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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6)-金時讓편(번역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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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5-17 16:43 조회1,4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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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公)은 만력(萬曆) 신사(萬曆 辛巳: 1581년)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두각이 특이하고 기품이 우러러 보였다. 찬성공(贊成公:아버지)이 공(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하는 말이 "우리 문중을 크게 빛냄은 너에게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널리 듣고 뜻을 굳게 하여 갔다. 12~14세에 거듭 부모상을 당하였는데 전쟁과 흉년이 갈마들 때이므로 공이 외로운 아이로서 맡아 하느라 파리하여도, 마치 장성한 사람과 같이 하므로 듣는 자가 모두 칭찬하였다.



 복을 벗으면서 비로소 학문에 몰두하며 책읽기를 쉬지 않았다. 드디어 문사(文辭)가 하루아침에 뛰어올라 장옥(場屋: 시험 보는 장소)에서 휘두르니 서울에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에 과거시험에 올라 뽑히게 되어 괴원(槐院: 承文院)으로 들어갔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삼정승(三政丞)이 공을 한 번 보고는 "나라의 큰 그릇이 될 자"라고 인정하였고, 논자(論者)들은 사필(史筆)로는 공(公)을 빼고는 적임자가 없다고 하였지만, 당국에 거슬리어 천거(薦擧)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에 당상관이 된 후 무오년(戊午年: 1608)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돌아가시자 모든 장사를 지내는 일과 성대한 일을 모두 기록하도록 위촉(委囑)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쉬지 않고 하건만 공은 홀로 여유가 있었다.



 을유년(乙酉年: 1609)에 의랑지제(儀郞知制)의 교지(敎旨)를 받고 승진하였으며, 경술년(庚戌年: 1610)에 하지(賀至)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서울에서와 같이 용혜문승(用惠文繩: 일을 처리함에 마치 먹줄을 치듯 잘 처리함)하여 같이 간 통역관이 손을 소매에 넣고 춥지도 않은데 덜덜 떨었다.



 그 다음해(1611. 광해3년)에 돌아와 알현(謁見)하며 듣고 본 것을 기록하여 논하면서 "오랑캐의 형세가 번질 것 같이 보이니, 우리나라가 사신을 보내려면 요동(遼東)길은 믿을 수 없으니 바닷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공(公)이 높은 눈으로 십 년 뒤의 일을 먼저 본 것이었다.



 그 다음해(1612. 광해4년)에는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어 시험을 관장(管掌)하게 되었는데, 여러 소인들이 시제(試題)를 들어 임금인 상감을 몰래 풍자하였다고 잡아 가두기를 청하였다. 정판서(鄭判書) 세규(世規)는 공(公)과 굳게 사귀었는데, 수레가 광릉(廣陵)길을 지나는데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지만, 공(公)의 안색은 태연(泰然)하였고 정(鄭)은 오래도록 한탄을 하였다. 대질을 마치자 금부(禁府)에서는 극율(極律)에 처하기를 아뢰었다. 광해군은 유예(猶豫)하기를 삼일(三日)이나 하였다. 그런데 공은 옥에서 잠자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윤효선(尹孝先)이 같은 참시관(參試官)으로서 체포되어 왔었는데, 공을 발로 차 일으키며 하는 말이 "이게 어느 때인데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가?" 하니 공은 웃으며", "삶과 죽음은 천명(天命)이라."라고 말하였다. 백사(白沙) 상공(相公: 李恒福)의 변명을 빌려 사형에서 감형(減刑)되어 북방 종성(鍾城)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공은 시로써 말하기를 "마음과 행동이 본래 태양을 속이지 아니 하였으니 길하고 흉한 것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묻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18. 광해10년)에 영해(寧海 : 경북 영덕)의 북쪽 언덕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니 편여( 輿: 대나무로 엮은 가마. 죄인이 타는 가마라는 뜻)를 타고 남북 수 천리를 비틀거린 것이 십 여 년이지만 조금도 곤란(困難)하고 어려워하지 않고 어떤 경우든 곤궁함에 안주하였다. 전적(典籍)을 탐독하여 그 깊고 넓기가 끝이 없어, 천고(千古)의 이난(理亂), 시비(是非), 득실(得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 같았는데, 이는 훗날 곳곳에 쓰였는데 모두 옛날을 상고한 힘이었다. 육진(六鎭)이 변방의 끝이 된 지가 무릇 오래 되었는데, 공의 구강(口講: 입으로의 강의)과 지도를 받아 재목이 된 자로 유명한 이가 많았으며, 추천에 오른 자가 서로 벼슬을 하였다. 공(公)이 죽자 공(公)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아 공(公)을 현인(賢人)에 끼어 제사 지냈는데, 이는 조주(潮州: 지금 중국의 廣東省潮安縣) 사람들이 한문공(韓文公)을 사당(祠堂)에 모셨던 것과 같은 도리였다.
  이 때 토목사업으로 농사를 크게 그르치게 되자 조정에서는 속금법령(贖金法令)을 만들어 여러 귀양간 자들에게 이를 내렸는데, 후환이 모두 두려워 영(令)에 따랐으나, 다만 공(公)과 무숙 임숙영(茂叔 任叔英)만은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죽음보다 싫어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킨 무리 중에 끼어서 예조·병조의 정랑(正郞)으로 옮기더니, 유장(儒將)이 추천하여 玉堂(홍문관)으로 올라가고, 수찬(修撰)을 거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품계를 뛰어 수여되었으나, 최정승 명길(崔政丞 鳴吉)의 이끌음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공(公)이 한명련(韓明璉)이란 사람이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때 명련(明璉)은 순변사(巡邊使)로 용만(龍灣)에 주둔하고 있었고, 최정승(崔政丞)이 실은 공(公)이 호랑이의 밥이 될까 걱정한 것이었다. 가을에 교리(校理)로서 암행어사가 되어 북방을 안찰(按察)하게 되었는데 순무사(巡撫使)까지 겸하였다. 활이(猾吏: 정치를 간악하게 하는 관원)는 쓰러지고 수졸(戍卒: 국경을 수비하는 관원)은 깨어나게 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에 반역자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도체찰사 완평부원군(都體察使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에 반역을 했는데, 이때 사람들은 서로 피하였지만 공은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따라 섬기며 부체찰사(副體察使) 이시발(李時發)과 더불어 앞에서 척후(斥候)를 하였다. 당시 일이 급하여 한 군사도 도와 줄 여유가 없게 되었는데, 원수(元帥) 장만(張晩)을 평산(平山)에서 만나 일을 도모했으나 적은 벌써 저탄(猪灘)을 짓밟고 곧 서울을 압박하였고, 인조(仁祖)는 공주(公州)산성으로 행차하였다. 방어사(防禦使) 정충신(鄭忠信)이 먼저 안현(鞍峴)에서 적을 부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여러 장수가 의심하였지만, 공이 힘껏 그 계책에 찬성하여 갑자기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원수(元帥)는 상공(上功)이요, 다음이 공(公)이 이등(二等)이었지만, 상감이 이서(李曙)의 말을 받아들여 문사(文士) 세 사람을 삭훈(削勳)하였는데 공이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 후 헌납(獻納)이 되었고 다시 교리(校理)로서 진강(進講)하여 임금의 마음에 많은 절의를 쌓게 하여 그 언급한 것들은 묘미가 있었다. 겨울에 추천이 되어 전좌정랑(銓佐正郞)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겸하고



 을축년(乙丑年, 1625. 인조3년)에 응교(應敎)로 승진되어 문학(文學)을 겸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626)에 인헌왕후(仁獻王后: 仁祖의 母后인 具氏)의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기용되었는데 그 공로로 비자(緋紫: 벼슬이 대감의 지위)를 더하였다. 얼마 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赴任)하였다. 60여 고을의 민정(民情)을 살펴 그릇된 풍속을 순박하고 두텁게 하는데 손수 행하였고, 안건(案件)에 적체(積滯)되는 문서가 없었다. 선산(善山)에 한 간악(奸惡)한 백성이 사소한 원한 때문에 많은 선비를 해치려 하므로 공이 그 무고를 발각하고 법으로 이를 다스렸더니 남도의 인사들이 칭송하는 말이 그치지 않았다.



 (계속)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찬찬히 잘 보고 있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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