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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17) 민란의 계속-이비.패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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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6-13 18:12 조회2,2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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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년

경주, 운문, 울진 연합 민란

이비 ·패좌의 난 利備雅佐-亂



개요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일어난 민(民)의 항쟁.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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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이후에는 12세기 이래 누적되어 온 사회경제적 모순의 폭발로 농민·천민의



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는데, 특히 경주지역의 민의 항쟁은 규모나 지속성 면에서 다른 민란에 비해



격렬하였다. 1190년(명종 20) 도적의 발생 이후 민의 항쟁이 계속적으로 발생하였는데, 1202년 10월에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의 영주(永州) 공격이 있었고, 그해 11월에는 석성주(石城柱)를 왕으로 삼아



신라를 부흥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등 항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어 12월 경주도령(慶州都領) 이비(利備:義庇)와 전 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 패좌(雅佐)가 경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지금까지 경주에서 일어난 반란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것이었다.



난이 일어나자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은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



(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삼아 최광의(崔匡義)·강순의(康純義)·이유성(李維城) 등과 함께



삼군(三軍)을 편성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토벌군 편성의 소식을 들은 경주인들은 운문(雲門:청도)·



울진(蔚珍)·초전(草田:성주)의 무리를 모집하여 삼군을 편성하고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자칭하면서



여러 주군(州郡)들을 위협하였다. 이에 김척후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져서 싸우지 못했으므로,



김척후는 소환되어 파직되고 정언진(丁彦眞)으로 교체하였다. 이듬해 경주인들이 기양현(基陽縣:안동)



으로 들어와 최광의의 군대와 싸우다 크게 패하였고, 이비는 정언진에게 체포되는 등 세력이 꺾였다.



또한 패좌는 기계(杞溪:경주)를 공격하다가 이유성의 군대에 패하여 운문산으로 후퇴하였다.



정언진은 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 등을 보내어 패좌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듣지 않자, 패좌의



부관(副官)이 함연수와 내통하여 패좌를 죽임으로써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난은 신라부흥운동과



연결된 정치적 반란의 성격을 띠었으나, 기본적으로는 민중의 반봉건항쟁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반란 진압 후 최충헌은 동경(東京)을 경주로 격하시키는 등 잔존세력을 색출하고 강경책을



씀으로써 민의 항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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