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07---덕평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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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8-14 02:50 조회1,661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07---덕평파
8. 안렴사공후손 세거내력
♣♣♣안렴사공 후손의 분파상황♣♣♣
오은공의 장자 안렴사 휘侃(간)은 무후이고, 2자 휘仁庇(인비)는 출가하여 입사문하였고, 3자 정랑 휘違(위)는 무후이고, 4자 절도사 휘 (제)는 무남2녀를 두어 1녀는 전의인 이사혜이니 효정공(이정간)의 자부이다. 이씨문에서 5세기를 지낸 지금까지 년향으로 외손 上墓를 행하고 있다. 2녀는 정랑 이훈이다. (본관불명) 5남이신 소윤공 휘 (약)께서는 子지주사공 휘遇周(우주)와 더불어 오은공을 평총으로 모시고 묘하에서 호천명인하기를 마지 아니하다. 별세하여 부자분 역시 평총으로 하게 하였다.
지주사공(*우주)의 子 휘丸(환)께서 여주 백양동으로 이거하여 비로소 과시에 응시하여 친시에서 합격되어 사정으로 한림주서를 거쳐 벼슬이 승문원판교에 끝이었다. 그아들 사헌부감찰 휘宗孫(종손)께서 아들 4형제를 두시었으니 장자 군수공 휘城(성)이고, 장자 안원군 휘公亮(공량)이요 그 장자 현감공 휘浣(완)께서는 천안 원이도에 거하시어 후손으로 ♣(01)德坪派(덕평파)라 하고 2자 목사공 휘滌(척)께서는 전라도 나주에 계시어 후손이 ♣(02)光山派(광산파)가 되고 3자 화산군 휘澍(주)께서 여주에 계시었고 후에 음죽 율목 (금 이천지내) 에 거하여 ♣(03)花山君派(화산군파)가 되고 군수공(*성)의 2자 도정공 휘公奭(공석)께서 거여주하여 ♣(04)여州派(여주파)가 되고 3자 목사공 휘公望(공망)께서는 거양주하여 후에 ♣(05)揚州派(양주파)라 칭하고 일운 ♣金浦派(김포파)라고도 한다.
감찰공(*종손)의 2자 현령공 휘土+遲(지)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장자 사직공 휘公傑(공걸)의 후손이 괴산문광에 살아서 ♣(06)文光派(문광파)라 하고 2자 승지공 휘公藝(공예)께서는 숙부 신창현감공 휘 (계)에게로 출계하였고 3자 참봉공 휘公彦(공언)께서는 목천 광기에 계시어 후손이 ♣(07)廣基派(광기파) 일파 운 ♣延豊派(연풍파)가 되고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그의 아들 판관공 휘夢瑞(몽서) 후손으로 ♣(08)三山派(삼산파)라 하고 2자 진사공 휘應瑞(응서) 후손으로 ♣(09)北二派(북이파)라 하고 3자 삼함당공 휘河瑞(하서) 후손으로 ♣(10)陽地派(양지파)라 하고 4자 사마공 휘洛瑞(낙서) 2자 민숙공 휘王+言(언) 후손으로 ♣(11)論山派(논산파)라 하고
군자감정공(*공연) 2자 휘繼良(계량)은 무후이고 3자 참의공 휘繼貞(계정) 후손이 ♣(12)靑川派(청천파)가 되고 4자 휘繼雄(계웅) 후손을 ♣(13)庇安松谷派(비안송곡파)라 하고 5자 증참판공 휘繼英(계영) 후손을 ♣(14)盤灘派(반탄파)라고 호칭하고 있다.
감찰공(*종손) 3자 신창현감공 휘 (계) 후손으로 ♣(15)梧根陰地派(오근음지파) 신창공파라 하고
4자 무안현감공 휘土+保(보) 장자 휘公達(공달) 후손으로 ♣(16)梧倉塔里派(오창탑리파)로 하고 2자 휘公逸(공일) 후손으로 ♣(17)保寧派(보령파)라 하고
지주사공(*우주) 2자 양성현감공 휘吹(취) 후손으로♣(18)陶山派(도산파)라 하고
3자 휘演(연) 후손으로 ♣(19)內板派(내판파)라 하고
4자 휘石+勵(려) 후손으로 ♣(20)鐵原派(철원파)라 한다.
안렴사공(*사렴) 6자 좌랑공 휘湜(식) 장자 직장공 휘自麗(자려) 장자 대구교수공 휘 (극) 후손으로 ♣(21)永同派(영동파)라 하고 2자 휘擲(척)은 무후이고 3자 생원공 휘 (린) 후손으로 ♣(22)鎭川派(진천파)라 하고 4자 휘려(려) 후손으로 ♣(23)黃澗派(황간파)라 하고
좌랑공(*식) 2자 서령공 휘自荊(자형) 후손으로 ♣(24)曾坪派(증평파)라 하여 등?으로 분파가 형성되어 있다.
오은 안렴사공 증손 휘丸(환)께서는 상재지향인 오근서 출사하기가 미안해서 여주땅으로 이거하여 과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판교에 이르렀고, 그 아들 휘宗孫(종손)께서는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그의 장자 휘城(성) 군수공께서는 여주에 계시고, 2자 휘 (지)께서는 문의현령으로 있다가 퇴임후 오근으로 돌아오시고, 3자 휘 (계)께서는 현 충남 온양 근지인 신창현감으로 있다가 역시 고향 오근으로 돌아오시고 4자 휘土+保(보)께서는 전라도 무안현감으로 충청도 보령으로 이임되시어 보령에서 영주한 일파가 있고 고향인 오창 농소리(탑리)에 돌아와 세거한 일파도 있다.
지주사공(*우주) 2자 휘吹(취)께서는 양성현감으로 후손이 오창 도산에 세거하고 있고
3자 휘演(연)께서는 그 후손이 연기 내판에 세거하고
4자 휘石+勵(려)께서는 후손이 철원에 집거하고 있다.
안렴사공(*사렴) 6자 휘湜(식)께서는 이조좌랑으로 퇴임후 鎭木(진천-목천)지간에 계시고
장자 휘自麗(자려)께서는 직장이시고 그의 장자 휘 (극)께서는 대구교수로 후손이 영동에 세거하고 2자 휘擲(척)은 절세되고 3자 휘 (린) 생원공 후손은 진천에 仍居(잉거)하고 4자 휘麗+ (려)께서는 현감으로 후손이 황간에 거주하고 5자 휘節(절)께서는 녹사로 무후했다.
좌랑공(*식) 2자 휘自荊(자형)께서는 서령으로 후손이 今증평읍(舊청안현 남면 죽리)에 세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분파되어 주거 내력을 약기한다. 그리고 후기 미수보에 입보자와 미수록 편보자를 합하면 세대수가 근어 2만 무려 10만명으로 추측된다. 이상은 세전집단을 간추려진 것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하여 거주않는 곳이 없다. <고충지, 1982>
♣♣♣01 덕평파♣♣♣
○안렴사공 사렴(士廉)의 종손 직계가 되는 안원군파(安原君派)는 옛 지명을 따라 덕평파(德坪派)라 부르기도 하는데, 안원군 공량(公亮)의 조부 휘자가 종손(宗孫)이어서 종손 또는 종손파라 하지 아니하고 사손(嗣孫) 또는 사손파(嗣孫派)라 한다. 소윤공 약( )- 지주사공 우주(遇周)- 판교공 환(丸)- 참의공 종손(宗孫)- 참판공 성(城)- 안원군 공량(公亮)- 진천현감 완(浣)으로 이어지는 사손의 가계로 충남 연기군 소정면 운당리·소정리, 천안시 풍세면 미죽리,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 등지에 많은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12) 판교공 김환(金丸)
지주사공의 아들인 환(丸)은 안렴사공 이래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파묻고 봉분도 하지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그리고 자손 중에서 고려조에 이미 벼슬하였던 사람은 다시는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라." 는 충절의 유훈이 이어져오는 상대(上代)의 고향인 오근(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 땅으로 이거한 후 1442년(세조 임술년) 친시(親試)에서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한림주서를 거쳐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도 : 판교공(김환) 묘
13) 참의공 김종손(金宗孫, 1428∼1478)
丸의 아들 宗孫(1428∼1478)은 1447년(丁卯)에 음사로 벼슬에 나가 사헌부감찰에 이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宗孫의 아들 城(1451∼1487)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여러 고을의 군수를 맡았으며, 1487년 홍치황제등극 진하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가셨다가 통주(通州)에서 졸하시니 병조참판에 증직되시고, 자손들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여러 번 높은 품계를 추증받았다.
**도 : 참의공(김종손) 묘
14) 안원군 김공량(金公亮, 1472∼1544)
城의 아들로 안원군파의 파조가 되는 公亮(1472∼1544)은 안렴사공의 7세손으로 자를 필지(弼之) 호를 양곡(楊谷)이라 하였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올라 안원군(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공은 묵재(默齋 李深源, 1454∼1504)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과 덕행이 순결(純潔)하고 아름다웠는데, 연산조때 절제과로 등제하였으나 스승과 뭇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전시(殿試)에 나가지 않고 세사(世事)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고요히 지내셨다.
묘는 경기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고, 묘갈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가 썼다. 정사룡의 문집 [호음잡고](湖陰雜稿)에 <유명조선국김군공량묘갈명>(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이 실려 있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었다. 안원군의 묘갈을 書한 로(魯)는 우리 가문의 서운관정공파 희수(希壽)의 아들이며 당대의 명필로서, 이외에도 승지공 김공예(金公藝, 1485∼1537) 묘갈, 아버지 김희수(金希壽, 1475∼1527) 묘비를 書하였다.
**도 : 안원군(김공량) 묘
**도 : 안원군 묘갈 (정사룡찬, 김로서)
1520년(3자 주 8세) 기묘년 주계군 성광 이심원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사문(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내구(內舅)인 충정공 허종(許琮) 상공께서 벼슬에 나아가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과 심정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이신 문강공 박세희(朴世熹)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간사에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机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1544년 5월 27일 판서공(공량)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송별하고 부의하는 뜻을 내리셨다. 9월 17일 모친 정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10월 20일에 고와 비를 여주 백양동 선영 안 정좌 벌에 합장하였다.
1546년 8월 15일에 선고비의 묘도에 비갈을 세웠다. 호음 정사룡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의 동고 김로 교리가 글씨를 썼다.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우암집 연보>
○안원군 묘갈명
-몰후 2년, 1546년 호음 정사룡 찬, 동고 김로 서
-호음집에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 수록
○묘갈 탁본
-2003년 10월, 여주문화원
○묘갈명 번역 (2004년 6월 4일)
-번역 : 우진(祐振, 안원군 16세손, 1915生)
-윤문 : 주회(柱會, 안렴사공 21세손)
-추진 : 용주(容周, 안원군 세손)
■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
원래 김씨가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부터 이어져 전해 왔으니 여러 김씨 중에서 안동김씨(安東金氏)가 가장 문벌(門閥)이 좋으니라.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주서를 거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내신 諱환(丸)은 군의 증조부이시며 조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의 증직을 받으신 諱종손(宗孫)이시고 부는 군수(郡守)를 지내시고 명나라 홍치황제등극진하사종사관(弘治皇帝登極進賀使從事官)으로 중국에 다녀 오시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을 받으신 諱는 성(城)이시니 이하(以下)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군수공께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받은 허손(許蓀)의 따님을 취(娶)하여 성화 임진년(成火 壬辰年)에 군을 낳으시니 군의 諱는 공량(公亮)이요 字는 필지(弼之)라.
군이 나신지 열흘도 못 되어 모부인이 돌아 가심으로 증조모 밑에서 자라시니 자랄수록 말수가 적으시며 장난과 희롱을 않으시고 스스로 글 읽기를 좋아하여 종실 주계군(宗室 朱溪君)에게 수업하시니라.
그때에 군의 외삼촌인 충청공 허종(忠貞公 許琮)의 덕망이 한 세상을 덮었는데 일찍이 군에게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고하였으나 군께서는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심으로 허충정공(許忠貞公)이 춘추전(春秋傳)을 읽어 보도록 시험한 결과 군께서 이에 응하시어 춘추전을 외우는데 물이 흘러 가는 것처럼 거침없이 외우심으로 크게 칭찬과 탄식을 받았으며
또한 군께서는 여러번 지방에서 천거(薦擧)를 받으시어 더욱 공부에 힘써서 장차 과거(科擧)에 나가고자 큰 포부를 가졌으나 마침 연산군(燕山君)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서 조정대관(朝廷大官)을 함부로 죽임으로 군께서는 드디어 세상과 인연을 끊으시고 두문불출하여 원임고관(原任高官)들과 친교를 맺으시고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듯 처세하였으나 항상 편안한 모습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며
다만 글과 술로 스스로 즐기시니 자질배(子姪背)와 제자(弟子)들이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는데 종일토록 강의(講義)를 쉬지 않으시고 춥고 더움으로 인해 강의를 퍠지(廢止)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군께서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시어 내상(內喪)을 당하실 때에 모든 일을 분수와 예절(禮節)에 맞도록 처리하시고 계모(繼母)를 섬기실 적에는 항상 얼굴 빛을 환하게 하여 효도를 다 하시며 또한 두 아우를 가르칠 적에는 우애로운 마음으로 정성껏 지도하시고 매양 생신 날에는 세속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부모를 사모하는 슬픔에 잠기셨노라. 천성이 순진하심으로 겉모양을 닦지 않으시고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당초의 마음을 변치 아니 하시니라.
가정 갑진 오월 이십칠일 (嘉靖甲辰五月二十七日)에 숙환으로 집에서 별세(別世)하시니 춘추가 七十三세에 하세(下世)하시다.
군의 배위(配位) 이씨는 광양현 팽수(光陽縣 彭穗)의 따님이시니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 제수(祭需)를 항상 정갈하게 차리시고 손님을 접대할 적에는 술과 안주를 넉넉하게 마련하시어 군께서 곤란한 처지를 당하지 않도록 하심은 모두 내조(內助)에서 이루어짐이라.
또한 숙환에 의하여 별세(別世) 하시니 수는 七十을 사시니라. 군의 장지(葬地)를 먼저 여주 사동(麗州 蛇洞)에 정하였으므로 이에 합장하니라.
三남一녀를 두시니 장남은 완(浣)이요 차남은 척(滌)이니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三남은 주(澍)이니 기해년 문과(己亥年 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지금 훙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있는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한 세상을 울리고 女는 별제(別?) 이직(李직)에게 출가하니라.
완(浣)은 첨사 강석경(僉使 姜碩卿)의 딸에게 장가 들어 二남幾녀를 낳으니 남에는 충남(忠男) 효남(孝男)인데 모두 어리고 녀는 장중제(張仲悌)에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니라. 척(滌)은 박양근(朴養根)의 딸에게 장가 들어 一남을 낳으니 이름이 인남(仁男)이요, 주(澍)는 종실 진양수 영(宗室 鎭陽守 渶)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一녀를 낳으니 이름이 순남(順男) 정남(正男)이요 모두 어리니라
이에 명(銘)하여 가로되
높고 화려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좋은 공부와 훌륭한 학덕을 전해 받아
학문이 성취되고 행실이 도타와서
벼슬과 녹봉을 헌신짝과 같이 버리시고
스스로 몸을 낮추어 그 종적을 감추고 숨어 사시니
평소에 쌓은 덕에 의하여
신발이 문 앞에 가득하도다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취하는 바를 반대로 버리니
비록 편안하게 세상을 마쳤으나
마침내 배운 바 학문과 재주를 다 쓰지 못하고
숨은 덕이 빛났으니
높은 명망과 좋은 칭송을 받은 것이 부끄럽지 않도다.
지금은 운수가 막힌 것 같지만
후세에 운수가 대통하리라
○바로 이 안원군 公亮의 직계 사손들이 세거해 온 곳이 바로 소정면 운당리이다. 안원군파가 처음으로 연기땅에 연고를 맺은 것은 바로 안원군의 아들인 진천현감 완(浣)때 였다고 전해진다.
구전되는 바로는 안원군이 전의현 덕평면 운당리·원덕리 (현 소정면 운당리) 일원의 토지와 임야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아 아들인 진천현감 浣에게 관리토록 함에 이때부터 안원군계의 가문이 이곳을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운당리에 영장댁(호준) 맞은 편에 있는 하마(下馬)터로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역시 사손파 안동김씨의 위세를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17대손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사손인 龍植(1936생)의 주관으로 1995년 운당리에 진천현감공 이하 모두 15대 34위의 장자·장손의 묘소를 이장하여 모시고 있다. 묘소입구에는 해방이후 이전한 안원군파 재실이 있다.
15) 김완(金浣)
안원군 公亮에게는 모두 3子(완,척,주)가 있었는데, 장자인 진천현감 浣은 자를 정숙(靜叔)이라 하였고 진천현감을 지냈으며 증직으로 좌승지를 추증받았다. 부인은 안동강씨이고 묘소는 율목동에 있던 것을 이장하였는데 이장시 명기(明器 : 조선시대 士族들의 묘소에 함께 묻는 부장품)가 출토되어 사손이 보관하고 있으며 목관과 복식도 그대로 출토되었다고 한다. 목관은 7자×8자반의 겹관으로 복식은 누비이불등의 고급 복식이 400년 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관끈도 그대로 보존되어 그 끈을 잡고 운구하여 이장하였다 한다.
차자인 척(滌)의 후손들은 전라도 광산으로 이거하였고, 3자인 주(澍, 1512∼1563)의 후손들은 경기도 여주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도 : 김완 이하 15대 34위 장자장손 묘역
**도 : 김완묘 출토 명기
16) 김충남(金忠男, 1530∼1618)
浣의 아들인 충남(忠男, 1530∼1618)은 자를 서경(恕卿)이라 하였고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19) 생원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교관에 올라 토산현감을 역임하였다. 89세로 장수하여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퇴계 이황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실려 있다. 忠男은 아들이 없어 壽男(공량弟 公奭의 후손)의 子인 엽(曄)을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군위현감과 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 김정삼(金鼎三)
정삼(鼎三)은 안렴사공의 12대손이며 숙종조시 武科급제하여 선전관, 비변랑감찰, 함평현감, 낙안구수를 역임하였다. 1715년(강희54)에 세운 <군수김후정삼애민청덕선정비>(郡守金候鼎三愛民淸德善政碑)는 전남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 낙안읍성 향교입구에 있다.
**도 : 김정삼 선정비 (낙안읍성 향교입구)
18) 김호준(金好焌, 1867∼1914)
정상(鼎相)의 가계에서 한말에 희수(喜秀 : 족보명 喜源)- 호준(好焌 : 족보명 榮澤)으로 이어지는 인물을 배출하였다. 喜秀(1821∼1878)는 음직으로 1878년 선공감가감역에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好焌(1867∼1914)은 1886년(고종23) 무과에 갑과 1인으로 급제한 뒤 상서원주부, 훈련원판관, 첨정을 거쳐 토산병마절도제위, 그리고 1893년에는 용양위부호군으로 경주영장에 임명되어 안동지역의 동학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의 교지와 유품을 사손이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안동일대의 동학 토벌에 관련된 일기 [영가일기](永嘉記事)는 필초본으로 당사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사료로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도 : 김호준 유품
○안원군파에서는 文科급제 1명(환), 生員進士급제 6명(충남, 원후, 인, 철, 정운, 정신), 武科에 21명(숙, 근후, 구, 언국, 명구, 숙, 현국, 명악, 명혁, 정삼, 중국, 명익, 영수, 주영, 좌국, 명준, 영택, 정서, 정덕, 사묵)이 급제하였다. 조선조 사마방목을 보면 忠男의 부친 완(浣)은 봉렬대부 行진천현감을, 元厚의 부친 엽(曄)은 통훈대부 行활인서별제를, 철( +喆)의 부친 명준(命峻)은 통정대부 行장연현감 해주진관명마절제도위를 지냈음을 알수 있고, 이외에도 안렴사공파 세보를 보면 구(石+求)는 구례현감을, 명혁(命赫)은 여산도호부사를, 정상(鼎相)은 경흥부사를, 좌국(佐國)은 다대첨사를, 정덕(鼎德)은 정평부사를 지내고 분무원종훈에 책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원군파 후손으로 在完은 1950년대에 지방의회의원과 교육위원회위원을 역임하였고, 在元은 근 30여년간을 오직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현재 태원, 재은, 호식은 사손 용식과 함께 종사일이면 남다른 정성을 보여주어 종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在龍(1956생)은 안렴사공 인터넷 홈페이지(http://hgdryj.hihome.com)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운당리에는 안원군파 외에도 안렴사공 후손이 많이 세거하고 있는데, 공석(公奭)후손 엽(曄)이 공량(公亮)후손 忠男의 양자로 들어올 때, 형 엽(曄)을 따라 이거해 온 담(曇)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으며, 1980년대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在益(1938∼1983)은 그의 후손이다. 또한 공언(公彦)후손 일파가 이거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漢植(1962생)은 현재 연기군의회의원(2002년 당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 내용은 <안렴사공파 세보>와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책자를 저본으로 하여 몇가지 자료를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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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계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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