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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감사인(監査人)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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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5-18 09:06 조회1,2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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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왕조별 안동김씨 대관(臺官) 명단 ▣



◉ 고 종 조 :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김효인(金孝仁), 감찰어사(監察御使) 김방경(金方慶)

◉ 원 종 조 : 지사(知事) 김방경(金方慶)

◉ 충렬왕조 : 판사(判事) 김방경(金方慶), 侍(御)史 김순(金恂)

◉ 충숙왕조 : 지평(持平) 김영후(金永煦)

◉ 충정왕조 : 지평(持平) 김사형(金士衡)

◉ 우 왕 조 : 집의(執義) 김사형(金士衡)

◉ 공양왕조 : 대사헌(大司憲) 김사형(金士衡)





▣ 재상의 청탁도 거절한 감찰어사 ▣



--김방경(金方慶)은 고종 때 감찰어사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는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어떤 재상이 권신에게 고소하기를 “이번 어사는 먼젓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마침 그 때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전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저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저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 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색이 변하였다 한다.

--김방경이 견룡행수(의장병(儀仗兵)의 지휘관)가 되었을 때 금위군(禁衛軍 : 왕궁을 지키는 군대)이 권문(權門)에 다투어 아부하는 한편 숙위(宿衛)가 몹시 게을러지니, 그는 이에 분노하여 비록 병이 있더라도 휴가를 청하지 않고 숙위하였다. 숙위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 군인들이 밖에 나가서 자는가 하면 한번은 기생을 데리고 와서 자려는 사람이 있어 김방경이 이를 말리니 무안해 하며 사과한 사례도 있었다. 그는 후에 다시 어사대에 들어와서는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서 풍채와 절개가 늠름하였다고 사가(史家)들이 기록하였다.<출전 pp324-325>





▣ 왕에게 치국의 도를 강의한 김사형(金士衡) ▣



--김사형은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이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그의 조부인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에게 묻기를 “손자들인 김사안(金士安)과 김사형의 나이 20세가 넘었는데 왜 그들을 위해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 하였다. 김영후가 답하기를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더라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김사형은 그후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규정이 되었다. 공민왕 때 고공(考功) 산랑(散郞)이 되었는데,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안렴사와 수령들의 직무는 공부(貢賦)를 제대로 내게 하는 것인데, 근래에는 많은 주(州)와 현(縣)이 공납을 바치지 않고 있으니 법에 따라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 제의를 받아 들였다.

--우왕 때 사헌부의 집의(執義)로 임명되었다가 교주강릉도의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공명하고 위엄있으면서도 은혜로운 정치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공양왕이 나와 있는 경연에서 전 사헌집의 김사형이 상서 무일(無逸)편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대개 탐욕하고 안일을 주로 하는 자는 운명이 짧고 그렇지 않은 자는 길다고 하는데, 이는 본래의 이치가 그러한 것입니다. 천자(天子)의 일신은 천하의 안녕함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것이며, 제후(諸侯)의 일신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 위에 있는 자는 응당 마음을 공경하게 가지고, 규범을 해이시키는 안일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대개 안일함이 없으면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므로 조상들이 숨은 원조를 주고 하늘이 역시 그를 도와주는 것이나, 탐욕 안일하면 백성이 편안히 살지 못하므로 조상들의 혼령이 노하게 되며 하늘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오래 통치하느냐 못하느냐를 가르는 원인입니다.”

--김사형은 그 후 지문하부사 겸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왕이 한양(漢陽 : 서울)으로 천도하기로 하고 토목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김사형이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지금 양광도(楊廣道) 여러 주군의 백성들이 토목공사 동원으로 고통을 받으며 가을걷이도 제때에 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양 사람들이 자기 집을 빼앗기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노숙하거나 떠돌아 다니다가 죽기도 합니다. 시위(侍衛)를 맡은 여러 관원과 각 도(道)의 군관 및 군인들도 역시 객지에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면서 조석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으니 장차 얼고 굶주릴 염려가 있습니다. 풍수설(風水說)만 깊이 믿고 백성들의 피폐함을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한양 천도를 위한 토목공사를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왕은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공양왕 2년(1390) 8월에 대사헌 김사형 등이 도읍을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으로 옮기는 것을 중지하도록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출전 p314>



☞ 한편 공양왕이 즉위한 후 전 우시중(右侍中)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 전 대사헌) 우현보(禹玄寶)는 김저 사건과 관련이 있다하여 면직되었다. 이에 대사헌 김사형(金士衡) 등이 상소하기를 “윤이·이초 사건과 관련된 자들은 모두 귀양을 보냈는데, 오직 우현보 권중화(權中和) 등만 경성에 머무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니 모두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왕은 정상이 불명하고 사면 이전의 일이다.“ 하며 받아 들이지 않았다. 재차 제의하였으나 왕이 응답하지 않으므로 김사형은 집의 안경검(安景儉)·최원(崔遠)·장령 허주(許周)·최긍(崔兢)·지평 조용(趙庸) 등과 함께 사직을 청하였고, 그래도 하락치 않아 모두 병을 청탁하고 나오지 않는 등 상소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왕이 마지 못하여 우현보를 먼 곳으로 귀양 보냈는데, 우현보의 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부마(駙馬)였던 관계로 얼마 후 거주의 자유를 허용하였다.<출전 p321>





《출전 : 역사 속의 감사인 이야기/임병준/도서출판 전예원/1997》









▣ 김항용 - 새로운 자료에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귀한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새로운 자료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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