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아버지 상서공(김효인) 08---서화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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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15 20:04 조회1,537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의 아버지 상서공(김효인) 08---서화기록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본관은 안동,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
성격이 엄하고 굳세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도 잘 썼다. <고려사>
고종11년 甲申(1224)에 세운 보경사 원진국사비는 이송로가 글을 짓고 보문각 교감 ●김효인이 글씨 및 전액을 썼으니 청하 내연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글자체는 조금 살이 쪘으나 그래도 골력이 원만하고 굳세며 맑고 아리따워 사랑할 만하다. <서청>
■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서예부흥의 3대기수>
(고려) 고종시대에는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따라서 서예도 중기말의 침체상태에서 재흥의 활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즉 고종대 반세기간에 서예부흥의 3대기수가 나타났다. 우선 문호 ★이규보를 비롯하여 집권자 ★최이, 한림학사 병부상서 ●김효인등 3거두가 모두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 3대가 중에서도 ●김효인의 글씨가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書跡도 두 개의 名碑에 남아 있다. 김효인은 일세의 문장가이기도 했었는데 文才, 書才를 兼全한 것이 이규보와 쌍벽을 이룬 존재였다. 그러나 글은 역시 문호 이규보의 존재가 더 컸고 글씨는 김효인이 더욱 빛나는 존재였다.
<김효인의 두 개 名碑의 書蹟>
김효인( -1253)의 본관은 안동, 충렬공 김방경의 아버지.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隸書를 잘 쓴 당대의 명필이었다. [書鯖]에서 그의 書風을 "自體 微帶肉 而骨力圓勁 淸婉可愛"라고 평하였다. 그가 쓴 書跡이 보경사의 원진국사탑비와 송광사의 진각국사 원소탑비에 遺存되어 있다.
원진국사탑비는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중산리의 보경사 경내에 서있다. 이 비에 대하여 [大東金石書]에는 "보경비 재청하내연산 보경사원진국사비 김효인書 이송로文 남송영종 가정17년 갑신립 여강종13년야"라고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연대와 찬자명에 두가지 잘못이 있다. 동비문 말미의 각자에는 "갑신5월일 사문혜숙등 입석" 이라고 있다. 여기 있는 갑신년은 [대동금석서]의 남송영종 가정17년 갑신과 부합된다. 그러나 고려연호로는 강종13년이 아니고 고종11년(1224)에 해당된다. 강종은 재위 3년밖에 안되며 동3년이 고종원년과 겹쳤던 것이다.
또 비문을 쓴 사람이 李松老로 되어 있으나 고종대에 국사의 비문을 쓴 명사는 李公老였고, 이송노라는 인물은 없었다. 이공로는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던 문신으로서 몰년이 고종11년(1224)이다. 이 비석이 선 같은 해이며, 그는 이 비문을 쓰고 그해 중에 죽었던 것이 분명하다.
본비는 높이가 5척 7촌, 폭이 3척 4촌이며 부석위에 서 있다. 비문에 의하면 유가출신의 원진은 속성이 신씨, 휘가 승형, 자가 영회..... <중략>
김효인이 碑書를 쓴 또 하나의 진각국사 圓炤(원소)탑비는 전라남도 순천군 송광면 송광사에 있다. 그러나 이 비는 일찍이 倒潰(도궤)되어서 斷石(단석)으로 유존되어 있는데 비신 하반부의 좌반부뿐이다. 단석은 고가 3척8촌, 횡이 2척1촌인데 거기 잔존한 비문은 16행이다. 진각은 속성이 최씨, 휘가 혜심, 자가 영을, 스스로 무의자라 호하였다. .... <중략>
고종21년 (1234)에 그가 월등사에 병으로 눕자 왕은 시의를 보내었고 당시의 집권자 진양공 최이도 문병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26일에 병석에서 일어나서 단좌 미소하면서 입적하였다. 왕은 진각국사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立碑연대는 그 이듬해 (1234)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1991, 정신문화연구원)
<보경사 원진국사비>
비는 입적 3년 뒤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썼다. 김효인은 충렬왕 때의 명장 김방경의 아버지로 글씨에 뛰어났다. 따라서 이 비문은 구양순체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활달함을 잘 살렸다.
<서예>
고려 중기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坦然(탄연)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트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비인데, 이 비는 현재 없어졌으나 탁본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왕희지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경직한 맛이 전혀 없고 운치가 넘치는 유려함에 강철과 같은 힘이 들어보인다.
그의 영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탄연의 문인 ★기준(機俊)은 탄연의 글씨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 ♠단속사 대감국사비가 바로 그의 글씨이다.
같은 탄연의 서법으로 쓴 것으로는 ♠운문사 원응국사비가 있으나 쓴 사람의 이름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12세기에 이르러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문인들은 모두 활기를 잃어 문학,예술 전반에 걸쳐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종 말기에 최씨정권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우수한 작가로서는 유공권, 김효인 등이 있다.
●김효인은 고종 때의 사람인데 보경사 원진국사비 (보물 제252호)는 탄연의 서법을 계승한 명작이다.
■한국서화가인명사전 (2000, 한문영, 범우사)
p154
●김효인 金孝印
고려, ?∼1253(고종40). 문관 서예가. 본관은 안동,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아버지. 문과에 급제, 병부상서 한림학사를 지냈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 <작품> 보경사원진국사비(영일), 송광사진각국사원소탑비(순천)
▣ 김항용 -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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