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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퇴계이황 탄신 500주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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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13 23:54 조회1,8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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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 탄신 500주년 ②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학문을 닦은 우리 가문의 선조 두 분이 더 있어 정리하였습니다.



★(제학공파) 金忠甲(김충갑)은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뛰어났다.



★(서운관정공파) 金 (김수)는 허난설헌의 시부 金瞻(김첨)의 동생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천안시지, 1987>

金忠甲(김충갑)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龜巖(귀암)이다

1543(중종38) 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때 정암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어 고생하였다. 뒷날 풀려서 괴산에 살았는데 김충갑은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뛰어났다.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나이어려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고려조에 실시하였던 승과를 다시 실시하고 승 보우를 입궐시켜 정치에 참여케 하였다.



그래서 유생들과 관리들은 모두 보우를 배척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는데 이때 김충갑이 많은 관리들과 더불어 보우를 배척하는 데 앞장서서 성리학자들 간에 이름이 높아졌다.



홍문관에서 수찬 벼슬을 하던 충갑의 매서 李(불화변)渾이 을사사화때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충갑은 이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장송가를 한 수 지어 시체 옆에 놓았다



代之耳 伐之耳

落落長松 伐之耳

小焉傾置之 棟材成之耳

大廈將傾式于 何以柱之



1546(병종1)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을사사화때의 간신들을 탄핵하다가 청주땅에 귀양가게 되어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선조초에 유배로부터 풀리는 은전을 입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의 헌납(정5품직)에 이르렀으며



뒷날 보조공신 좌찬성 상락군에 봉하여졌다. 또 충청도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서원을 세워 김충갑의 곧은 영혼을 제향하였다고 한다.



김충갑이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땅에 머물러 산 것이 안동김씨의 집단 거주지인 병천면의 가전리 잣밭 부락이다.













<디지털한국학>

金 (김수)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홍도(弘度),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교리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개수(改修)하였다.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유학(幼學) 신급(申$급01)이 올린 상소 속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직제학·승지를 거쳐 1587년에 평안도관찰사에서 면직되었으나, 나라에서 왜(倭)를 매우 걱정하여 변방의 일을 아는 재신(宰臣)을 뽑아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하여 군무(軍務)를 순찰하고 대비하도록 할 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91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에 대해 옥당에서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할 때 부제학으로서 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의논하러 가서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북 두파로 갈리게 되자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진주에 있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밀양과 가야를 거쳐 거창으로 도망을 가면서 다만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통고하니 도내가 텅 비어 왜적을 방어할 수 없었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겨우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으나, 근왕병이 용인(龍仁)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지방사람들로부터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란의 초기에 계책을 세워 왜적과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도망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1592년 8월에 한성판윤이 되었고, 지중추부사·우참찬 등을 거쳐, 1596년(선조 29)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군(明軍)의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군량징수에 힘썼다.



그뒤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1613년(광해군 5) 손자인 비(#비58)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였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夢村集,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大東野乘. 〈朱雄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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