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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6-28 19:28 조회1,3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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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金延壽) 
○ 청풍(淸風) 고을 백성이 나무로 만든 인형[木偶人]을 신(神)이라 하여 매년 5, 6월 사이에 객사(客舍)에 모셔 놓고 크게 제사를 베풀면, 그 고장 사람들이 모여들어 폐해를 끼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김연수가 군수가 되자 곧 남녀 무당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그 나무인형을 불살라 버려 요사스러운 제사가 드디어 끊어졌다. 《패관잡기》

○ 인조 기축년에 총융사 김응해(金應海)가 사복(司僕)의 공사(公事) 때문에 절충장군으로 강자(降資)되어 밀부(密符)를 와서 바치니 승정원에서 갈아서 대신할 사람을 재가(裁可)한 일이 없어 밀부를 받아들이기 곤란하다고 아뢰니, 비국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장(將)의 직임이 극히 중하므로 가볍게 바꿀 수 없으며, 김응해가 이제 비록 강자되었다고 하나 오히려 당상관에 있습니다. 통정대부로 순찰사가 된 것 역시 규례가 있으니 아직 그대로 임무를 살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비국등록》


○ 조종조에서 사대부가 중시(重試)를 가장 중히 여겼다. 김안국(金安國)이 중시 공부를 하면서 표(表)와 책(策)을 많이 지어 연습하였다. 응시함에 미쳐 권홍(權弘)이 본시 책을 잘하였으므로 안국이 말하기를, “내가 1등을 하고자 하였더니 이 노인이 응시하니 그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하더니, 방이 발표되자 과연 권(權)이 1등이고 김(金)이 2등이었다. 중종 2년 정묘 중시 명종조 병신년에 11년김홍도(金弘度)가 중시에 들어가서 책(策)을 짓지 않고 술을 마시며 말하기를,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적이 두 번이었으나, 이제 양응정(梁應鼎)이 응시하니 내가 이연성(李延城 석형(石亨)) 격(格)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주D-01).” 하더니, 과연 양(梁)이 1등을 하였다. 선조조(宣祖朝) 이래 이름 있는 명관(名官)은 통례(通例)로 시권을 지어 바치지 않고 이를 좋은 일로 여겨왔으니 자못 이해할 수 없다. 《식소록》. 김홍도는 진사와 문과에서 모두 1등을 하였다
[주D-01]양응정(梁應鼎)이 응시하니 내가 이연성(李延城 석형(石亨)) 격(格)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세종 때에 《팔준도(八駿圖)》란 시제(試題)로 문신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모두 이석형이 장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석형이 전(箋)을 짓는데, 첫 구절에, ‘천명작지군(天命作之君)’과 ‘지용막여마(地用莫如馬)’를 대구로 하니, 성삼문이 옆에서 보다가, “‘군(君)’ 자와 ‘마(馬)’ 자를 대(對)로 한 것은 부당하다.” 하니, 석형이 그 말을 듣고 그것을 버리고 다시 지어 시를 바쳤다. 성삼문이 이석형이 버린 첫 구절을 표절하여 글을 지어 장원하였다. 이에 이석형이 웃으며, “나의 이 무릎이 남에게 굽혀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굽히게 되었다.” 하였다

○ 김응하(金應河)가 아직 현달하지 않을 때에, 철원(鐵原)의 양전감관이 되었는데, 균전사(均田使)가 그 전답의 품등을 높여 세(稅)를 올리려고 하는 것을 응하가 고집하고 즐겨 좇지 않아서, 볼기를 맞았으나 오히려 전의 소견을 고집하였다. 철원의 백성이 지금까지 그 덕을 감사히 여긴다. 《공사견문》

○ 김돈(金墩)이 앙부일귀(仰釜日晷)에 명을 짓기를, “무릇 베풀어 시행하는 것으로 시간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으니 그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원거(圓距)를 가로 설치하였으니 자(子)와 오(午)가 상대되고, 구멍이 굽이를 따라서 도니 점이 개자(芥子)씨 놓은 것만하다. 낮의 도수는 안에 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다. 신의 형상을 그린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함이다. 각(刻)과 분(分)이 또렷하니 해가 투영됨이 분명하다. 길가에 두는 것은 보는 이가 모이기 때문이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지을 때를 알겠구나.” 하였다.

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재미있는 내용 감사합니다.
▣ 김발용 - 대단하십니다. 그간의 이 많은 자료를 어디서~~~~~~~~
▣ 김주회 -
▣ 김재원 -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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