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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⑦ (오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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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23 18:17 조회3,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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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⑦ (오창지)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발간한 [오창지]에 게재되어 있는 안렴사공 김사렴의 후손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오창지>

▣안동김씨(구)

▣김암(金巖) 무과

김언(金,王+言) (1588-1637)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공예(金公藝) (1485-1537)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세익(金世翊)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환(金丸)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취(金吹) 음직

▣김종손(金宗孫) (1428-1478) 음직

▣김철손(金鐵孫) 문과

▣김성(金城) (1451-1487) 음직

▣김지(金지) (1455-1534) 음직 수직

▣김계(金 ) 음직

▣김보(金,保+土) 음직

▣김점(金點) (1514-1547) 음직

▣김영(金瑛) 무과

▣김하서(金河瑞) (1551-1610) 사마시

▣김낙서(金洛瑞) (1553-1623) 율곡 이익, 사마시

▣김홍립(金弘立) (1599-1634)

김진(金瑨) (1537-1642)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진(金 ) 음직

▣김대(金玳) (1583-1637) 사마시

김련(金璉)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욱(金頊)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세보(金世輔) 음직 사마시

▣김세필 (金世弼) 사마시 음직

▣김창하(金彰夏) 사마시

▣김봉채(金鳳彩) 음직

▣김석한(金錫漢) 무과

김복원(金復元) (1729-1808)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덕원(金德元) 문과

▣김대현(金大鉉) 사마시

▣김재광(金在光) (1922-1993)

▣김사우(金思禹) (1857-1907)



▣모정리

▣양지리

▣양청리

▣송천서원

▣김덕회(金德會) 효자비

▣김사렴(金士廉) 신도비

▣김복원(金復元) 신도비

▣김공예(金公藝) 묘갈







▣ 안동김씨(구)



<오창지>

---(전 략)---

오은공 金士廉이 고려가 망하니 오근에 은거하여 그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오은공의 장자 안찰사 휘 간(侃)은 무후이고,

둘째아들 휘인비(仁庇)는 출가하여 入寺門하였고

셋째아들 정랑 휘위(違)는 무후이고

넷째아들 절도사 .휘제( )는 2녀를 두었다

5남 소윤공 휘약( )은 아들 지주사공 우주(遇周)와 더불어 오은공을 평총으로 모시고 별세하여 부자 역시 평총으로 하였다.



오은 안렴사공 증손이고 ★지주사공의 아들인 휘환(丸)은 상대의 고향인 오근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땅으로 이거한 후 과시에 합격하여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그 아들 휘종손(宗孫)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그의 장자 휘성(城) 군수공은 여주에 있고,

둘째아들 휘지( )는 현령을 지내시고, 그 후손은 양지리와 괴산 일대에 분포되어 세거하고,

셋째아들 휘계( )는 신창현감을 지내고 역시 오창 고향으로 돌아와 주성, 괴정리로 산재하여 세거하고

넷째아들 휘보(土+保)는 전라도 무안현감으로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여 보령에서 영주한 일파가 있고, 고향인 오창 농소리(탑리)에 돌아와 세거한 일파도 있다.



지주사공의 둘째아들 휘吹(취)는 양성현감으로 후손이 오창 도산에 세거하고 있다.



현재 주성리를 중심으로 591호가 세거







▣ 김사렴(金士廉) (1335-1405)



<오창지>

---(전략)---



1) 문중자료는 다음과 같다.

장자인 간(侃)은 안찰사였고 아들 제( )는 문과 급제하여 도절제사와 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아들 약( )은 소윤인바 종신토록 이조에 벼슬하지 않았으며 손자인(*5남의 오기) 약( )의 아들 지주사 우주(遇周) 역시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막내아들 식(湜)은 문과급제하여 이조좌랑을 지내니 자손들이 대대로 이 고장에 거주하였다.



장자인 간(侃)은 안렴사였고 차자(*5남의 오기)인 약( )은 소윤이었는데 종신토록 이조에 벼슬하지 않았으며, 손자인 약( )의 아들 지주사 우주(遇周) 역시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에 이른 막내아들(*4남의 오기) 제( )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낸 식(湜)이 조선조에 벼슬하여 자손들이 연이어 거주하였다.



그후 유명한 벼슬과 큰 선비와 충효와 절의가 오근에서 많이 나왔는데 이는 모두 공의 내외손이었다. 이 때문에 한 고을의 유명한 터가 되었는 바 지금까지도 안렴사의 수양이라고 전해온다.



아 공은 한 나라에서 대대로 정승 노릇을 한 유후의 가문으로 주나라에 벼슬하지 않은 기자의 인을 이룩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송천서원에 주향으로 모셔졌다. 호가 오은이다.







▣ 김암(金巖)



<오창지>

공은 안렴사의 후손이다. 선조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세포 만호에 제수되었는데,

임진년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죽으니 초혼하여 장례하였다.



<안동김씨족보 순절록>

만호 ▣암(巖) 안렴사공 사렴의 7대손

선조25년임진 왜란 (지세포)

⇒안렴사공 사렴의 7대손 만호 김암은 선조25년임진 왜란에 지세포에서 순절







▣ 김취(金吹)



<오창지>

공은 판교 환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양성현감에 이르렀다.







▣ 김종손(金宗孫) (1428-1478)



<오창지>

공은 판교 환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사헌부 감찰에 이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 김철손(金鐵孫)



<오창지>

공은 현감 취의 아들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 김성(金城) (1451-1487)



<오창지>

공은 감찰 종손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벼슬하여 여러 고을을 맡았으며, 자손들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여러 번 높은 품계를 추증받았다.







▣ 김지(金지) (1455-1534)



<오창지>

공은 군수 성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현령을 지내고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가하였다.

모재 김안국은 묘갈을 찬하여 이르기를

"너그럽고 후덕하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고을을 다스림에 백성을 잘 보살폈으며 집안에 거처함에 화목을 돈독히 하였고 장수와 강녕을 누렸다." 하였다.



<문의향교지>

<문의향교지, 1991>

p 351

안동김씨 통정대부 문의현령 김지 행장

김지 1455(세조원년) 1534(중중29년)

공은 고려말 충신 본관 안동인 문하시랑 정당문학 관지 안렴사 휘는 사렴 호는 오은 공의 5대손이요, 사헌부감찰 증호조참의 종손의 아들로서 1474(성종5) 갑오에 사마시를 거쳐 그후 루전하여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치적이 높았다. 연로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특히 통정대부 당상관의 승차의 성은을 받았으며 1534(중종29) 갑오 9월 초9일 향년 80세에 졸하다. 공의 묘비를 모재 김안국이 찬하니 좌와 같다.



현령공 비문

공 휘지 자次軒 안동김씨 신라경순왕지후 경순왕9세손 왈방경 고려첨의중찬봉상락군개국공 시문충렬 훈업관세 공지9대조야 5대조 여말충신 문하시랑 정당문학 관지안렴사 휘사렴 증조 지주사우주 조승문원판교 휘환 고 증호조참의 사헌부감찰 휘종촌 비광주김씨 용분시위사 대호군 휘처지녀 공성겸태 을해20중 사마시

---(후략)---

김안국찬 (호모재 관지2상 의성인 동국유현)



김지

묘갈명

寬厚淸儉 治邑(심방)血民 居家(심방)淳睦 壽考康寧

의성 모재 김안국 찬









▣ 김계(金 )



<오창지>

공은 현감 지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신창현감에 이르렀다.







▣ 김보(金,保+土)



<오창지>

공은 현감 계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현감에 이르렀다.







▣ 김점(金點) (1514-1547)



<오창지>

공은 참의 공예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벼슬하여 참봉과 병절교위에 이르렀다.







▣ 김영(金瑛)



<오창지>

공은 참봉 奉點의 손자인데 무과에 올라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안동김씨족보 등과방목>

영(王+英) 언정(彦禎) 안렴사공사렴9대손 선조30년정유 무과 판관

⇒ 안렴사공 9대손 김영은 언정의 아들로 선조30년정유에 무과에 급제하고 판관을 지냄







▣ 김하서(金河瑞) (1551-1610)



<오창지>

공은 안렴사의 9세손인 현령 지의 손자이다. 선조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호를 三緘堂이라 한다.

임진왜란에 의병에 종사하였는데 격문을 초한 것이 매우 간절하여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겠는가. 이에 오백명의 의사들을 모집한다. 우리 군주의 강토를 복구할 것을 마음에 기약하는데 다만 군비가 한결같지 못함을 한탄한다. 이에 한 치되는 혈담을 가지고 의로운 제군들에게 두루 올린다." 하였다.



<사마방목>

김하서(金河瑞) / 宣祖 09 式年 進士



【시험년도】 선조(宣祖) 09 (1576) 식년(式年) 진사(進士)

【본인생년】 신해(辛亥) 1551

【본인거주】 청주(淸州)

【부친성명】 김계현(金繼賢)

【안항(형)】 김몽서(金夢瑞), 김응서(金應瑞)

【안항(제)】 김낙서(金洛瑞)







▣ 김낙서(金洛瑞) (1553-1623)



<오창지>

공은 진사 하서의 아우인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특별히 재랑(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아들 진과 언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자손의 귀함으로 인하여 승지에 추증되었다.







▣ 김홍립(金弘立) (1599-?1634)



<오창지>

공은 직제학 공예의 현손인데, 의표가 웅장하고 준수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인조 갑자년(1624)에 공산으로 호종하여 호위한 공으로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637) 동궁을 모시고 심양으로부터 돌아와 병으로 죽으니, 일사 이공은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서쪽 변방의 풍진이 아직 가라앉지 못했으니, 장한 혼 응당 오고 갈 때가 있으리라"







▣ 김진(金 )



<오창지>

공은 부사 진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현감에 이르렀다.







▣ 김대(金玳) (?1583-1637)



<오창지>

공은 진사 하서의 아들인데, 재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계유년(157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사마방목>

김대(金玳) / 光海 05 增廣 進士



【시험년도】 광해(光海) 05 (1613) 증광(增廣) 진사(進士)

【본인생년】 을유(乙酉) 1585

【본인거주】 청주(淸州)

【부친성명】 김하서(金河瑞)

【안항(형)】 김정(金珽)

【안항(제)】 김이(金), 김연(金璉)







▣ 김세보(金世輔) (1623- )



<오창지>

공은 충신인 민숙공 언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으며,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사마방목>

김세보(金世輔) / 顯宗 03 增廣 進士



【시험년도】 현종(顯宗) 03 (1662) 증광(增廣) 진사(進士)

【본인생년】 계해(癸亥) 1623

【본인거주】 경(京)

【부친성명】 김언(金)

【안항(형)】 김세홍(金世弘)

【안항(제)】 김세필(金世弼), 김세익(金世翊)







▣ 김세필(金世弼) (1631- )



<오창지>

공은 현감 세보의 아우인데,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다.



<사바방목>

김세필(金世弼) / 顯宗 04 式年 進士



【시험년도】 현종(顯宗) 04 (1663) 식년(式年) 진사(進士)

【본인생년】 신미(辛未) 1631

【본인거주】 경(京)

【부친성명】 김언(金)

【안항(형)】 김세홍(金世弘), 김세보(金世輔)

【안항(제)】 김세익(金世翊)







▣ 김창하(金彰夏) (1663- )



<오창지>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며 찰방 철손의 현손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사마방목>

김창하(金彰夏) / 肅宗 28 式年 生員



【시험년도】 숙종(肅宗) 28 (1702) 식년(式年) 생원(生員)

【본인생년】 계묘(癸卯) 1663

【본인거주】 청주(淸州)

【부친성명】 김호(金濠)

【안항(형)】 김광하(金光夏), 김명하(金鳴夏)

【안항(제)】 김장하(金章夏), 김수하(金秀夏)







▣ 김봉채(金鳳彩)



<오창지>

공은 현감 진의 증손인데,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우암은 손수

"군자는 마음을 두기를 청천백일과 같이하여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다" 는 십삼 자를 써서 주었으니, 스승의 인정하고 기약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손자 동수는 재예가 뛰어나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문장이 깨끗하였으나 여러번 응시하여도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죽으니 원통하다고 말하였다.







▣ 김석한(金錫漢)



<오창지>

공은 진의 현손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통정대부로 우후에 이르렀다.







▣ 김덕원(金德元)



<오창지>

공은 안렴사의 14세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와 도사에 이르렀는데 출계하여 목천에 살았다.







▣ 김대현(金大鉉)



<오창지>

공은 지평 진의 현손이다. 임오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사마방목>

김대현(金大鉉) / 英祖 38 式年 生員



【시험년도】 영조(英祖) 38 (1762)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85

【본인성명】 김대현(金大鉉)

【본인 자】 군실(君實)

【본인생년】 경인(庚寅) 1710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청주(淸州)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본인과목】 일의(一疑)

【부친성명】 김기(金基)

【부친관직】 /학생(學生)



【시험장소】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









▣ 김재광(金在光) (1922-1993)



<오창지>

오창면 장대리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서울특별시 의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신민당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무려 8선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13대 때는 국회부의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선생은 오창이 배출한 한국정치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정치 이외에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등 한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93년에 졸하였다.







▣ 김사우(金思禹) (1857-1907)

일명 김시묵 (金時默)



<오창지>

한학자이며, 본관은 안동, 자는 仁父, 호는 勇菴,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 출생으로 金好壁의 맏아들이다. 艮齋(간재)의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용암집 3권이 있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에 있으며 1987년 吳鼎煥이 짓고 재종손 金英會가 세운 묘갈이 있다.



<충청북도인물지 (1987)>

196. 김시묵 (金時默)

조선말기의 학자로 호는 용암(勇菴), 돈녕 복원(復元)의 현손인데 전간제(田艮齊)의 고제로 성리학에 밝고 문장에 뛰어나며 효우독행이 출중하였다.

유고에 사장(祠章) 2권, 성리설문답(性理說問答) 3권, 경증(經證) 1권, 비문(碑文) 1권 등 7권이 전한다. 성리학에서는 선사 간재를 뛰어 넘는다고 한다.

문헌 청주시지









▣ 모정리(慕亭里)



<오창지>

띠로 지은 정자가 있으므로 茅亭里라 하였다가 후에 慕亭里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山亭(陶山里) 모정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고려말 안렴사 김사렴이라는 충신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사이군을 하겠다 하여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며, 茅亭의 정자가 있었다 한다.



알림산 : 안렴사 김사렴의 묘가 있다.

고려말에 안렴사라는 벼슬을 지낸 안동인 오은 김사렴(1335-1405)이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조의 건국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이 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는데, 현재 도산 마을 뒤에 김공의 묘소가 있고, 그 앞에는 1988년에 신축한 영모재와 재직사가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1954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조선건국 초기에 안렴사 오은 김사렴이 낙향하여 살면서 그의 후손인 안동김씨 안렴사공파가 많이 살아 집성촌을 이루었고



김태준, 김창회







▣ 양지리(陽地里)



<오창지>

안동김씨재실 : 산수골에 안동김씨 재실이 있다.

이 가운데 산소동에 있는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1485-1537)의 묘갈은 조선중종34년(1539)에 처음 세웠던 것을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고



은행정 마을에 있는 송천서원은 본래 옥산면 환희리 송천 마을에 있었던 서원인데, 조선고종8년 (1871)에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7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어 다시 세운 것으로 김사렴 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이제신 최석정 이인혁 이효석 남구만 박문수 이종성 김여량의 15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한다.



양지리는 마을 대부분 지역에 안동김씨가 누대로 세거하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김재광 국회부의장, 8선의원

김재승 충주시교육장, 음성교육장, 청주시교육장

김재곤 상당초등학교 교장

김재억 조선비료 총무부차장

김재욱 도청 경제과장

김재기 유선방송협회장, 한국주택은행장, 한국외환은행장, 한국민속씨름협회 총재

김건회 세무사

김재찬 신협이사장

김재성 한국교원대학교 도서관 열람과장

김태형

김용회

김인회

김기회

김재운

김재응







▣ 양청리



<오창지>

현재 양칭이와 回岩마을로 이루어진 양청1리와 時才마을로 이루어진 양청2리로 분구되어 있으며 시재마을은 時才, 耆在, 詩才라 일컬어졌다.



양칭이 마을에는 문화류씨가 많이 살고, 시재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어 각각 집성촌을 이룬다.



김재봉 법무사

김윤회 진천경찰서장

김재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김인회 청원군 산림과장

김운회 대한항공 파리지부장, 주성여행사

김영회 청주전매청 주임

김성묵 오창의용소방대 대장

김재학 오창농협 부장

김재창 서울은행 대전지점 차장

김관식

김복회

김예묵

김재관

김건묵

김융회

김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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