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③ (문과 : 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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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16 07:30 조회2,188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파③ (문과 : 김주)
안렴사공 김사렴의 후손 중 문과에 급제한 7대손 문단공 김주(金澍) 선조와 관련된 기록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金澍
1512(중종7)-1563(명종18)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應霖(응림). 호는 寓菴(우암). 안원군 公亮(공량)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 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 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 3등으로 화산군에 추봉되었다.
이황 김인후 임형수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門端(문단)이다.
참고문헌 명종실록 선조실록 <兪炳勇>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http://www.koreandb.net/)>
1512(중종 7)∼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兪炳勇〉
<야후백과사전>
4. 김주 金澍 [1512~156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안동
호 : 우암
별칭 : 자 응림, 시호 문단 ·화산군
주요저서 : 《우암집》
본관 안동. 자 응림(應霖). 호 우암(寓菴). 시호 문단(文端). 1531년(중종 26)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전라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병이 들어 그곳에서 죽었다.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문집에 《우암집》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암집(寓庵集)
조선중기의 문신 김주(金澍)의 시문집. 6권 3책 목활자본.
1789년(정조13) 6대손 내(禾+來)가 편집, 간행하였고, 1874년(고종11) 후손 문연(文演) 등이 보완,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二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주연(胄演)의 중간발(重刊跋)이 있다.
권1은 시 67수
권2는 서(書) 1편, 소(疏) 3편, 계(啓) 25편, 차(箚) 10편,
권3은 서(序) 1편, 기(記) 1편, 명(銘) 3편, 교서 1편, 논(論) 8편, 표(表) 3편, 책(策) 1편
부록인 권4-6은 유사와 연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중에는 저자가 관학유생(館學儒生)으로 있을 때 보담(寶曇), 행사(行思) 두 중의 목을 베고 봉선(奉先), 봉은(奉恩) 두 절을 훼철할 것을 제의한 청참승훼사소(請斬僧毁寺疏)가 있다.
계에는 중국의 금제품을 들여오지 말라는 물무중조금물계(勿貿中朝禁物啓), 마정의 폐단을 지적한 마정정리계(馬政整 啓),와 그밖에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및 권신 이기(李 )를 탄핵한 내용들이 있다.
차는 시폐진면차(時弊陳勉箚), 납충벽이차(納忠闢異箚), 금억승도차(禁抑僧徒箚) 등으로 모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응제성천도기(應製成川圖記)는 임금이 내린 성천도에 대하여 지은 기문으로, 성천의 지리와 풍토, 그리고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논은 모두 중국의 인물을 평한 것이며,
책은 인품의 고하를 따지는 인품책(人稟策)이다.
부록에는 저자의 행적을 적은 기록 이외에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임백령(林百齡) 등 당시 명현들의 창수시(唱酬詩)인 제공창수(諸公唱酬)가 있다,
도 우암집 김주 지음. 성균관대학교도서관 소장, 차 부분.
규장각도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金綾夏>
<야후백과사전>
우암집 寓庵集
조선 중기의 문신 김주(金澍:1512~1563)의 시문집.
구분 : 목활자본
저자 : 김주
시대 : 조선 중기(1789)
목활자본. 6권 3책. 저자의 6대손이 1789년(정조 13) 수집 간행하였고, 후손 문연(文演) 등이 1874년(고
11)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주연(胄演)의 발문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권1에 시 67수, 권2에 서(書) 1편, 소(疏) 3편, 계(啓) 25편, 차(箚) 10편, 권3에 고양세고서(高陽世稿序) 1편, 응제성천도기(應製成川圖記) 1편, 명(銘) 3편, 교서 1편, 논(論) 8편, 표(表) 3편, 책(策) 1편, 권4~6은 부록으로 유사(遺事)와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암서원 文巖書院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 용산리에 있었던 서원. 1610년(광해군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 김주(金澍), 이정형(李廷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8년(인조26)에 문암(文巖)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그뒤 조경(趙絅)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에 훼철되어 위패는 뒷산에 묻고 서적은 향교에 헌납하였으며 복원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태학지, 전고대방, 강원도지(강원도, 1959) <윤정혁>
<야후백과사전>
광국공신 光國功臣
조선 선조 때 명나라 역사기록에 잘못 기록된 조선 종실계통을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운 19명에게 내린 공신 훈호(勳號).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조선 태조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시정하는 것이 역대 왕의 가장 큰 현안이었고, 이를 위해 많은 사신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조선측의 끈질긴 외교교섭으로 이의 시정이 관철되고, 1589년(선조 2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간 윤근수(尹根壽)가 개정된 《대명회전》을 가져와 조선 종실계통이 바로 잡힌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1590년 이 일에 공을 세운 사람을 3등급으로 나누어 공신에 책록하고, 각각 봉군(封君)과 함께 공신훈호를 내렸다.
1등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여 윤근수 등 3명, 2등은 수충공성
모광국공신이라 하여 이후백(李後白) 등 7명, 3등은 수충공성광국공신이라 하여 김주(金澍) 등 9명이다.
⊙ 槿墨 (仁) (오세창, 1995, 성균관대학교박물관) 解題 任昌淳
(안렴) 김주 金澍 서간(초서) ★87
⊙ 신고 한국서예사 (金基昇, 1975, 정음사)
(안렴) 김주 金澍 ★480
金澍의 草書
김주(1512-1563) 는 본관이 안동, 安原君 公亮의 아들로 자는 應霖. 호가 寓庵이다.
중종26년(1531)에 진사가 되고, 1539년의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湖堂에 올랐다.
전라, 황해감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사건으로 명국에 봉사하였으나 연경 객관에서 52세로 병사하였다.
선조23년(1590)에 광국훈에 책록, 花山君에 봉해졌다.
저서에 우암집이 있다.
[도서해제]와 [안동김씨족보]에 의하면 "文章과 言議에 뛰어났었고, 퇴계이황, 하서김인후, 금호임형수 등과 친하였으며 초서를 잘 썼다."
<대종회보 제62호, 1998. 10>
안동김씨 수백년 世居阡(세거천)
부회장 斗會
경기도 이천시 율면 本竹里는 우리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문중의 집성촌이다. 이 곳에 우리 안
동김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충렬공 현손 안렴사공 휘士廉의 7대손인 휘澍(주) 광국공신 화산군
의 葬儀(장의)를 여주군 흥천면 歸白里에 모시고 이천시 율면 본죽리에 不 之位(부조지위)를
명받아 祠堂(사당)을 建竪(건수)함으로 이때부터 우리 안동김씨의 세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화산군 휘주의 행장을 약기해 본다.
공의 자는 應林이요 호는 寓菴이니 안렴사공의 7대손이요 안원군 휘公亮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이씨
공은 서기 1512년(중종7년 임신)에 출생, 1531년(중종26년 신묘)에 진사가 되시고, 1530년에 별
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가독서와 내외직을 역임후
대사헌 부제학 송도유수 전라도 황해도 양도 감사를 거쳐 文衡(문형)으로 薦擧(천거)되었고, 또
한성좌우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참판과 양관제학을 지내셨다.
1563년(명종18년 계해)에 종계변무사로 명나라 연경에 가셔서 사명을 마치시고 1563년 9월 17
일 燕館(연관)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52세라. 명나라 황제가 관의 수의를 특사하여 서장관
李陽元으로 하여금 염습과 호상을 치르게 하였다.
是年에 명나라 황제가 예조판서에 양관대제학을 추증하고 아조 선조 경인년(1590년 선조23)에
광국공신에 화산군을 봉하고 부조지위를 명하고 文端이란 諡號(시호)를 내렸다.
공은 풍채가 장엄하시고 도량이 넓으시고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셔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치셨다.
이렇듯 공명하신고로 공의 현손대에 이르러 1室4孝가 배출하였으니 휘銑 (官은 贈통덕랑 사헌
부지평)과 선의 제 銶 (贈조산대부 사헌부지평)와 구의 제 휘錫 (송우암시열 문하 사산감역불사
통훈대부 사헌부지평)과 그의 妹氏(당시 10세) 등 4남매가 그의 어머니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으시니 병환이 소생하여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서기 1753년 (영조 계유) 에 조정에서 증직을 하고 영조대왕께서 친필로 [一室四孝]라고 써서
賜額旌閭(사액정려)를 내리셨다. 그 정려가 폐허된 瓦家앞에 보존되어 있으며 일실사효라 쓴
영조의 친필현판은 종손인 22대손 起鎬씨가 보관하고 있다.
화산군의 향사는 연 춘추 2회 (춘:한식일, 추:추석일)에 배향하고 있으며 화산군의 문집으로는
寓菴集 3권으로 天地人이 있는데 지파 후손인 안렴사공의 19대손 文演씨가 소장하고 있다.
요즈음 후손들이 공의 유적을 영구히 보존키 위하여 여주군 공보실에 자료 일체를 갖추어 지
방문화재로 상신을 하고 있다.
안렴사공 7대손 澍 사당건립
泰相
본래 화산군의 사당은 이천군 율면 본죽리 후산 현 위치에 보존되어 왔었으나 불행히도 6.25
사변으로 인하여 관리가 소홀하여 완전 폐허가 되어 복원하기엔 속수무책으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변후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에 사당복원 문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소종중에서는 복원건
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해 왔으며 복원해야 한다는 뜻은 이구동성으로 일치하였으나 소종중에
는 재정이 없었으며 서로 만나면 걱정만 하고 있던 중
마침내 고향을 떠났던 안렴사공 21대손 泰相 현종 (현 안성축협 전무)께서 모친께서 늘 사당복
원을 말씀하심이 여러차례이어서 어머님 (경주김씨) 생전에 소원을 풀어 드리고자 거액을 선뜻
獻誠(헌성)함으로 엄두도 못냈던 사당복원 공사를 시작함으로 諸宗의 기쁨이 충만하여 그후 공
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사를 착공한 후 태상 종친은 공무에도 바쁜 가운데 직접 공사를 지휘감독하고 휴일이면 자
손까지 동원하여 일을 도움으로 마침내 훌륭한 사당을 준공하여 영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永世
是安을 告由하니 온 문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태상 현종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표창패를 수여하였다.
이천군청 http://www.icheon.gyeonggi.kr/icheon/category4/index.htm
본죽리 일실사효 정려(本竹里 一室四孝 旌閭)
> 소재지 : 율면 본죽리(栗面 本竹里)
현재 일실4효 정려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일실사효 정려에 소장하였던 현판 3개가 율면 본
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門前)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改築) 당시 그 정문(旌
門)을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 동생인 김석(金錫), 김구(金銶), 이들의 누이동생 등 4남매
의 효행(孝行)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金銑)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겸사(按兼使)를 지낸후 벼슬 하지아니하고 청주(淸州)에 은둔한 김사겸(金士兼)의 11대손 광국공신 화산군 김주(光國功臣花山君 金澍)의 현손이다.
김기창(金起昌)씨의 군지편찬(郡誌編纂) 자료(資料)에 의하면 김선(金銑)은 안동인(安東人)으로 문서공
(文瑞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蘇生)하게 되어 그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조 30년
(1753)에 조정(朝廷)에서 정려(旌閭)되어 영조대왕의 친필(親筆)로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賜額) 하였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4명의 효자가 난 것을 기리는 추천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백행의 근원이며 모든 나라가 따라야 할 것은 오로지 효(孝)이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 지평공은 천성이
순하고 효심이 깊어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그래서 부모님이 기뻐하시면 지평공도 기뻐
하였고, 부모님이 근심하시면 지평공도 근심하였다. 공께서 어른이 되어서는 진실로 효도하고 봉양함이
더욱 돈독하여 반드시 뜻과 힘을 다하였다.
공의 모친이 여러해 동안 병을 앓았는데, 김구, 김석 그리고 열 살이 넘은 누이동생과 함께 지극한 정성
으로 약을 다려드렸다. 그 정성이 대단히 지극하여 공께서 먼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회복하
게 되었고, 그 다음날에 또 위독해지자 공의 동생과 누이동생이 차례대로 공과 같이 손가락을 잘라 공
의 모친이 소생하여 며칠 동안 더 연명하였다.
모친의 장례를 지냄에 있어서는 예제에 따랐는데, 이 형제분들의 얼굴이 수척하였고 돌아가신 것을 매
우 슬퍼하고 울음소리가 애절하여 조문하는 사람들이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동네사람들도 함께 눈
물을 흘렸다. 그 후에는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서 날마다 모친의 묘소에 참배하고 3년동안 죽을 먹어 자
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부친께서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을 것을 권하여 어머님
을 그리는 정을 진정시키고 그 말씀에 따라 고조할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고조할아버지 살
아계시는 동안에는 효를 다하였으며 돌아가시자 슬퍼함을 다하였으니, 모친상과 부친상이 한결같이 애
절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다.
아아!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4남매의 지극한 효를 다한 행적은 여지병풍과 읍지에 기록되었으며, 같은
고을에 사는 선비가 이러한 사실을 이천군에 알리고, 이천군에서는 경기감영에 보고하고, 경기감영에서
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현종 10년(1669)에 4남매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은혜가 내려졌다. 이뿐만 아니라
영종 30년(1754)에는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一室之四孝』라 하였다.
효자·효녀가 어찌 옛날에만 있었겠는가? 4남매의 효자는 옛날부터 드물었는데 여기 김씨 4남매의 효행
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지평공의 고조할아버지 문단공은 시와 예의 교훈을 잘 익혀서 도의를 드러
내는 근거로 삼았으므로 학문과 뜻과 행동이 세상에 추앙받는 바 되었다. 그래서 그 공로는 우리 가문
을 보존하였고 충훈부에 그 이름이 올랐다. 공의 할아버지 부사공은 광해군때를 당하여 홀로 대의를 지
켰으며, 더럽지 않은 절개를 세워 지극히 돈독하였다. 이어 4남매의 독실한 효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널
리 알려졌으며, 충(부사공의 충을 말함)과 효(지평공의 효행을 말함)는 우리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
통이 되었다.
아아! 할아버지께서는 그 부모님의 장례를 치룰때는 슬픔을 머금고 그 애통함을 참으셨으니, 효도해야한
다는 것을 고칠수 없는 뜻으로 아신 것이며, 혹시나 선조의 뜻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셨으니, 이
어찌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선인의 뒤를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아버지께서는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선조들의 효행이 점차 잊혀져서 나타내지 못하게 될 것을 매우
걱정하였다. 이에 이러한 간절한 말을 국왕에게 상언하여 여러 대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4효자의 효행
의 빛을 드러내게 되었고, 현종과 영조 두 임금의 영광스런 은전을 입게 되었다. 이는 실로 우리 부친께
서 지극한 뜻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필연적인 결과로 효자 정려를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당시에는
미쳐 틈을 내지 못하여 돌아가신 우리 부친께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하셨다.
그래서 이 못난 증손자가 이를 마음 아프게 생가하여 여러 형제·자식들과 더불어 정려 짓기를 의논하
여 그 일을 마치게 되었다. 이에 감히 "우리 선조의 뜻을 계승하였다."라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 집안의
4남매의 효행은 여러 고을의 모범이 되며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김씨 집안
의 효행은 그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있었다고 그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라고 발문을 적었다.
<賜額內容>
孝子 贈 通德郞 司憲府持平 金銑 贈 朝散大夫司憲府持平 金銶 贈 通訓大夫 司憲府持平 行果毅 四山監役
金錫 孝女監役 李明三妻 金氏四男妹 之門 英宗甲戊七月 日 ?命 旌閭
(해설)
효자로 통덕랑(정5품) 사헌부지평에 증직된 김선, 조산대부(종4품) 사헌지부평에 증직된 김구와, 통훈대
부(정3품) 사헌부지평 행과의 사산감역에 증직된 김석과, 효녀이므로 감역에 증직된 이명삼의 처 등 김
씨 4남매 의 정려문이다. 김씨 4남매의 효행을 기려 영조 30년(1754)에 명정되 었다.
<문과방목>
김주(金澍) More Info.
중종(中宗)34년(1539년), 별시(別試) 갑과1(甲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12년, 임신
자(字) 응림(應霖)
호(號) 우암(寓庵)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광국공신/화산군(光國功臣/花山君)
>>> 가족사항
부(父) 김량(金亮)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金城)
증조부(曾祖父) 김종손(金宗孫)
외조부(外祖父) 이수팽(李壽彭)
처부(妻父) 진양수 이한(鎭陽守 李漢)
숙(叔) 김공망(金公望)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31(신묘)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호당&(湖堂&), 대사헌&(大司憲&)
안렴사공 김사렴의 후손 중 문과에 급제한 7대손 문단공 김주(金澍) 선조와 관련된 기록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金澍
1512(중종7)-1563(명종18)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應霖(응림). 호는 寓菴(우암). 안원군 公亮(공량)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 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 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 3등으로 화산군에 추봉되었다.
이황 김인후 임형수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門端(문단)이다.
참고문헌 명종실록 선조실록 <兪炳勇>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http://www.koreandb.net/)>
1512(중종 7)∼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兪炳勇〉
<야후백과사전>
4. 김주 金澍 [1512~156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안동
호 : 우암
별칭 : 자 응림, 시호 문단 ·화산군
주요저서 : 《우암집》
본관 안동. 자 응림(應霖). 호 우암(寓菴). 시호 문단(文端). 1531년(중종 26)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전라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병이 들어 그곳에서 죽었다.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문집에 《우암집》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암집(寓庵集)
조선중기의 문신 김주(金澍)의 시문집. 6권 3책 목활자본.
1789년(정조13) 6대손 내(禾+來)가 편집, 간행하였고, 1874년(고종11) 후손 문연(文演) 등이 보완,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二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주연(胄演)의 중간발(重刊跋)이 있다.
권1은 시 67수
권2는 서(書) 1편, 소(疏) 3편, 계(啓) 25편, 차(箚) 10편,
권3은 서(序) 1편, 기(記) 1편, 명(銘) 3편, 교서 1편, 논(論) 8편, 표(表) 3편, 책(策) 1편
부록인 권4-6은 유사와 연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중에는 저자가 관학유생(館學儒生)으로 있을 때 보담(寶曇), 행사(行思) 두 중의 목을 베고 봉선(奉先), 봉은(奉恩) 두 절을 훼철할 것을 제의한 청참승훼사소(請斬僧毁寺疏)가 있다.
계에는 중국의 금제품을 들여오지 말라는 물무중조금물계(勿貿中朝禁物啓), 마정의 폐단을 지적한 마정정리계(馬政整 啓),와 그밖에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및 권신 이기(李 )를 탄핵한 내용들이 있다.
차는 시폐진면차(時弊陳勉箚), 납충벽이차(納忠闢異箚), 금억승도차(禁抑僧徒箚) 등으로 모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응제성천도기(應製成川圖記)는 임금이 내린 성천도에 대하여 지은 기문으로, 성천의 지리와 풍토, 그리고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논은 모두 중국의 인물을 평한 것이며,
책은 인품의 고하를 따지는 인품책(人稟策)이다.
부록에는 저자의 행적을 적은 기록 이외에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임백령(林百齡) 등 당시 명현들의 창수시(唱酬詩)인 제공창수(諸公唱酬)가 있다,
도 우암집 김주 지음. 성균관대학교도서관 소장, 차 부분.
규장각도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金綾夏>
<야후백과사전>
우암집 寓庵集
조선 중기의 문신 김주(金澍:1512~1563)의 시문집.
구분 : 목활자본
저자 : 김주
시대 : 조선 중기(1789)
목활자본. 6권 3책. 저자의 6대손이 1789년(정조 13) 수집 간행하였고, 후손 문연(文演) 등이 1874년(고
11)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주연(胄演)의 발문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권1에 시 67수, 권2에 서(書) 1편, 소(疏) 3편, 계(啓) 25편, 차(箚) 10편, 권3에 고양세고서(高陽世稿序) 1편, 응제성천도기(應製成川圖記) 1편, 명(銘) 3편, 교서 1편, 논(論) 8편, 표(表) 3편, 책(策) 1편, 권4~6은 부록으로 유사(遺事)와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암서원 文巖書院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 용산리에 있었던 서원. 1610년(광해군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 김주(金澍), 이정형(李廷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8년(인조26)에 문암(文巖)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그뒤 조경(趙絅)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에 훼철되어 위패는 뒷산에 묻고 서적은 향교에 헌납하였으며 복원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태학지, 전고대방, 강원도지(강원도, 1959) <윤정혁>
<야후백과사전>
광국공신 光國功臣
조선 선조 때 명나라 역사기록에 잘못 기록된 조선 종실계통을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운 19명에게 내린 공신 훈호(勳號).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조선 태조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시정하는 것이 역대 왕의 가장 큰 현안이었고, 이를 위해 많은 사신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조선측의 끈질긴 외교교섭으로 이의 시정이 관철되고, 1589년(선조 2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간 윤근수(尹根壽)가 개정된 《대명회전》을 가져와 조선 종실계통이 바로 잡힌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1590년 이 일에 공을 세운 사람을 3등급으로 나누어 공신에 책록하고, 각각 봉군(封君)과 함께 공신훈호를 내렸다.
1등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여 윤근수 등 3명, 2등은 수충공성
모광국공신이라 하여 이후백(李後白) 등 7명, 3등은 수충공성광국공신이라 하여 김주(金澍) 등 9명이다.
⊙ 槿墨 (仁) (오세창, 1995, 성균관대학교박물관) 解題 任昌淳
(안렴) 김주 金澍 서간(초서) ★87
⊙ 신고 한국서예사 (金基昇, 1975, 정음사)
(안렴) 김주 金澍 ★480
金澍의 草書
김주(1512-1563) 는 본관이 안동, 安原君 公亮의 아들로 자는 應霖. 호가 寓庵이다.
중종26년(1531)에 진사가 되고, 1539년의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湖堂에 올랐다.
전라, 황해감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사건으로 명국에 봉사하였으나 연경 객관에서 52세로 병사하였다.
선조23년(1590)에 광국훈에 책록, 花山君에 봉해졌다.
저서에 우암집이 있다.
[도서해제]와 [안동김씨족보]에 의하면 "文章과 言議에 뛰어났었고, 퇴계이황, 하서김인후, 금호임형수 등과 친하였으며 초서를 잘 썼다."
<대종회보 제62호, 1998. 10>
안동김씨 수백년 世居阡(세거천)
부회장 斗會
경기도 이천시 율면 本竹里는 우리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문중의 집성촌이다. 이 곳에 우리 안
동김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충렬공 현손 안렴사공 휘士廉의 7대손인 휘澍(주) 광국공신 화산군
의 葬儀(장의)를 여주군 흥천면 歸白里에 모시고 이천시 율면 본죽리에 不 之位(부조지위)를
명받아 祠堂(사당)을 建竪(건수)함으로 이때부터 우리 안동김씨의 세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화산군 휘주의 행장을 약기해 본다.
공의 자는 應林이요 호는 寓菴이니 안렴사공의 7대손이요 안원군 휘公亮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이씨
공은 서기 1512년(중종7년 임신)에 출생, 1531년(중종26년 신묘)에 진사가 되시고, 1530년에 별
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가독서와 내외직을 역임후
대사헌 부제학 송도유수 전라도 황해도 양도 감사를 거쳐 文衡(문형)으로 薦擧(천거)되었고, 또
한성좌우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참판과 양관제학을 지내셨다.
1563년(명종18년 계해)에 종계변무사로 명나라 연경에 가셔서 사명을 마치시고 1563년 9월 17
일 燕館(연관)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52세라. 명나라 황제가 관의 수의를 특사하여 서장관
李陽元으로 하여금 염습과 호상을 치르게 하였다.
是年에 명나라 황제가 예조판서에 양관대제학을 추증하고 아조 선조 경인년(1590년 선조23)에
광국공신에 화산군을 봉하고 부조지위를 명하고 文端이란 諡號(시호)를 내렸다.
공은 풍채가 장엄하시고 도량이 넓으시고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셔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치셨다.
이렇듯 공명하신고로 공의 현손대에 이르러 1室4孝가 배출하였으니 휘銑 (官은 贈통덕랑 사헌
부지평)과 선의 제 銶 (贈조산대부 사헌부지평)와 구의 제 휘錫 (송우암시열 문하 사산감역불사
통훈대부 사헌부지평)과 그의 妹氏(당시 10세) 등 4남매가 그의 어머니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으시니 병환이 소생하여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서기 1753년 (영조 계유) 에 조정에서 증직을 하고 영조대왕께서 친필로 [一室四孝]라고 써서
賜額旌閭(사액정려)를 내리셨다. 그 정려가 폐허된 瓦家앞에 보존되어 있으며 일실사효라 쓴
영조의 친필현판은 종손인 22대손 起鎬씨가 보관하고 있다.
화산군의 향사는 연 춘추 2회 (춘:한식일, 추:추석일)에 배향하고 있으며 화산군의 문집으로는
寓菴集 3권으로 天地人이 있는데 지파 후손인 안렴사공의 19대손 文演씨가 소장하고 있다.
요즈음 후손들이 공의 유적을 영구히 보존키 위하여 여주군 공보실에 자료 일체를 갖추어 지
방문화재로 상신을 하고 있다.
안렴사공 7대손 澍 사당건립
泰相
본래 화산군의 사당은 이천군 율면 본죽리 후산 현 위치에 보존되어 왔었으나 불행히도 6.25
사변으로 인하여 관리가 소홀하여 완전 폐허가 되어 복원하기엔 속수무책으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변후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에 사당복원 문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소종중에서는 복원건
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해 왔으며 복원해야 한다는 뜻은 이구동성으로 일치하였으나 소종중에
는 재정이 없었으며 서로 만나면 걱정만 하고 있던 중
마침내 고향을 떠났던 안렴사공 21대손 泰相 현종 (현 안성축협 전무)께서 모친께서 늘 사당복
원을 말씀하심이 여러차례이어서 어머님 (경주김씨) 생전에 소원을 풀어 드리고자 거액을 선뜻
獻誠(헌성)함으로 엄두도 못냈던 사당복원 공사를 시작함으로 諸宗의 기쁨이 충만하여 그후 공
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사를 착공한 후 태상 종친은 공무에도 바쁜 가운데 직접 공사를 지휘감독하고 휴일이면 자
손까지 동원하여 일을 도움으로 마침내 훌륭한 사당을 준공하여 영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永世
是安을 告由하니 온 문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태상 현종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표창패를 수여하였다.
이천군청 http://www.icheon.gyeonggi.kr/icheon/category4/index.htm
본죽리 일실사효 정려(本竹里 一室四孝 旌閭)
> 소재지 : 율면 본죽리(栗面 本竹里)
현재 일실4효 정려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일실사효 정려에 소장하였던 현판 3개가 율면 본
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門前)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改築) 당시 그 정문(旌
門)을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 동생인 김석(金錫), 김구(金銶), 이들의 누이동생 등 4남매
의 효행(孝行)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金銑)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겸사(按兼使)를 지낸후 벼슬 하지아니하고 청주(淸州)에 은둔한 김사겸(金士兼)의 11대손 광국공신 화산군 김주(光國功臣花山君 金澍)의 현손이다.
김기창(金起昌)씨의 군지편찬(郡誌編纂) 자료(資料)에 의하면 김선(金銑)은 안동인(安東人)으로 문서공
(文瑞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蘇生)하게 되어 그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조 30년
(1753)에 조정(朝廷)에서 정려(旌閭)되어 영조대왕의 친필(親筆)로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賜額) 하였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4명의 효자가 난 것을 기리는 추천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백행의 근원이며 모든 나라가 따라야 할 것은 오로지 효(孝)이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 지평공은 천성이
순하고 효심이 깊어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그래서 부모님이 기뻐하시면 지평공도 기뻐
하였고, 부모님이 근심하시면 지평공도 근심하였다. 공께서 어른이 되어서는 진실로 효도하고 봉양함이
더욱 돈독하여 반드시 뜻과 힘을 다하였다.
공의 모친이 여러해 동안 병을 앓았는데, 김구, 김석 그리고 열 살이 넘은 누이동생과 함께 지극한 정성
으로 약을 다려드렸다. 그 정성이 대단히 지극하여 공께서 먼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회복하
게 되었고, 그 다음날에 또 위독해지자 공의 동생과 누이동생이 차례대로 공과 같이 손가락을 잘라 공
의 모친이 소생하여 며칠 동안 더 연명하였다.
모친의 장례를 지냄에 있어서는 예제에 따랐는데, 이 형제분들의 얼굴이 수척하였고 돌아가신 것을 매
우 슬퍼하고 울음소리가 애절하여 조문하는 사람들이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동네사람들도 함께 눈
물을 흘렸다. 그 후에는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서 날마다 모친의 묘소에 참배하고 3년동안 죽을 먹어 자
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부친께서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을 것을 권하여 어머님
을 그리는 정을 진정시키고 그 말씀에 따라 고조할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고조할아버지 살
아계시는 동안에는 효를 다하였으며 돌아가시자 슬퍼함을 다하였으니, 모친상과 부친상이 한결같이 애
절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다.
아아!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4남매의 지극한 효를 다한 행적은 여지병풍과 읍지에 기록되었으며, 같은
고을에 사는 선비가 이러한 사실을 이천군에 알리고, 이천군에서는 경기감영에 보고하고, 경기감영에서
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현종 10년(1669)에 4남매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은혜가 내려졌다. 이뿐만 아니라
영종 30년(1754)에는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一室之四孝』라 하였다.
효자·효녀가 어찌 옛날에만 있었겠는가? 4남매의 효자는 옛날부터 드물었는데 여기 김씨 4남매의 효행
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지평공의 고조할아버지 문단공은 시와 예의 교훈을 잘 익혀서 도의를 드러
내는 근거로 삼았으므로 학문과 뜻과 행동이 세상에 추앙받는 바 되었다. 그래서 그 공로는 우리 가문
을 보존하였고 충훈부에 그 이름이 올랐다. 공의 할아버지 부사공은 광해군때를 당하여 홀로 대의를 지
켰으며, 더럽지 않은 절개를 세워 지극히 돈독하였다. 이어 4남매의 독실한 효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널
리 알려졌으며, 충(부사공의 충을 말함)과 효(지평공의 효행을 말함)는 우리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
통이 되었다.
아아! 할아버지께서는 그 부모님의 장례를 치룰때는 슬픔을 머금고 그 애통함을 참으셨으니, 효도해야한
다는 것을 고칠수 없는 뜻으로 아신 것이며, 혹시나 선조의 뜻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셨으니, 이
어찌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선인의 뒤를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아버지께서는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선조들의 효행이 점차 잊혀져서 나타내지 못하게 될 것을 매우
걱정하였다. 이에 이러한 간절한 말을 국왕에게 상언하여 여러 대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4효자의 효행
의 빛을 드러내게 되었고, 현종과 영조 두 임금의 영광스런 은전을 입게 되었다. 이는 실로 우리 부친께
서 지극한 뜻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필연적인 결과로 효자 정려를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당시에는
미쳐 틈을 내지 못하여 돌아가신 우리 부친께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하셨다.
그래서 이 못난 증손자가 이를 마음 아프게 생가하여 여러 형제·자식들과 더불어 정려 짓기를 의논하
여 그 일을 마치게 되었다. 이에 감히 "우리 선조의 뜻을 계승하였다."라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 집안의
4남매의 효행은 여러 고을의 모범이 되며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김씨 집안
의 효행은 그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있었다고 그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라고 발문을 적었다.
<賜額內容>
孝子 贈 通德郞 司憲府持平 金銑 贈 朝散大夫司憲府持平 金銶 贈 通訓大夫 司憲府持平 行果毅 四山監役
金錫 孝女監役 李明三妻 金氏四男妹 之門 英宗甲戊七月 日 ?命 旌閭
(해설)
효자로 통덕랑(정5품) 사헌부지평에 증직된 김선, 조산대부(종4품) 사헌지부평에 증직된 김구와, 통훈대
부(정3품) 사헌부지평 행과의 사산감역에 증직된 김석과, 효녀이므로 감역에 증직된 이명삼의 처 등 김
씨 4남매 의 정려문이다. 김씨 4남매의 효행을 기려 영조 30년(1754)에 명정되 었다.
<문과방목>
김주(金澍) More Info.
중종(中宗)34년(1539년), 별시(別試) 갑과1(甲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12년, 임신
자(字) 응림(應霖)
호(號) 우암(寓庵)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광국공신/화산군(光國功臣/花山君)
>>> 가족사항
부(父) 김량(金亮)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金城)
증조부(曾祖父) 김종손(金宗孫)
외조부(外祖父) 이수팽(李壽彭)
처부(妻父) 진양수 이한(鎭陽守 李漢)
숙(叔) 김공망(金公望)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31(신묘)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호당&(湖堂&), 대사헌&(大司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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