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청주경씨와 고려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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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5-13 01:47 조회1,973회 댓글0건본문
경씨(慶氏)의 유래와 본관
경씨는 중국 하내(河內)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현존하는 관향은 청주(淸州) 뿐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경씨의 본관(本貫)은 청주 외에도 청풍(淸風)· 평택(平澤)·
남원(南原)· 부안(扶安)· 보성(寶城)· 장수(長水) 둥을 비롯하여 14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경씨는 역사상 주로 고려와 조선 전기에 성세를 보인 씨족으로서, 시조로 전하는 경진(慶珍)이
고려 명종 때 정2품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이 유명한 경대승(慶大升)이다.
경진의 후손 경번(慶蕃)이 고려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후 청주에 세거한 후, 후손들이
번(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청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2,418가구에 10,0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시대 경씨 삼대인물
경사만(慶斯萬)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좌시중(左侍中) 복흥(復興)의 아버지이다.
성품이 소박하였으나 명덕태후(明德太后:충숙왕의 비)의 조카딸에게 장가들어 궁중에 자주 드나들며
왕과 가까워지면서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들었다.
1321년(충숙왕 8)에 좌부대언이 되고, 1324년에 우대언이 되었다. 충숙왕이 참소를 받아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호군 김인연(金仁沇) 등과 왕의 환국을 요청했는데, 이것으로 심왕 고(瀋王暠)일파의
미움을 받아 순군에 갇히기도 했다.
또,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본국에서 왕에게 보내는 전재(錢財)의 수송을 관리했다.
마니산 참성(塹城)에서 초제(醮祭)를 지내는데 하늘에서 “경대언(慶代言)은 불행히 단명하리라.”
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
경복흥(慶復興)
?∼1380(우왕 6). 고려의 재상. 본관은 청주. 초명은 천흥(千興). 아버지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이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감찰·장령이 되었고, 1354년(공민왕 3)에는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1356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다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문하정사
(知門下政事)를 거쳐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에 올랐다.
이때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북방의 정세도 불안정하여 도성수축(都城修築)의 논의가 일어나자,
정세운(鄭世雲)·유숙(柳淑) 등과 더불어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중지하게 했다.
1358년에 참지문하정사가 되었으며, 뒤이어 참지정사로서 서경군민만호부만호(西京軍民萬戶府萬戶)를
겸하고, 다시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 북방을 방어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앞서 기철(奇轍) 등 부원파(附元派)일당을 숙청한 공로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이해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원수가 되었다가 뒤이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주(安州)에 진을
쳤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했으나,
“장략(將略)이 없는 사람을 장수로 삼은 것은 등용한 사람의 잘못이다.”라는 홍언박(洪彦博)의
두둔으로 무사했다.
이듬해,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뒤이어
평장사(平章事)·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복주(福州:지금의 安東)로 난을 피했다.
1363년 12월,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참소하여 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워서
요양(遼陽)의 군사로써 호송하게 되자,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다.
또 그해 홍건적을 격퇴한 공과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최유가 군사 1만으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고 다시
선주(宣州:지금의 宣川)에 이르렀으나,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들을 정주(定州)의
달천(#달11川)에서 무찔렀다고 하는 첩보를 알리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좌시중(左侍中)에 임명했다.
1365년에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그때는 신돈(辛旽)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
(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안우경(安遇慶)·김원명(金元命)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興州)로 귀양가고 그 집은 적몰(籍沒)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에 제배되고, 정방(政房)의 제조(提調)를 겸하며
전선(銓選)을 맡았다.
1374년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공민왕이 시해되자 종친을 세우려 했으나 이인임(李仁任)의 주장에
의해 우왕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이인임과 함께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는 정도전(鄭道傳)을 귀양보냈다.
또, 왕이 서연(書筵)을 게을리 하려는 것과 전주(銓注:人事行政)의 문란을 바로잡는 데 노력했다.
1377년(우왕 3)에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서 개성 근처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했다.
1380년에는 이인임·지윤(池奫) 등과 뜻이 맞지 않아 날마다 술만 마시면서 도당(都堂)에도 참여하지
않자, 이를 미워한 이인임·임견미 등의 참소로 청주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아들로 보(補)·진(臻)·의(儀)가 있다.
경의(慶儀)
?∼1395(태조 4). 고려·조선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대승(大升)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복흥(復興)이다.
1377년(우왕 3)4월 밀직부사로서 서경도순문사 겸 서북면부원수(西京都巡問使兼西北面副元帥)가 되고,
1388년 4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휘하에서 계림원수(鷄林元帥)로서 요동정벌에
출정하기도 하였다.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李成桂)의 집권과정에서 일시 소외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4월 전원주등처병마절제사(前原州等處兵馬節制使)로서 무진회군공신
(戊辰回軍功臣)에 녹훈되었다.
1392년(태조 1)6월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남경(南京)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으며,
1393년 7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회군이등공신(回軍二等功臣)에 녹훈되고, 같은해
12월 하정사로서 요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뒤 외직으로 나아가 서북면병마도절제사(西北面兵馬都節制使)로 평양윤(平壤尹)을 겸하였다.
시호는 순절(順節)이다.
▣ 김태영 -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경씨는 중국 하내(河內)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현존하는 관향은 청주(淸州) 뿐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경씨의 본관(本貫)은 청주 외에도 청풍(淸風)· 평택(平澤)·
남원(南原)· 부안(扶安)· 보성(寶城)· 장수(長水) 둥을 비롯하여 14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경씨는 역사상 주로 고려와 조선 전기에 성세를 보인 씨족으로서, 시조로 전하는 경진(慶珍)이
고려 명종 때 정2품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이 유명한 경대승(慶大升)이다.
경진의 후손 경번(慶蕃)이 고려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후 청주에 세거한 후, 후손들이
번(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청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2,418가구에 10,0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시대 경씨 삼대인물
경사만(慶斯萬)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좌시중(左侍中) 복흥(復興)의 아버지이다.
성품이 소박하였으나 명덕태후(明德太后:충숙왕의 비)의 조카딸에게 장가들어 궁중에 자주 드나들며
왕과 가까워지면서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들었다.
1321년(충숙왕 8)에 좌부대언이 되고, 1324년에 우대언이 되었다. 충숙왕이 참소를 받아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호군 김인연(金仁沇) 등과 왕의 환국을 요청했는데, 이것으로 심왕 고(瀋王暠)일파의
미움을 받아 순군에 갇히기도 했다.
또,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본국에서 왕에게 보내는 전재(錢財)의 수송을 관리했다.
마니산 참성(塹城)에서 초제(醮祭)를 지내는데 하늘에서 “경대언(慶代言)은 불행히 단명하리라.”
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
경복흥(慶復興)
?∼1380(우왕 6). 고려의 재상. 본관은 청주. 초명은 천흥(千興). 아버지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이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감찰·장령이 되었고, 1354년(공민왕 3)에는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1356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다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문하정사
(知門下政事)를 거쳐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에 올랐다.
이때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북방의 정세도 불안정하여 도성수축(都城修築)의 논의가 일어나자,
정세운(鄭世雲)·유숙(柳淑) 등과 더불어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중지하게 했다.
1358년에 참지문하정사가 되었으며, 뒤이어 참지정사로서 서경군민만호부만호(西京軍民萬戶府萬戶)를
겸하고, 다시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 북방을 방어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앞서 기철(奇轍) 등 부원파(附元派)일당을 숙청한 공로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이해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원수가 되었다가 뒤이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주(安州)에 진을
쳤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했으나,
“장략(將略)이 없는 사람을 장수로 삼은 것은 등용한 사람의 잘못이다.”라는 홍언박(洪彦博)의
두둔으로 무사했다.
이듬해,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뒤이어
평장사(平章事)·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복주(福州:지금의 安東)로 난을 피했다.
1363년 12월,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참소하여 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워서
요양(遼陽)의 군사로써 호송하게 되자,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다.
또 그해 홍건적을 격퇴한 공과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최유가 군사 1만으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고 다시
선주(宣州:지금의 宣川)에 이르렀으나,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들을 정주(定州)의
달천(#달11川)에서 무찔렀다고 하는 첩보를 알리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좌시중(左侍中)에 임명했다.
1365년에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그때는 신돈(辛旽)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
(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안우경(安遇慶)·김원명(金元命)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興州)로 귀양가고 그 집은 적몰(籍沒)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에 제배되고, 정방(政房)의 제조(提調)를 겸하며
전선(銓選)을 맡았다.
1374년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공민왕이 시해되자 종친을 세우려 했으나 이인임(李仁任)의 주장에
의해 우왕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이인임과 함께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는 정도전(鄭道傳)을 귀양보냈다.
또, 왕이 서연(書筵)을 게을리 하려는 것과 전주(銓注:人事行政)의 문란을 바로잡는 데 노력했다.
1377년(우왕 3)에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서 개성 근처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했다.
1380년에는 이인임·지윤(池奫) 등과 뜻이 맞지 않아 날마다 술만 마시면서 도당(都堂)에도 참여하지
않자, 이를 미워한 이인임·임견미 등의 참소로 청주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아들로 보(補)·진(臻)·의(儀)가 있다.
경의(慶儀)
?∼1395(태조 4). 고려·조선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대승(大升)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복흥(復興)이다.
1377년(우왕 3)4월 밀직부사로서 서경도순문사 겸 서북면부원수(西京都巡問使兼西北面副元帥)가 되고,
1388년 4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휘하에서 계림원수(鷄林元帥)로서 요동정벌에
출정하기도 하였다.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李成桂)의 집권과정에서 일시 소외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4월 전원주등처병마절제사(前原州等處兵馬節制使)로서 무진회군공신
(戊辰回軍功臣)에 녹훈되었다.
1392년(태조 1)6월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남경(南京)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으며,
1393년 7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회군이등공신(回軍二等功臣)에 녹훈되고, 같은해
12월 하정사로서 요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뒤 외직으로 나아가 서북면병마도절제사(西北面兵馬都節制使)로 평양윤(平壤尹)을 겸하였다.
시호는 순절(順節)이다.
▣ 김태영 -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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