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전서(退溪全書) 29 --- 퇴계와 우암 김주1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5-28 21:52 조회1,661회 댓글0건본문
퇴계전서(退溪全書) 29 --- 퇴계와 우암 김주1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서울에 있는 퇴계학연구원에서 퇴계의 저술을 모두 국역하여 퇴계전서 22권으로 발행한 바 있습니다. 퇴계전서 22권중에 실려 있는 퇴계 이황과 우리 선조님 관련 내용을 찾아 보았습니다.
퇴계 선생과 화산군 김주 선조님의 교유시 10여편, 만취당 김사원 선조님의 서간 10여편, 몽촌공 김수 선조님과의 교유시, 김덕곤 선조님 문답 등, 그 밖에도 많은 자료가 실려 있습니다.
자료가 많아 힘은 들지만 싫증도 나지만, 시간 기한을 두지 않고 틈나는 대로 하나하나 소개해 볼까 합니다.
☞아래 내용중에
-----문집으로는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김주가 죽은지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암집> 외에도 화산군 김주 선생의 많은 詩作이 있었을텐데, 임진왜란 등 병란으로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매우 아깝고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혹 어디에 전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걸어 봅니다.
■ 퇴계전서 1 -퇴계학역주총서 제1책- (1991, 서울 퇴계학연구원)
P41
퇴계선생문집 권1
●書堂에 次金應霖의 秋懷하다. /서당에 차김응림의 추회하다.
秋入梧桐손수변感一年하니 / 추입오동감일년
飜思宿債負山川이라 / 번사숙채부산천
病中에도 猶憶聖呼酒하고 / 병중유억성호주
貧裏에 寧甘兄事錢가 / 빈리녕감형사전
紫氣仙人은 函谷外요 / 자기선인함곡외
黃冠道士는 鑑湖邊이러니라 / 황관도사감호변
平生에 謬厠金閨彦하나 / 평생류측금규언
不及渠家養寸田이로다 / 불급거가양촌전
(26) 독서당67)에서 김응림68)의 추회시를 차운하다.
오동잎에 바람 드니 가을이 또 한 해라
쌓인 부채 생각하니 산수 구경 저버렸네
술을 불러 성인이라니69) 병중에 추억 남네
아무리 가난타손 돈을 높여 형님하랴70)
붉은 기운 옛 선인은 함곡관 밖을 나고71)
누런 갓 쓴 도사마저 감호로 돌아갔도다72)
내 평생에 그릇되게 금규 선비73) 친했지만
제각기 제 마음을 지키는 것만 못하리라.
---독서당67) : 한강 북녘 언덕에 있었으니, 옛날 용산사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고 문학하는 선비를 정선하여 윤번으로 글을 읽게 했다. 뒤에 두모포 남쪽 언덕에 옮겼고, 중종 을해년에 다시금 동호 송암 서녘 멧기슭에 터를 잡아서 湖堂이라 일렀다.
---김응림68) : 이름은 주(澍)요, 호는 우암(寓菴)이니, 벼슬이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10/23 22:40 (from:61.40.41.61) 조회 : 11
우암 김주 --- 퇴계 이황
● 讀堂次金應霖秋懷 / 독당차김응림추회
독서당에서 김응림의 "가을에 느낌" 이라는 시를 보고서 그시의 각운(脚韻)자에 맞추어 짓다.
가을이 와서 오동나무가 한 해를 흔들어 놓으니,
오랬동안 빚지고 있다는 생각 되솟아 나네. 산천을 등지고 있으니,
병고 속에서도 오히려 생각나네. 맑은 술을 성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가난 속에서도 어찌 달게 여기겠는가? 돈을 형님 같이 여긴다는 것을,
자주빛 기운띤 신선은 함곡관 밖으로 나갔고,
누른 관 쓴 도사는 거울 못 곁에서 놀았다네,
평소에 잘못 끼어 들었네. 금마문(金馬門)안을 드나드는 선비들 틈에,
미치지 못하네, 제집에서 한 마디의 마음 밭을 잘 가꾸기만은.
---추회(秋懷): "가을이 되면 느끼게 되는 회포를 적는다." 는 뜻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인들의 한시(漢詩)의 제목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퇴계집>에도 이시 외에 똑같은 제목의 시가 또있다.
---서당(書堂): 호당 이라고도 하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장소. 곧 독서당을 말함. 사가독서는 세종때 신숙주, 성삼문 등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학자들을 독서하게한 상사독서(上寺讀書)에서 비롯되어 세조와 연산군때는 일시 폐지 되었다가 중종때 다시 부활 되었다.
1507년 지금의 동대문 숭인동에 있는 정서원을 독서당으로 많들었다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 이라고 하였다. 이로 부터 몇차례 옮기기는 하였으나 명칭 자체는 바뀌지 않고 임진왜란때까지 계속 독서의 장소및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 하였다.
"옛날 용산사(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어 글을 읽게 하였으며, 뒤에 두모포 남쪽으로 옮겼고 중종때에 다시금 동호(東湖) 송암(松菴) 서녁기슭에 터를 잡아서 호당(湖堂)이라고 일렀다."
퇴계는 이 호당의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 하였는데 이 서당에서 김주,하서 김인후,민기,임형수등과 글을 읽으며 시작(詩作)을 주고 받았다".한다.
---김응림(金應霖)은 김주(金澍: 1512 ~ 1563)의 자, 호는 우암(寓菴), 본관은 안동으로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임. 중종26년(1531)에 진사, 동34년(153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었으며,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때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 관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선조때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추대되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 되어짐, 퇴계및 하서 김인후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집으로는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김주가 죽은지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도 퇴계선생과 김주(金澍)선조님과의 관계된 시문이 여러편 수록 돼있음.
출전:퇴계시 풀이1권
중문출판사 발행인:장억동
발행일:1969년2월10일
■ 퇴계시역주 (1987 이가원)
●書堂에 次金應霖의 秋懷하다
독서당에서 김응림의 추회시를 차운하다.
오동잎에 바람 드니 가을이 또 한 해를
생각괘라 쌓은 부채 산수 구경 저버렸네
술을 불러 성이라니 병중에 추억 남고
아무리 가난타손 돈을 높여 형님하리
붉은 기운 옛 선인은 함곡관 밖을 나고
누런 갓 쓴 도사마저 감호로 돌아갔도다
내 평생에 그릇되이 금규 선비 친했으나
제각기 제 마음을 지키기만 못하리라
---讀書堂 : 한강 북녘 언덕에 있었으니, 옛날 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고 문학하는 선비를 정선하여 윤번으로 글을 읽게 했더니, 뒤에 豆毛浦 남쪽 언덕에 옮겼고, 중종 을해년에 다시금 東湖 松庵 서녘 멧기슭에 터를 잡아서 湖堂이라 일렀다.
■ 국역 퇴계시(1) (199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書堂 次金應霖秋懷 / 독당차김응림추회
서당에서 김응림의 <추회>에 차운하다.
오동잎에 가을 들어 한 해가 또 저무니
산천의 묵은 빚을 어느제 갚는다지
병중에도 술은 즐겨 聖이라 부르지만
가난타서 돈을 어찌 형으로 섬길 수야
紫氣 뜨자 신선은 函谷關을 지나갔고
黃冠을 쓴 도사는 鑑湖가에 머물었네
평생에 맞지 않는 金閨彦이 되고 보니
그들의 丹田 수양 못 미치고 말았다네
---書堂 : 한강 북쪽 언덕 龍山寺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改構하여 堂을 만들고 문학이 훌륭한 선비를 뽑아 번갈아 글 읽게 하였다. 그 후에 옮겨 지어 頭毛浦 남쪽 언덕에 있다가 중종 乙亥에 또다시 東湖 松庵의 서쪽 기슭으로 터를 잡아 湖堂이라 칭하였음
■ 퇴계시풀이 제일권 (1996, 이장우, 장세후)
15. ●독서당에서 김응림의 <가을에 느낌>이라는 시를 보고서, 그 시의 脚韻자에 맞추어 짓다.
가을이 와서 오동나무가 / 한 해를 흔들어 놓으니,
오랫동안 빚지고 있다는 생각 되솟아 나네 / 산천을 등지고 있으니.
병고 속에서도 오히려 생각나네 / 맑은 술을 성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가난 속에서도 어찌 달게 여기겠는가? / 돈을 형님같이 여긴다는 것을.
자주빛 기운 띤 신선은 / 함곡관 밖으로 나갔고,
누른 관 쓴 도사는 / 거울못 곁에서 놀았다네.
평소에 잘못 끼어 들었네 / 금마문(金馬門) 안을 드나드는 선비들 틈에,
미치지 못하네 / 제 집에서 한 마디의 마음밭을 잘 가꾸기만은.
---서당(書堂): 호당 이라고도 하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장소. 곧 독서당을 말함. 사가독서는 세종때 신숙주, 성삼문 등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학자들을 독서하게한 상사독서(上寺讀書)에서 비롯되어 세조와 연산군때는 일시 폐지 되었다가 중종때 다시 부활 되었다.
1507년 지금의 동대문 숭인동에 있는 정서원을 독서당으로 많들었다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 이라고 하였다. 이로 부터 몇차례 옮기기는 하였으나 명칭 자체는 바뀌지 않고 임진왜란때까지 계속 독서의 장소및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 하였다.
"옛날 용산사(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어 글을 읽게 하였으며, 뒤에 두모포 남쪽으로 옮겼고 중종때에 다시금 동호(東湖) 송암(松菴) 서녁기슭에 터를 잡아서 호당(湖堂)이라고 일렀다."
퇴계는 이 호당의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 하였는데 이 서당에서 김주,하서 김인후,민기,임형수등과 글을 읽으며 시작(詩作)을 주고 받았다".한다.
---김응림(金應霖)은 김주(金澍: 1512 ~ 1563)의 자, 호는 우암(寓菴), 본관은 안동으로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임. 중종26년(1531)에 진사, 동34년(153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었으며,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때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 관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선조때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추대되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 되어짐, 퇴계및 하서 김인후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집으로는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김주가 죽은지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회(秋懷): "가을이 되면 느끼게 되는 회포를 적는다." 는 뜻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인들의 한시(漢詩)의 제목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퇴계집>에도 이시 외에 똑같은 제목의 시가 또 있음
---<퇴계연보> 신축년 선생 41세, 3월에 경연에 들어가서 아뢰었다. 휴가를 내려주어서 독서하게 되었다. 독서당이 동호(東湖)에 있으니, 그것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곳이었다. 문학 학문의 선비를 극히 엄선하여 번갈아서 글을 읽게 하니, 거기에 선택된 자는 영광스럽기가 선관(仙官)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피선된 사람으로서 많이 놀고 방탕하여 규칙에 어긋나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매양 자기 차례에는 반드시 가서 글 읽는 일에만 힘을 썼다.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하였는데, 해마다 이 서당에서 주고 받은 시작(詩作)이 여러 편 있었다. ..... 자문점마관으로 의주까지 갔다. 부교리로 승진되어 빨리 오라는 재촉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이 시를 지을 때 퇴계는 부교리라는 본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별히 선발되어 사가독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김윤만 - 새로운 주제로 또 접근하고 있군요. 우리 문중과 깊은 퇴계학 연구에 경의를 표합니다.
▣ 김항용 - 끊임없는 자료 발굴과 새로운 방법 개발에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폭넓은 지식을 갖게 하는 아주 훌륭한 자료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김태영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서울에 있는 퇴계학연구원에서 퇴계의 저술을 모두 국역하여 퇴계전서 22권으로 발행한 바 있습니다. 퇴계전서 22권중에 실려 있는 퇴계 이황과 우리 선조님 관련 내용을 찾아 보았습니다.
퇴계 선생과 화산군 김주 선조님의 교유시 10여편, 만취당 김사원 선조님의 서간 10여편, 몽촌공 김수 선조님과의 교유시, 김덕곤 선조님 문답 등, 그 밖에도 많은 자료가 실려 있습니다.
자료가 많아 힘은 들지만 싫증도 나지만, 시간 기한을 두지 않고 틈나는 대로 하나하나 소개해 볼까 합니다.
☞아래 내용중에
-----문집으로는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김주가 죽은지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암집> 외에도 화산군 김주 선생의 많은 詩作이 있었을텐데, 임진왜란 등 병란으로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매우 아깝고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혹 어디에 전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걸어 봅니다.
■ 퇴계전서 1 -퇴계학역주총서 제1책- (1991, 서울 퇴계학연구원)
P41
퇴계선생문집 권1
●書堂에 次金應霖의 秋懷하다. /서당에 차김응림의 추회하다.
秋入梧桐손수변感一年하니 / 추입오동감일년
飜思宿債負山川이라 / 번사숙채부산천
病中에도 猶憶聖呼酒하고 / 병중유억성호주
貧裏에 寧甘兄事錢가 / 빈리녕감형사전
紫氣仙人은 函谷外요 / 자기선인함곡외
黃冠道士는 鑑湖邊이러니라 / 황관도사감호변
平生에 謬厠金閨彦하나 / 평생류측금규언
不及渠家養寸田이로다 / 불급거가양촌전
(26) 독서당67)에서 김응림68)의 추회시를 차운하다.
오동잎에 바람 드니 가을이 또 한 해라
쌓인 부채 생각하니 산수 구경 저버렸네
술을 불러 성인이라니69) 병중에 추억 남네
아무리 가난타손 돈을 높여 형님하랴70)
붉은 기운 옛 선인은 함곡관 밖을 나고71)
누런 갓 쓴 도사마저 감호로 돌아갔도다72)
내 평생에 그릇되게 금규 선비73) 친했지만
제각기 제 마음을 지키는 것만 못하리라.
---독서당67) : 한강 북녘 언덕에 있었으니, 옛날 용산사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고 문학하는 선비를 정선하여 윤번으로 글을 읽게 했다. 뒤에 두모포 남쪽 언덕에 옮겼고, 중종 을해년에 다시금 동호 송암 서녘 멧기슭에 터를 잡아서 湖堂이라 일렀다.
---김응림68) : 이름은 주(澍)요, 호는 우암(寓菴)이니, 벼슬이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10/23 22:40 (from:61.40.41.61) 조회 : 11
우암 김주 --- 퇴계 이황
● 讀堂次金應霖秋懷 / 독당차김응림추회
독서당에서 김응림의 "가을에 느낌" 이라는 시를 보고서 그시의 각운(脚韻)자에 맞추어 짓다.
가을이 와서 오동나무가 한 해를 흔들어 놓으니,
오랬동안 빚지고 있다는 생각 되솟아 나네. 산천을 등지고 있으니,
병고 속에서도 오히려 생각나네. 맑은 술을 성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가난 속에서도 어찌 달게 여기겠는가? 돈을 형님 같이 여긴다는 것을,
자주빛 기운띤 신선은 함곡관 밖으로 나갔고,
누른 관 쓴 도사는 거울 못 곁에서 놀았다네,
평소에 잘못 끼어 들었네. 금마문(金馬門)안을 드나드는 선비들 틈에,
미치지 못하네, 제집에서 한 마디의 마음 밭을 잘 가꾸기만은.
---추회(秋懷): "가을이 되면 느끼게 되는 회포를 적는다." 는 뜻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인들의 한시(漢詩)의 제목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퇴계집>에도 이시 외에 똑같은 제목의 시가 또있다.
---서당(書堂): 호당 이라고도 하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장소. 곧 독서당을 말함. 사가독서는 세종때 신숙주, 성삼문 등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학자들을 독서하게한 상사독서(上寺讀書)에서 비롯되어 세조와 연산군때는 일시 폐지 되었다가 중종때 다시 부활 되었다.
1507년 지금의 동대문 숭인동에 있는 정서원을 독서당으로 많들었다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 이라고 하였다. 이로 부터 몇차례 옮기기는 하였으나 명칭 자체는 바뀌지 않고 임진왜란때까지 계속 독서의 장소및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 하였다.
"옛날 용산사(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어 글을 읽게 하였으며, 뒤에 두모포 남쪽으로 옮겼고 중종때에 다시금 동호(東湖) 송암(松菴) 서녁기슭에 터를 잡아서 호당(湖堂)이라고 일렀다."
퇴계는 이 호당의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 하였는데 이 서당에서 김주,하서 김인후,민기,임형수등과 글을 읽으며 시작(詩作)을 주고 받았다".한다.
---김응림(金應霖)은 김주(金澍: 1512 ~ 1563)의 자, 호는 우암(寓菴), 본관은 안동으로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임. 중종26년(1531)에 진사, 동34년(153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었으며,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때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 관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선조때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추대되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 되어짐, 퇴계및 하서 김인후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집으로는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김주가 죽은지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도 퇴계선생과 김주(金澍)선조님과의 관계된 시문이 여러편 수록 돼있음.
출전:퇴계시 풀이1권
중문출판사 발행인:장억동
발행일:1969년2월10일
■ 퇴계시역주 (1987 이가원)
●書堂에 次金應霖의 秋懷하다
독서당에서 김응림의 추회시를 차운하다.
오동잎에 바람 드니 가을이 또 한 해를
생각괘라 쌓은 부채 산수 구경 저버렸네
술을 불러 성이라니 병중에 추억 남고
아무리 가난타손 돈을 높여 형님하리
붉은 기운 옛 선인은 함곡관 밖을 나고
누런 갓 쓴 도사마저 감호로 돌아갔도다
내 평생에 그릇되이 금규 선비 친했으나
제각기 제 마음을 지키기만 못하리라
---讀書堂 : 한강 북녘 언덕에 있었으니, 옛날 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고 문학하는 선비를 정선하여 윤번으로 글을 읽게 했더니, 뒤에 豆毛浦 남쪽 언덕에 옮겼고, 중종 을해년에 다시금 東湖 松庵 서녘 멧기슭에 터를 잡아서 湖堂이라 일렀다.
■ 국역 퇴계시(1) (199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書堂 次金應霖秋懷 / 독당차김응림추회
서당에서 김응림의 <추회>에 차운하다.
오동잎에 가을 들어 한 해가 또 저무니
산천의 묵은 빚을 어느제 갚는다지
병중에도 술은 즐겨 聖이라 부르지만
가난타서 돈을 어찌 형으로 섬길 수야
紫氣 뜨자 신선은 函谷關을 지나갔고
黃冠을 쓴 도사는 鑑湖가에 머물었네
평생에 맞지 않는 金閨彦이 되고 보니
그들의 丹田 수양 못 미치고 말았다네
---書堂 : 한강 북쪽 언덕 龍山寺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改構하여 堂을 만들고 문학이 훌륭한 선비를 뽑아 번갈아 글 읽게 하였다. 그 후에 옮겨 지어 頭毛浦 남쪽 언덕에 있다가 중종 乙亥에 또다시 東湖 松庵의 서쪽 기슭으로 터를 잡아 湖堂이라 칭하였음
■ 퇴계시풀이 제일권 (1996, 이장우, 장세후)
15. ●독서당에서 김응림의 <가을에 느낌>이라는 시를 보고서, 그 시의 脚韻자에 맞추어 짓다.
가을이 와서 오동나무가 / 한 해를 흔들어 놓으니,
오랫동안 빚지고 있다는 생각 되솟아 나네 / 산천을 등지고 있으니.
병고 속에서도 오히려 생각나네 / 맑은 술을 성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가난 속에서도 어찌 달게 여기겠는가? / 돈을 형님같이 여긴다는 것을.
자주빛 기운 띤 신선은 / 함곡관 밖으로 나갔고,
누른 관 쓴 도사는 / 거울못 곁에서 놀았다네.
평소에 잘못 끼어 들었네 / 금마문(金馬門) 안을 드나드는 선비들 틈에,
미치지 못하네 / 제 집에서 한 마디의 마음밭을 잘 가꾸기만은.
---서당(書堂): 호당 이라고도 하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장소. 곧 독서당을 말함. 사가독서는 세종때 신숙주, 성삼문 등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학자들을 독서하게한 상사독서(上寺讀書)에서 비롯되어 세조와 연산군때는 일시 폐지 되었다가 중종때 다시 부활 되었다.
1507년 지금의 동대문 숭인동에 있는 정서원을 독서당으로 많들었다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 이라고 하였다. 이로 부터 몇차례 옮기기는 하였으나 명칭 자체는 바뀌지 않고 임진왜란때까지 계속 독서의 장소및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 하였다.
"옛날 용산사(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어 글을 읽게 하였으며, 뒤에 두모포 남쪽으로 옮겼고 중종때에 다시금 동호(東湖) 송암(松菴) 서녁기슭에 터를 잡아서 호당(湖堂)이라고 일렀다."
퇴계는 이 호당의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 하였는데 이 서당에서 김주,하서 김인후,민기,임형수등과 글을 읽으며 시작(詩作)을 주고 받았다".한다.
---김응림(金應霖)은 김주(金澍: 1512 ~ 1563)의 자, 호는 우암(寓菴), 본관은 안동으로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임. 중종26년(1531)에 진사, 동34년(153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었으며,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때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 관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선조때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추대되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 되어짐, 퇴계및 하서 김인후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집으로는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김주가 죽은지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회(秋懷): "가을이 되면 느끼게 되는 회포를 적는다." 는 뜻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인들의 한시(漢詩)의 제목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퇴계집>에도 이시 외에 똑같은 제목의 시가 또 있음
---<퇴계연보> 신축년 선생 41세, 3월에 경연에 들어가서 아뢰었다. 휴가를 내려주어서 독서하게 되었다. 독서당이 동호(東湖)에 있으니, 그것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곳이었다. 문학 학문의 선비를 극히 엄선하여 번갈아서 글을 읽게 하니, 거기에 선택된 자는 영광스럽기가 선관(仙官)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피선된 사람으로서 많이 놀고 방탕하여 규칙에 어긋나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매양 자기 차례에는 반드시 가서 글 읽는 일에만 힘을 썼다.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하였는데, 해마다 이 서당에서 주고 받은 시작(詩作)이 여러 편 있었다. ..... 자문점마관으로 의주까지 갔다. 부교리로 승진되어 빨리 오라는 재촉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이 시를 지을 때 퇴계는 부교리라는 본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별히 선발되어 사가독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김윤만 - 새로운 주제로 또 접근하고 있군요. 우리 문중과 깊은 퇴계학 연구에 경의를 표합니다.
▣ 김항용 - 끊임없는 자료 발굴과 새로운 방법 개발에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폭넓은 지식을 갖게 하는 아주 훌륭한 자료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김태영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