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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21)-김소편(역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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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6-27 01:28 조회2,1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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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13일에 괴산군(槐山郡) 서(西)쪽 보광산(普光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하니 여기는 평소에 스스로 점(卜)했던 곳이라. 선군(先君)은 공경으로 선조를 받들고, 예(禮)로써 제사를 지내고, 일찌기 제매(弟妹)의 집으로는 돌아가면서 지내지 않고, 꼭 정한 데서 시행하는 것을 일가(一家)의 해범(楷範)으로 했다. 사시(四時)의 범사(範祀)·삭망(朔望) 전작(奠酌)을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하고 슬피 살 때는 병(病)의 위중(危重)을 맛보고, 비록 지친(至親)사이라도 권세를 따르려는 뜻은 마음에서 싹 틔우지 않았다.
 3년상(三年喪)을 마치고 바로 재산을 나눔에 봉사전토(奉祀田土)하고 두루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외로운 생질(孤甥) 이인(二人)을 집안에서 수양(收養)하였는데 가르침과 의식(衣食)을 내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외삼촌이 무사(無嗣)하여 신후(身後)를 부탁함에 동성(同姓)을 권(勸)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성품(性品)이 과인(過人)하여 어떠한 경우를 만나 그에 따르더라도 거리낌이 없었고, 과장(科場)에서는 타인(他人)이 지은 것을 한번 보면 바로 외웠으며, 고금의 인물·사적을 종신(終身)토록 기억하였고 오래된 일중에 농사집의 비 내린 연월일 까지도 기송(記誦)하는데 만(萬)의 일(一)도 착오가 없었다.
 일찌기 무예(武藝)를 좋아하였는데 신묘지역(神妙之域 : 神의 오묘한 경지)에까지 들어가 비록 세상의 명궁자(名弓者)라도 감히 그 장점(長點)을 비교할 수가 없었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일찌기 후원(後苑)에서 문무조신(文武朝臣)을 시험하는데 시신(侍臣)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김모(金某)의 활쏘기는 법칙이 있도다. 생각해 보니 묘한 활이로다."하였다. 말(馬)을 주고 후(後)에 호영(湖營)에 부임해서는 특히 내장별강궁(內莊別强弓)을 하사(下賜)하여 표창하였다. 난(亂)을 만난 즉 몸을 잊어 버렸고, 백성(百姓)을 대함에는 어루만지어 사랑하였다. 그런 고로 수양성(首陽城)을 지키고 죽음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니 동성(同城)의 사부(士夫)들은 서로 말하기를 "충절(忠節)에 엎드리고 의(義)에 죽는 자는 반드시 김해주(金海州)로다."라고 했다.
 강릉(江陵)·영흥(永興)에는 모두 조적(조적 : 쌀을 팔고 사들임)이 있었는데 도망가고 없어진 곡식이 만여(萬餘) 곡(斛 : 十斗)이나 되었다. 이에 관청으로부터 갖추어 넣게 하고 그 채권을 소각하니 백성들은 소생(蘇生)이 되었고 읍(邑:고을)에는 빛을 덮음이 없게 되었다. 영흥(永興) 강릉(江陵)에서는 모두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는데 영흥(永興)에서는 이민(吏民)을 각각 돌에 새기기도 하였다.
 선군(先君)이 일찌기 말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늘에 일임하였고,  벼슬이 올라가고 침체되는 것에 대해서는 일찌기 마음속에 품지 않았었다. 입조(立朝)한 지 30여 년 동안 입으로는 나아가고 얻는 것에 대한 말을 내지 않았고, 발은 당로자(當路者 : 政權을 잡고 있는 자)의 문(門)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기용되면 행함에 있어 해당 관직의 직분을 다하였고, 파직되면 즉 낙천안분(樂天安分)을 즐겼다. 이것이 내 평생의 행장(行狀)이라."고 하였다.
               <계  속>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내일 모임을 멀리서 그리워 하겠습니다.
▣ 솔내영환 -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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