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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아버지 상서공(김효인) 11끝.---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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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17 04:17 조회1,7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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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아버지 상서공(김효인) 11끝.---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강진)





여름캠프2003 답사자료를 준비하면서 안동의 상락대, 회곡리, 죽송리 자료와 충렬공(김방경) 선조님의 말년행적을 총정리해 보았습니다. 아울러 상서공(김효인) 선조님의 기록과 시서화 자료도 모두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중에서 상락대와 보경사 원진국사비(경북 포항) 자료를 모두 모아서 여름캠프2003 답사자료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타 추가할 자료와 고견이 계시면 알려 주시옵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전면 1238-1241 이규보撰 김효인書, 후면음기 1250 최자撰 탁연書)



1. 비석 실물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보물 제313호)가 전남 강진 월남사지에 있는데

비석 前面 (이규보撰, 김효인書)은 깨어져 없어지고 後面(최자撰, 탁연書)은 일부 존재







2. 비편 실물



<비편 실물1>

- 송광사에 있었던 前面 비편은 현재 소재 불명

- 조선금석총람에 송광사에 있다고 설명하고 게재한 비편 내용이 있는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편 실물과 같은 것임.

다만 비편 아래 부분 일부 (이규보 봉선찬, 김효인 봉선서 부분)이 잘려 나간 상태임

- 따라서 조선금석총람이 간행되는 1919년 이전에 송광사에 있었던 비편이 어느 시기엔가 (?광주박물관 개관시) 광주박물관으로 이관된 것으로 판단됨

-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前面 비편 (78×98cm)



<비편 실물2>

- 1972년 비 주변 대밭에서 민현구 교수가 수습한 비 前面 단석 (80cm*55cm)은 현재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비 윗부분 가로70행중 4-21행, 세로34열중 13-43열에 해당

※ 금석문대계1의 비편 탁본 1점은 위 비편의 탁본임





민현구 교수 문의

- 1972년 비 주변 대밭에서 수습한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비편은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국립광주박물관 문의

- 소장하고 있는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비편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통해서 입수하였는지?









3. 탁본 원본



<탁본 원본1>

全面탁본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 소장기호 : 4014 (구 2285) - 연대 : 1235 (고려고종 22)

- 소재 : 송광사 (전남 승주) - 규모 : 비신 결손 266×125









4. 탁본첩



<탁본첩1>

이오의 대동금석서에 실려 있는 김효인 書 수선사비 (송광사 진각국사 원소탑비) 탁본은 비의 위에서 아래로 7∼16행, 우에서 좌로 1○∼14열 부문의 45글자 탁본으로, 1972년 민현구 교수가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주변 밭에서 수습한 비 前面 비편과 8글자가 중복된 탁본임



<탁본첩2>

금석문대계1(전라남도편)에 비편탁본 1점은 1972년 민현구 교수가 비 주변 대밭에서 수습한 비편(80*55) 탁본임



<탁본첩3>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全面탁본 1점과 部分탁본 4점 (상1, 상2, 하1, 하2)이 있음

※ 全面탁본의 맨 오른쪽 둘째 줄에 "將士郞 中書舍人 知制誥太子司義郞賜紫金魚袋臣金 孝印奉 宣書" 글씨를 희미하게 확인 가능,

※ 또한 비 後面 (1250, 최자 찬, 탁연 서) 에 진각국사의 문도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秘書監 金孝印"을 확인할 수 있음









4. 학문적 연구 동향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에 대하여는 학문적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음

■ 민현구의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의 비음기에 대한 일고찰] (진단학보 36집, 1973)

■ 허흥식의 [진각국사 혜심의 원비와 해석의 보완] (정신문화연구 16권, 1993)

■ 월남사지 (목포대박물관, 강진군, 1995)









5.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기록



■ 문화재청 홈

종목 보물 313호 명칭 월남사지진각국사비 (月南寺址眞覺國師碑)

분류 석비 수량 1기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13 시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강진군



월남사는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창건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각국사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혜심(慧諶)으로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월남사 터에 서 있는 이 비는 절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어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발톱에서 보이는 현실성이나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잘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고종 때로 추정된다.



*문화재명칭변경(2002.03.12) : 월남사지석비→월남사지진각국사비

-사유:월남사지석비는 월나사의 창건주인 진각국사(1178∼1234)의 비로 이규보(1168∼1241)가 비문을 지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고 1973년 음기의 판독을 통해 진각국사비임이 확인되어 「월남사지진각국사비」로 명명하고자 함.





진각국사 부도

불일암 대밭 아래로 새로 낸 우회소로를 따라 250m 내려간 후 다시 계곡을 따라 왼쪽 길로 250m 올라가면 동천(洞天)이 열린 그 곳에 본사보다 나이가 많은 광원암(일명 西庵)이 알맞게 자리하고 있다.

514년(백제 武寧王 14) 가규(可規)스님이 초창했다. 호남의 서해안 지역 사찰의 창건 연대가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원년인 514년에 유난히 몰려 있는 것은 신뢰성을 떨어지게 하나 광원암의 경우 무명( ? ) 가규대사가 창건주인 것이 오히려 믿음을 준다.

제2세 진각국사(眞覺慧諶 1178∼1234)께서 주석하시며 1226년에 선문염송집(禪門 頌集) 30권을 펴 내었다.암자 바로 뒤 언덕에 진각국사의 사리탑인 원조탑(圓照塔)이 있다. 비는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출산 월남사지(月南寺址)에 파손된 비신 하반부만 남아 있다.(보물313호)





혜심(慧諶) (1178-1234)

고려 중기의 스님,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송광사)의 제2세 법주.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성은 최(崔). 나주화순(전남 화순) 사람이다.

일찍이 출가할 뜻을 가졌으나 이루지 못하여 유학에 힘써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태학관(太學館)에 들어갔다.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던 홀어머니가 죽자, 1202년(신종 5) 25세에 조계산 수선사의 보조 지눌(普照 知訥)을 찾아가 득도하고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오산(鰲山), 지리산 금당암(金堂庵) 등에서 각고의 선 수업을 하고 법을 이어 받았다.

그 때 지눌은 수선사의 법석을 그에게 전하려 했으나, 그는 굳게 사양하고 지리산에 숨어 수년간 더욱 선을 닦으며 정진했다. 1210년(희종 6) 지눌이 입적하자 문도들이 왕에게 알려 칙교(勅敎)를 받들고 법석을 잇기를 권하여 마지못해 수선사의 제2세 법주가 되었다.

고종이 즉위하여 선사, 대선사를 내리니 선석(選席)에 뽑히지 않고 승질(僧秩)에 오른 몇몇 예 가운데 하나이다. 왕명으로 단속사(斷俗寺) 주지를 겸임하기도 했으나, 수선사에 주로 머물며 이 곳을 더욱 확장하고 교화 활동에 전념했다. 수선사를 중심으로 지눌의 간화선법(看話禪法)을 계승하여 이를 더욱 진작시겼다.

1234년(고종 21) 6월 26일 나이 57세, 법랍 32년으로 화산(華山)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했다. 왕이 진각(眞覺) 국사라 시호하고, 이듬해 수선사 북쪽 광원암(廣遠庵)에 부도를 세워 탑명을 원소(圓炤)라 했다. 문하에는 청진(淸眞) 국사 몽여(夢如),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麻谷) 등이 특히 뛰어났으며, 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되었다. 저술로는 <선문염송> 30권, <선문강요> 1권, <어록> 2권, <시집> 2권 등이 있다.





■ 인터넷 검색 --- 팔만대장경



三. 板木의 鍊板과 필체

거제도 등지에서 자작나무(白樺木) 一名 巨濟木을 찍어서 腐廢와 ?蝕을 방지하고, 板質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3年 동안 바다물에 담갔다다가 다시 板子를 만들고, 그것을 또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다음 대패질을 하고, 寫經員들로 하여금 歐陽詢(557∼641) 筆體로 써서 판에 새겼다. 그리고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두 끝에 角木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한 다음 네 귀에 銅板으로 장식하였다.



박씨의 고집스런 노력은 해인사 경판 연구사에서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어려운 과업들이 그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좋은 예의 하나가 정안과 분사도감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다. 박씨의 보고에 따를 때, 분사도감의 등장이 1243년부터이므로 정안의 동참도 당연히 이때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치부될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1236년, 그러니까 고려대장경 재조사업이 첫발을 내 딛던 바로 그 전 해 12月 15日, 정안이 묘법연화경 일곱권을 간행하면서 기원한 2장 23행의 내용은 읽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몽골군이 침노하던 해에 죽어간 누이도 누이려니와, 아내를 잃고 정국이 소란한 중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자형 최이에게 부처의 가호가 있기를 비는 안타까운 심정이 기원문의 행간에 배어 있다.



그보다 또 2년 전 1234년에 송광사 2세 사주 혜심(慧諶)이 입적했을 때, 3세 사주 몽여(夢如)의 간청으로 정안은 선사(先師)의 행장을 작성하여 최이에게 보내고 이규보로 하여금 왕명으로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을 짓게 하는 등, 정안은 이미 하동과 남해안 일대 총림 간에 엄연한 존재가 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박씨 보고에 따를 때, 대장경 재조 사업의 첫해 1237년에 117이 제판 된 것으로 되어 나오나, 앞에서 말한 바 정안의 묘법연화경 7권의 간행과의 사이에 길어서 수개월의 시간적 여유도 자아내기 어렵다. 정안에 의해서 만반의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 김발용 -

▣ 김영윤 - 지난 봄 강진 군사공 시제 참례길에 들렸던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모습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언젠가 TV를 통해 송광사에서 비석 조각을 보관, 정리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김윤만 -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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