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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陵所營建事沿革-안동김씨 화수록 2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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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8-02 19:05 조회1,5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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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화수록 2집 (1937년 발행추정)에서 옮겨 적었습니다.

 

忠烈公陵所營建事沿革

忠烈公陵所는 現今安東郡祿轉面竹松洞(自來陵洞)에 在하니 高麗忠烈王二十

六年庚子에 功勳을 表키 爲하야 國葬禮를 行하고 陵所로 稱號하시며 齋宮을

建立하고 僧侶로 陵守를 삼어 守護케 하시다.  麗朝變革後로 保護가 等閒하고

墓下子孫은 稀少하며 在職한 後裔는 奉公에 熱中하야 省事가 不完全하고 齋

直은 僧侶가 變하야 俗人이 됨으로 公의 外七代孫되는 光山金氏가 在近하야

 誠力守護케 되다.  光山金氏는 本孫이 省事가 等閒함을 機會로 삼아 陵所前

後에 入葬을 自由하게되엿는바 李朝仁祖時에 公의 十二世孫 忠翼公諱時讓荷

潭公이 慶尙監司로 赴任케되여 省墓한 同時에 守護凡節이 悚漏함을 痛歎하시

와 陵所前後에 入葬한 光金의 墓를 移掘키로 決心行事하셧다.  陵所前에 在한

 翰林金垓之塚을 掘移하고 陵所後에 在한 金孝盧之塚을 掘移코자하던 當夜에

 忠烈公先祖顯夢이 有하야 擧事를 中止하다(荷潭公夢에 忠烈公이 말삼하시되

 後墓는 내가 許與한 入葬이니 掘移치 말고 同所守護하라. 云云)


位田과 石儀룰 修補하셧고 其後 公의 十三世孫諱緻號南峰公이 慶尙監司赴任

時에 安東郡의 巡察하사 省墓次로 留宿中 陵所後에 在한 光金塚을 掘移키로

 決心하셧다가 不幸이 安東邑에서  疾이 發하야 故人이 되셧다(花山騎牛客

이 頭載一枝花 一句로 命終 云云) 以來로 安東義城其他附近에 居住하는 族人

의 誠意로 歲一祀를 繼續하여 守護에 責을 自任하엿다.  大正三年度 林野査定

同時에 吾金과 光金은 林野所有權을 獨占하랴고 爭議가 有하던바 陵所 所在

三町餘步는 吾金二人과 光金一人과 共同所有을 設定하고 其他는 光金의 獨所

有로 認定케 되었다.  在來齋宮芼家上下二棟에 在하야는 異議업시 吾金의 所

有될 것은 世所共知로 自信하엿던바 光金은 卒然이 家屋登記을 自己것으로

 暗行하엿다.  吾金은 此에 憤慨하야 累次 異議를 文字로나 言論으로 하여왓

스나 衆議不一하여 法庭에 判決을 求치안코 和協的解結을 期한바이라.  此事

端으로 因하야 忠烈公營建事業發起가 되엿다   安東義城宗人의 發起로 計劃

案을 出版하야 全鮮諸族에게 通告하엿스나 時日의 關係로 成事키 難하여 京

城에 와서 在京 族人 尙默,思元等과 協議한바 目的은 不變하고 方便을 改定하

야 大同譜所로 組織하고 譜事剩餘金으로 營建事業經營을 하엿엇다.  總務 尙

默氏는有故辭免하고 榮珌氏가 總務된 三年에 譜所掌財榮璨氏가 死亡됨으로

 譜所는 自消되고 말엇다  昭和九年度甲戌四月에 尙默,在雄은 大同宗約所를

 設立하고 大同譜를 二個年만에 完成한 際에 應默族은 自己父親榮璨氏掌財時

 先替金 要求로 族譜를 差押하엿다.  同時에 相範,相烈,光默,思元諸氏는 市內

宗會랄 召集하야 應默의 族譜差押을 勸告解除케하고 宗約長 尙默氏를 勸告辭

免한後 尙範氏로 宗約長, 思舜으로 庶務理事, 光默,思元,相烈氏를 審議員을

 選定하야 宗務를 委任한바 思舜은 相範씨를 利用하야 宗事에 錯誤가 有하고

 損害가 不少함에도 中樞機關인 審議員等은 監督에 等閒하엿다.  本所는 解消

할 境에 至하엿슴으로 地方諸族은 忿起하여 代表者會를 開催하고 相範,思舜

을 勸告辭免하엿스며 恒默氏를 宗約長에 再選하야 宗事를 處理케하다.  族譜

代剩餘金으로 陵下位畓八斗落, 檜谷齋舍六間一棟을 買收하고 五斗落位田은

昭和十年度에 素山宗人 壽五氏와 皆谷宗人 永會氏의 斡旋으로 檜谷族人 達默

이 公의 胎降垈田을 使用한 表示로 提拱된바 되고 在來宗土를 忠烈公派宗中

으로 合有登記를 履行하엿다. 그러나 陵洞齋宮建築과 石儀修補를 繼續的으로

 進行함에 用力하고 諸族의 誠意를 期待함니다.

 

丁丑九月下澣


翼元公二十歲孫 淸州 在雄 記

 

**정축년은 1937년으로 추정합니다.




▣ 김항용 -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아하, 70년된 자료군요.
▣ 김윤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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