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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02---정간공 김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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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8-12 05:37 조회1,5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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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파내 주요 조상님 소개



7.파내 주요 조상님 소개



1) 貞簡公 金永煦 --- 안렴사공의 祖父



■ 정간공 연보



○1292(충렬왕18)∼1361(공민왕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국헌(菊軒)<급암시급, 척약재학음집>. 온재(穩齊)<화해사전>.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문영공(김순)과 제평군부인 양천허씨(허공의 따님) 사이에서 4남(영돈, 영휘, 사순, 영후) 3녀(정책, 백이정, 별리가불화에게 출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제현, 이달존, 박충좌, 민종유, 김영돈, 안목 등과 함께 백상당문인 24인의 한 사람으로 둘째매형 백이정의 문인이다. <1860 화해사전 제자서술>



○(28세) 문영공(김순)께서 乙未(=1319년)년에 또 선친(=김방경) 산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季子(계자=막내아들)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행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김순)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1321 민지찬 김순묘지명>



○(30세) 永煦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1321 민지찬 김순묘지명>



○(34세) 1325년(충숙왕12) 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36세) 1327년(충숙왕14) 4월에 상주목사가 되어 객관(상주 상산관)을 완성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안축의 근재집 상주객관중영기>,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수기>



1327년(충숙왕14, 정묘) 12월 1일 아침, 법주사 자정국존이 입적하기 직전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1342 이숙기찬 전원발서 법주사자정국존비문>



○(41세) 1332년 永煦는 봉선대부 자섬사사이다. <1332 이제현찬 김순처허씨묘지명>



○(48세) 1339년(충숙왕복위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김영후(金永煦)에게 주어서 중서성에 제출하게 하였다.

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왕에게는 양이형제(兩姨兄第)의 관계가 있는 까닭에 왕이 김영후에게 초 1백 정(錠)과 능직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주어 보냈다.



○(50세) 1341년(충혜왕복위2) 6월 조적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삼사우사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봉해져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받았다.



○(51세)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52세) 1343년(충혜왕 계미후4) 봄 2월 갑진일에 왕이 용사(勇士)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하다가 밤에 좌우사 낭중 김영후와 같이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시었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앉히고 마부를 불러 이르기를 “네 주인 낭중이 자기 타던 말을 나에게 선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튿날 김영후가 이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

1343년(충혜왕4)에 征東省郞으로 있었다. <안축의 근재집중 상주객관중영기>



○(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55세)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61세) 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공(=김방경)의 손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영후)의 집에 공의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했다 <1350 안진발 충렬공행장>



○(65세) 1356년(공민왕5, 병신년) 2월 갑술일에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70세) 1361년(공민왕10 신축) 5월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상당군부인 청주한씨(父한보, 祖한강, 曾祖한광윤) 와의 사이에서 2남(김천, 김장)을 낳았다. <족보>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위 연보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를 저본으로 하여 몇가지 자료를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 (36세) 1327년 상주목사로서 상산관 중수



<안축의 근재집> 상주객관중영기

1343년(충혜왕4)에 내(=안축)가 상주목사로 명을 받고 이해 4월 주에 도임하여 정사를 보니 근래 가옥한 행정에 시달려 민생과 문물이 流散하고 마을들이 모두 쓸쓸하여 옛적에 公廳이나 學宮 神社와 佛寺가 모두 퇴폐하고 오직 客舍만이 웅대하고 수려하여 이쪽 영남에서는 제일 훌륭하여 廳堂과 基位의 규모와 포치가 굉장하며 스스로 여유가 있고 그 마땅함을 얻었으므로 혼자 내심에 이는 반드시 속인의 범상하게 만든 것이 아니리 라고 생각되어 邑人에게 물었더니 지금 征東省郞으로 있는 金相國 永煦가 세운 것이라 하였다.

이 州가 8방으로 통달하는 거리에 있어 전령과 奉使하는 자가 하루도비는 날이 없었는데 옛적 객관이 좁고 낮으며 또 연대가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기우러져 있으니 항상 좋지 못함이 손님들의 나무람을 들어왔다.

지난 1327년 4월에 그가 이 州의 목사가 되어 와서 이 객관을 중수할 생각이 있었으나 민생의 노고와 곤궁을 염려하여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仁愛로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고 엄중하게 官紀를 바로잡아 왔다.

얼마후 읍인들이 德治에 힘입어 비로소 생활에 희망을 가지게 되니 이러한 힘을 모아 한번 公恩에 보답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州民을 사역할 수 있음을 알고 재물을 모으고 부역을 명하며 기한을 정하여 起工하니 庶民들이 기꺼이 호응하여 수고로움을 잊고 就役하였으며 豪黨들도 협의하여 힘을 다하니 이렇게 하여 州民을 괴롭히거나 농사에 방해함이 없이 짧은 시일내에 객관이 완성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장하도다. 그가 적은 백성의 힘으로 세웠으나 실은 목사의 지혜로 이룩된 것이다. 州民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하고 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이 이러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에 戶와 窓을 얽어 매어 비바람에 대비하는 비유가 있고 書傳에는 아버지가 창업을 하면 자손이 이어서 성공한다는 비유가 있으니 그가 廟堂에 재직하여서 經紀를 세우고 方略을 베풀어서 거듭 王家를 번영하게 한 것을 이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다 하겠다.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내(=김종직)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였다.



***도5 옛 상산관 (경북 상주 상주여중 자리), 도6 현재의 상산관 전경 (경북 상주 만산동),

도7 현재의 상산관 후경,

도8 법주사 자정국존비 (보은 속리산 금동대불 뒤쪽), 도9 자정국존비 비문 (金永煦 휘자 확인 가능)***





■ 정간공 관련 시문



<급암시집 (민사평)>

大叔菊軒公 新構野莊 與吾壽春莊隔江相望 六月 一日 予適來吾莊 聞公亦到新莊欲謁 而風作浪湧 不可禁當 不勝鬱鬱 因成?絶句二首 拜呈左右 ★金永煦

百頃平湖侶鏡光 백경평호려경광

漁村兩岸正相望 어촌양안정상망

晩風吹浪忽難渡 만풍취랑홀난도

幾恨無回謁渭陽 ○한무회○위양

樓臺巳見白蓮社 누대사견백련사

風浪未過靑草湖 풍랑미과청초호

此是坦師當日句 차시탄사당일구 ★禪坦

朗吟空復飮村  낭음공부음촌고



⇒번역 :



<척약재학음집 (김구용)>

樓上次韻奉呈菊軒相國 루상차운봉정국헌상국

春風無限客中愁 춘풍무한객중수

散盡賢侯半日留 산진현후반일류

却恨不如樓下水 각한불여루하수

溶溶(삼수변)樣樣向西流 용용양양향서류



누각 위에서 차운하여 국헌상국께 받들어 드리다.

봄바람에 나그네의 수심이 끝이 없는데

어진 수령들이 다 흩어진후 한나절을 머무네

도리어 누각아래 물만도 못함을 한탄하나니

도도하게 출렁대며 서쪽으로 흐르네







▣ 김태서 - 새로운 정리작업을 시작 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 김재원 - 자료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솔내영환 - 급암,척약재 두분 모두의 시호가 문온공이십니다.

▣ 김주회 - 1차교정 200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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