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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22)-김소편(역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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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7-01 00:35 조회1,5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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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先 )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인데 광주(光州)의 명망높은 집안이라. 신라(新羅) 왕자(王子) 흥광(興光)은 먼저 나라가 망함을 알고 광주(光州)에 복거(卜居)하여 대대(代代)로 평장(平章:高麗의 관직)이 되었다. 그런 고로 그 동(洞)을 평장(平章)이라 하였는데 그 후 자손(子孫)이 성향(姓鄕)으로 삼았다. 19세는 휘(諱) 겸광(謙光)이니 문과(文科) 좌참찬(左 贊) 광주군(光山君)이며 생(生)하니 참봉(參奉) 극치(克恥)이며, 참봉(參奉)이 첨정(僉正) 영윤(寧胤)을 생(生)하니 이는 고증조(高曾祖)이라. 대부(大父)의 휘(諱) 익청(益請)은 문과(文科) 감찰(監察)이요, 고(考)의 휘(諱)는 안세(安世)이니 사마(司馬)라.
 취처(娶妻)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첨추(僉樞) 기서(麒瑞)의 딸이라. 만력 경자(1600 선조33년) 8월 6일에 우리 선비(先 )가 생(生)하였고 선군(先君)을 섬기기는 44년이었는데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이며, 종족(宗族)을 대우(待遇)하는 것이며, 비첩(婢妾)을 사랑하는 것 등등에 예(禮)를 갖추고 은혜를 후(厚)히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선군(先君)이 별세(別世)한 후(後)에는 조석(朝夕)의 사사(祀事)를 친(親)히 집행하였는데 게으르지 않음이 조고비(祖考 ) 3년상(三年喪)과 한결 같았다. 무신년(1668 현종9년) 여름에 병을 만나 속광(屬  :別世)하니 때는 5월10일이요 수(壽)는 69세라. 9월 10일에 선군(先君)의 묘(墓) 왼쪽에 합장하였다.
  1남2녀를 두었으니 남(男)인 구만(龜萬)은 대·소과에 올라 좌승지(左承旨)요, 딸은 윤우갑(尹遇甲)에게로 갔는데 사마(司馬)에 올라 관(官)은 통판(通判)이라. 구만(龜萬)은 의령인(宜寧人) 현감(縣監) 증 좌승지 남과화(贈 左承旨 南斗華)의 딸을 취처(娶妻)하여 4남 4녀를 낳았다. 1남 남정(男挺)은 진사(進士)인데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상진(李象震)의 딸을 취처(娶妻)하여 1남을 낳으니 명삼(命三(必光))이고, 2남 남채(南採)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이당규(李堂揆)의 딸을 취처하여 3남 2녀를 낳고, 3남 남택(南擇)은 호조판서(戶曹判書) 박신(朴信)의 딸을 취처(娶妻)하고, 4남 남식(南拭)은 정언(正言) 윤이후(尹爾厚)의 딸을 취처(娶妻)하여 생2남 1녀라. 내·외의 증현손(曾玄孫)이 모두 10여명이라.
 선군(先君)이 일찌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천인(千人)을 살리면 자손(子孫)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옛말이 아니 그러한가? 수양(首陽:州)에서 성(城)을 지키고 강릉(江陵)에서 흉년에 굶주리는 자들을 구하여 살린 것으로 말하면 루만명(累萬名)에 그칠 것이 아니며 만대(萬代)로 그렇게 일어날 것이로다."고 하였다. 슬프도다. 자손이 쇠체(衰替쇠체: 쇠약하여 폐하지)하지 아니하며 지엽(技葉-技孫)이 번창하고 성(盛)하여 가까운 후손(後孫)들이 모두 다재다복(多才多福)한 것은 실로 선군(先君)의 적덕여경(積德餘慶)이 아니겠는가? 문인(文人)의 손을 빌려 묘도(墓道)를 일미(溢美: 넘치도록 아름답게)한다는 것은 선군(先君)이 경계한 바이다. 이에 보잘 것 없는 것도 피하지 않고 후계(世係)의 사실(事實)을 대략(大略) 기록하며 글을 마치노라.



承政院左承旨 龜萬    謹撰
再從姪 密陽府使 鳳至書
肅廟五年己未(1679년) 三月 日立 



    <끝>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글 감사합니다.
▣ 김윤만 -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 오랫만에 접하는 낯익은 단어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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