 난처해 하는 빛이 없었다. 이양은 이미 귀양갔고, 맹영은 다만 벼슬에서 추방되어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다 경명이 차자를 쓴 효과라고 한다. 그러나 여론이 다 그를 나쁘게 평가하여 제봉 또한 20년 동안 폐고(廢錮)되었다. 율곡(栗谷)이이(李珥)가 항상 그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더니 그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게 되었을 때에 불러서 종사관(從事官)을 삼으매, 드디어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현관(顯官)의 길에는 통하지 못하였다. 이양의 아들 정빈(廷賓)이 과거에 급제하니, 이양의 집에 출입하는 자들이 다 바삐 뛰어다녔다. 그때 떠도는 말에, 제봉이 정빈을 위하여 신발을 벗겨주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맑은 논의가 그것을 병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임진년의 난에 제봉은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자격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과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그의 아들 종후(從厚)와 함께 전사하게 되자, 조정에서 그의 충성을 표창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이조 판서를 추증(追贈)하고 그 자손을 녹용(綠用)하니, 이에 사론(士論)이 일제히 그의 옛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았다. 그의 문도(門徒)들이 서원(書院)을 세우고 사액(賜額)주D-039을 청하기까지 하니,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아계이산해는 4세에 능히 글을 읽고, 5~6세에 능히 시를 짓고 병풍과 족자(簇子)에 글씨를 쓰니, 이름이 서울 안에 떨쳤다.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는데, 매우 청렴하고 근신하여 당시의 명성을 얻었다. 재상 자리에 오른 뒤에는 벼슬을 잃을까 근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공량(公諒)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김빈(金嬪)의 아우이다. 김빈은 임금의 총애를 받음이 후궁 중에 으뜸이었다. 산해는 공량을 종처럼 섬겨 자기의 지위를 굳혔다. 어두운 밤에 찾아다니며 애걸하되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일도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청의(淸議)에 죄를 얻었다.

임진왜란에 이산해는 영상으로 서쪽으로 거둥할 계책을 건의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한 다음 공론(公論)에 따라 그를 평해(平海)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임금의 총애는 줄어들지 않았다. 을미년에 정승 정탁(鄭琢)이 그를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임금의 뜻을 영합(迎合)한 것이리라. 이산해는 다시 조정에 들어오기를 바랐는데, 그 때 유서애(柳西厓)가 국정을 맡고 있으면서 그것을 저지하니, 이산해가 원망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쳤다. 그의 무리와 함께 제거하기를 꾀하여 무술년에 드디어 서애를 축출하고 자신이 그 대신 정승이 되었다. 조정을 어지럽히니, 상이 깨닫고 문밖으로 내치라고 명하여 10년 동안 부르지 않았다.

《동파평사(東坡評史)》에 말하기를,

“《사기(史記)》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경공(景公) 때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의 사적이 매우 위대한데, 《좌씨전(左氏傳)》에는 실려있지 않으므로 나는 일찍이 의아하게 여겼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사마양저는 장수가 아니라 정치를 한 사람이다. 민왕(閔王)이 그를 죽였으니, 경공 때와는 거리가 멀다. 태사공(太史公)이 《전국책》의 글을 취하여 《사기》를 지었으니, 마땅히 《전국책》으로 진실을 삼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동파의 전문(傳聞)은 진실로 작은 나라 사람의 좁은 견문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극(李克)이 오기(吳起)를 위 문후(魏文侯)에게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것은 비록 사마양저라도 이보다 못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전화(田和)가 제후가 된 것은 문후의 청에 인한 것이고, 민왕은 곧 전화의 4대손이니, 문후의 때와는 거리가 거의 백년이 되는데, 이극이 어떻게 후세에 양저가 있을 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하였겠는가,

나의 의견으로는, 장가(莊賈)를 벤 양저는 바로 경공 때 사람이다. 그리고 민왕 때에도 정치를 한 양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두 사람의 성명이 동일하였을 뿐이다. 옛사람의 일을 논평하는 사람은 취사(取捨)할 수 있을 것이다.

서달성(徐達城 달성은 거정(居正)의 봉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차례로 중국 사신의 우열를 열거하였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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