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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묘에 관한 풍수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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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6-14 18:09 조회1,8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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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문화인물이신 포은 정몽주선생은 우리 가문과는 많은 인연과 교류가 있는 분입니다.



문온공 선조와의 관계는 너무나 유명하니 생략하고, 군사공, 안렴사공과도 깊은 교유가 계셨던



분이어서 더욱 느낌이 다릅니다. 앞으로 문온공(척약재 김구용), 군사공, 안렴사공께서도 언젠가는



문화인물에 선정되시리라 믿습니다.



용인 모현면에 계시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에 대하여는 전하여 오는 유명한 설화가 있습니다.



우선 이 절설과 풍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는 연일(延日) 정씨(鄭氏)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연안(延安) 이씨(李氏)인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선생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선산(先山)에 조상을



같이 모시는 우리에게는 비록 이석형이 정몽주의 증손녀(曾孫女) 사위라고는 하지만 가문(家門)이



다른 두 사람의 묘가 한 곳에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의 간곡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절개를 저버리지 않은



정몽주를 이방원은 그의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에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고려의 충신을 살해하고도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저자 거리에 내다 버리고 시신을 치우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송악산 스님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만들어 주었는데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정몽주가 죽자 살아남은 고려의 충신들을 모두 숙청한 이성계는 3개월만에 조선왕조의



태조(太祖)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자들의 왕위 다툼으로 정국은 혼란해졌는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권력 장악에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자식들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선덕왕후 강씨의 소생 방번과



방석이 죽자 이방원에 정나미가 떨어져 고향 함흥으로 가 칩거하면서 노여움에 치를 떨었다.



정종(正宗)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권강화와 흩어진



민심수습에 나섰다. 그는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충성심을 신하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충절을 지킨



정몽주를 복권시키기로 했다.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에 이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가 뒤따르는 가운데 유골을 상여에 메고 고향 영천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읍을 지날 때였다. 상여 행렬의 맨 앞장에 세운 명정(銘旌)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정을 잡기 위해 쫒아 가보면 명정은 잡힐 듯 하면서



다시 날아가기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이석형 묘가 있는 자리에 떨어졌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구나" 감탄하면서 경북 영천까지 갈 필요 없이 이 곳에다



안장(安葬)하기로 하고 광중(壙中)을 팠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하관(下棺)은 할 수가 없었다.



몇몇 인부들에게 광중을 지키도록 하고 먼 행렬에 피곤한 후손들과 유림의 제자들은 곤한 잠이



들었는데 한 사람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몽주의 증손녀였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집 보다는 시댁과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서 자리에 욕심을 냈다. 숙소에서 살짝 빠져 나온 그녀는 독한 술과 맛있는 안주를 준비하여



광중을 지키는 인부들에게 가 고생이 많다며 짐짓 위로하는 척 하면서 술과 안주를 권하였다.



얼마 안 가서 독한 술을 마신 인부들은 곤한 잠에 골아 떨어졌고 정씨 부인은 묘 밑에 있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밤새 부었다. 다음날 정몽주 선생을 모시려고 보니 광중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명당인 줄 알았더니 물이 나는구나" "잘못 본 것이로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옆 언덕을 보니



그곳도 명당이었다. 그래서 정몽주 선생을 그 곳에다 모시었다.





후에 정씨 부인은 이석형 선생이 돌아가시자 명정이 떨어진 그 자리에다 장사 지냈고 자신도



그 자리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일화가 말해주듯이 포은 선생의 묘보다는 저헌 선생의 묘가 더



큰 혈(穴)임에는 틀림없다. 용혈을 보아도 그렇지만 포은의 후손보다는 저헌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였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함께 조선의 삼대 명문중의 하나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며 이석형의 후손들이다. 이석형의 4대 손자부터 발복 하여 우리 역사상



한문학의 대가이며 선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이명한(李明漢)이 인조 때 대제학을 했고 손자 이일상(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하는 등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또 이석형의 5대손 이귀(李貴)는 인조반정의 공을 세워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여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고 그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이후(李厚)는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는 영조 때 영의정, 이복원(李福源)과 그의 아들 이만수(李晩秀)는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내 2대가 연속 대제학을 하였고 이복원 큰아들 이시수(李時秀)는 영의정을 지내는 등 연안 이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총 250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고 정승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각각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으로 위세를 떨쳤다.



반면에 포은의 후손들은 현종 때 우의정에 오른 9대손 정유성(鄭維城)과 판서 2명이 있었을 뿐 크게



벼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포은의 후손들은 포은의 손자라 하여 극형을 받을 것도 형이 감형되는 등



조선왕조의 회유책으로 배려를 받았으나 오히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힘쓰는 가풍을 만들어 왔다.



(자료제공 형산 정경연)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잘 일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부드럽고 흥미진진한 전설! 감사합니다.

▣ 김발용 - 이런 전설이 의성에도 있지 않았나요?

▣ 김상석 - 전반적인 귀한자료 고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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