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12---문광파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8-22 03:10 조회1,587회 댓글0건

본문



♣♣♣06 문광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지)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장자 사직공 휘公傑(공걸)의 후손이 괴산문광에 살아서 文光派(문광파)라 하고 공걸의 묘는 괴산읍 수진리에 있으며, 후손들이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청원군 북일면 덕암리 등지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생원진사 급제 5명(지, 근, 계선, 영기, 규), 무과급제 1명(두근)이 있고, 영기는 율곡 문인이며, 유적유물로는 김만협,김일 효자각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김태룡1905 송덕비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이곡초), 김태선1925 공덕비 (괴산군 괴산읍 금산리) 등이 있다.

○조선조 사마방목을 보면 김근(金近)1602-는 김성길(金成吉)의 아들로 자 지원(知遠) 괴산(槐山)거주 1657년 진사급제하였고 묘는 괴산 청안 지경리에 있고, 김계선(金繼善)은 현신교위(顯信校尉)충무위(忠武衛)/부사직(副司直) 김공걸(金公傑)의 아들로 자 종효(宗孝) 김제(金堤) 거주 1540년 성균진사급제 하였으며 성균관장의를 지내고 묘는 전북 고부 벌말면 조촌리에 있으며, 김규(金珪)1613-는 김영기(金永期)의 아들로 고부(古阜) 거주 1654년 생원급제하였다.

○天祥(천상)은 판관 통정대부를, 永期(영기)는 율곡선생에게 사사하고 을축 사마급제하여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 불사하였으며, 聲五(성오)는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 증승정원좌승지하였으며 묘는 금구 초처면 신봉리이다. 斗根(두근)은 갑인무과하고 묘는 문광면 문법리에 있으며, 榮俊(영준)은 돈녕도정을 역임하고 묘는 신기리에 있으며,

○聖會(성회)의 아들 泰鯨(태경)은 철학박사이고, 泰日(태일)1926-은 괴산잠업협동조합장을, 泰然(태연)은 충주군수를, 泰璇(태선, 호德岩)1925-은 군수를 역임하고 괴산읍 錦山리에 공덕비가 세워졌으며, 洙會1928-는 금화지구전사하여 묘가 국립묘지에 있으며, 泰麟1920-은 지방의회의원을 지내고 在德(재덕)1933-은 괴산향교장의 충민사장의를 지내고 문광면 대명리에 세거하고 있다. 사손가계 (사묵-재교-인회-태일1942- 원식1975)는 청원군 북이면 덕암리에 세거하고 있다.





33) 김지(金지) (1455-1534)

**도 : 현령공 김지 묘와 묘비 (청원 오창면 양지리 산수동)

자 次軒차헌이며 공은 군수 성의 아우인데, 사헌부감찰 증호조참의 종손의 아들로서 1474(성종5) 갑오에 사마시를 거쳐 그후 루전하여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치적이 높았다. 연로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특히 통정대부 당상관의 승차의 성은을 받았으며 1534(중종29) 갑오 9월 초9일 향년 80세에 졸하다.

묘는 오근산소동에 있는데 모재 ★김안국은 묘갈을 찬하여 이르기를 "너그럽고 후덕하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고을을 다스림에 백성을 잘 보살폈으며 집안에 거처함에 화목을 돈독히 하였고 장수와 강녕을 누렸다." 하였다. <오창지>

김지 묘갈(모재 김안국 찬)이 오창 양지리에 있으며, 김안국의 모재집에 김지 행장, 김지 묘갈문이 실려 있다. 김지의 아들 공언은 병천으로 이거하여 모재 김안국과 교유하였다.



■안동김씨 통정대부 문의현령 김지 행장

김지 1455(세조원년) - 1534(중중29년)

공은 고려말 충신 본관 안동인 문하시랑 정당문학 관지 안렴사 휘는 사렴 호는 오은공의 5대손이요, 사헌부감찰 증호조참의 종손의 아들로서 1474(성종5) 갑오에 사마시를 거쳐 그후 루전하여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치적이 높았다. 연로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특히 통정대부 당상관의 승차의 성은을 받았으며 1534(중종29) 갑오 9월 초9일 향년 80세에 졸하다.

공의 묘비를 모재 ★김안국이 찬하니 좌와 같다.



■현령공 비문

공 諱지 字次軒 안동김씨 신라경순왕지후 경순왕9세손 曰방경 고려첨의중찬봉상락군개국공 시문충렬 훈업관세 공지9대조야, 5대조 여말충신 문하시랑 정당문학 관지안렴사 휘사렴, 증조 지주사우주 조승문원판교 휘환, 고 증호조참의 사헌부감찰 휘종손, 비광주김씨 용분시위사 대호군 휘처지녀 공성겸태 을해20중 사마시 ---(후략)---

김안국찬 (호모재 관지2상 의성인 동국유현) <문의향교지, 1991> p 351





34) 김만협(金萬協, 1640-1693)

字는 世珍, 安東金氏 按廉使公 金士廉의 후손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벼슬은 朝奉大夫 童蒙敎官으로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이 다하여 동분서주하며 온갖 약을 구하여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로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당하여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묘를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의 복상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3년 죽을 먹으며 지냈다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근방의 산에 불이 일어나 부친의 묘소가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그는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화상과 화기를 마셔 병을 얻게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숙종조에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괴산군지, 1990>



■ 김욱, 김직, 김?, 김? (金稶·金稙·金 禾+ ?·金 禾+遂)

본관은 安東, 金萬協의 아들들로서, 모두 부모를 위하여 誠孝가 독실하여 旌閭했다. <괴산군지, 1990>



■ 부지런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한 김만협(金萬協)

괴산읍에서 남쪽으로 미원행 도로를 따라 5km가면 문광국민학교가 있고 문광국민학교를 지나 약 200m 좌측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고려말의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인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10대손 金天海의 아들 萬協의 것이다.

1640년에 출생하여 남달리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로서 1692년(숙종18) 3월 8일 문중에서 상의하여 세우게 되었다.

공은 자녀를 2남 5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남다른 효자였다. 독신 효자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金萬協이 효자로 교지를 받기까지는 아우되는 萬전의 뒷받침이 컸다. 아우 만전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 가계를 구기지 않게 뒷받침하였고 형 만협은 어버이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보살펴 드렸다고 한다.

만협은 순창조씨와 혼인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부인 조씨의 부친은 공조좌랑에 오른 덕망높은 분이었고, 그의 증조부는 사과 벼슬에 오른 이였다.

정부인 순창조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후처로 전의이씨를 맞아들였다.

만협은 조봉대부 동몽교관의 벼슬에 올라 나라일을 보살피는 한편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을 다하여 동분서주하여 온갖 약을 구하여 써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만협은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를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 복상 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식생활에 있어서도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음식을 피하기 위하여 3년간은 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으며 복상기간을 마쳤다고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 근방의 산에 불이 났다. 산불은 부친의 묘소에까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만협은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만협은 화상과 화기를 마시고 병을 얻게 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69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행 사실은 정려 및 안동김씨 가보에 기록되어 있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김만협 효자각(金萬協 孝子閣)

**도 : 김만협-김일 효자정려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이 정려각은 효자 金萬協 (1640-1693)의 정려로 숙종18년 (1692)에 세운 것인데, 1985년 효자 金溢(1719-?) 의 정려를 합설하였다.

김만협의 자는 世珍, 본관은 안동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부친의 임종이 가까우매 단지주혈하여 5일을 더 연명하였다. 3년 복상동안 20리길을 매일 성묘하였으며 성묘중 산에 불이 일어나 묘소에 가까워지자 옷을 벗어 물을 적시어 불을 껐다. 이 일로 화상과 화기를 마셔 세상을 떠났다.

김일의 자는 益三, 김만협의 5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모친의 병이 깊었을 때 지성을 다하여 치료하였으며 천수를 다하매 10리 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3년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孝子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金萬協之文, 孝子 贈嘉善大夫 通德郞 金溢之文 이라 쓴 편액 2점과 김만협의 행적을 적은 孝子金公行錄, 김일의 효행을 기록한 金溢孝行錄이 판각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2칸, 측면1칸의 목조와가로 보호철책을 둘렀다. <괴산의 문화재>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괴산군 문화유적>>, 85.> <괴산군지, 1990>





35) 김일(金溢) 1719∼ ?

字는 益三, 본관은 安東 金萬協의 5세손이다. 효자 가문에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늘 부모곁에서 부모님을 지켰고 조석으로는 잠자리를 살피어 문안드렸으며,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지성으로 약을 달여드렸다.

나이 13세에 모친이 오랜 병환으로 신음하며 백약이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산제를 베풀어 3개월 동안 하루같이 험한 산길을 왕래하며 산신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지성이 감천하여 모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가세가 청빈하여 어머니 봉양이 어려워서 마을의 제사집을 다니며 음식을 얻어다가 공양하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수일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병환이 들어 자기를 부르고 있는 꿈을 꾸어 심상치 않아 과거를 포기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과연 노모가 병석에 누어 있었다. 지성으로 간호하여 치유케 하고, 천수를 다하여 죽으니 10리 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3년동안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가선대부 통덕부사이며 묘는 신기리 가정동에 있다. <괴산군지, 1990>



■ 석달동안 산제 올려 노모 병을 고친 효자 김일(金溢)

자는 益三, 본은 안동김씨 가문의 조상인 효자 金萬協의 5대손으로 세습적으로 효도에 성실한 가문에서 1719년(숙종45)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곁을 지키어 아침 저녁으로 잠자리를 살펴 문안드리며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걱정이 되어 나의 몸을 사치할 수 있겠느냐 하며 머리를 빗는 일도 없이 스스로 약을 다려 드렸다고 한다.

모친이 13년이란 오랜 병환으로 신음하는데 어떤 약이든간 써보지 아니한 약이 없었다. 백약이 무효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산제를 지내게 되는데 목욕을 깨끗이 하고 밤중에 10리 길이나 되는 험한 고개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눈바람을 맞아가며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범을 두려워하지 않고 험한 고개를 넘어가서 3개월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모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가세는 청빈하여 외로운 편모에게 봉양할 기름진 음식을 대접할 형편이 못되어 동네에 제사집이 있으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찬잔술과 한조각의 음식을 얻어다가 공양했다고 하며 허리에는 항상 음식을 얻어담을 주머니를 차고 다니었으며 옷도 깨끗이 입지 못하고 옷소매는 기름때에 절어 있었다고 한다.

김일은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 수일간 머무르게 되어 내일이면 과거를 보러 시험장에 들어가게 되는 날인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 고향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차림을 하는데 같이 온 친구들이 깜짝놀라 물어보니 효자 김일은 대답하기를

"어제밤 꿈에 늙으신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니 반드시 병환으로 편찮으신 모양이다. 내 어찌 과거를 보기 위하여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겠느냐" 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과연 늙은 모친이 병들어 누워 계셨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노모가 살만큼 살아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니 10리밖에 묘를 쓰고 밤에는 궤연(망인의 신주를 모신 곳) 옆에서 자고 낮에는 무덤앞에 주과를 진설해 놓고 곡하기를 복상 3년동안을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36) 김락춘(金洛春) 김락신(金洛新) 형제

國良(국량)의 아들 김락춘은 字는 聖團, 본관은 安東 按廉使 金士廉의 후손이며 募梧齋 金琦의 손자이다. 묘는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백양동이다. <괴산군지, 1990>

김락신은 字는 命汝, 洛春의 아우이다. 가세가 극빈하여 근검 노력으로 노부의 구미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하게 할 의복을 마련하기에 힘쓰더니 연로한 부친이 병이 위중하자 자신도 육순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동안 잠시도 병석을 떠나지 않고 시탕하며 병간호에 정성을 기울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여러 동생들을 거느리고 상례를 다하며 4년을 하루같이 성묘했다. <괴산군지, 1990>



○ 慕梧齋公

모오재공의 휘는 琦니 오은공의 13대손이라. 공이 효도와 우애하고 학문을 독실히 하여 항상 선조의 節義와 勳業을 사모하고 同源錄을 저작하여 세상에 행하니라.



○ 司僕寺正公(사복시정공)

사복시정공의 휘는 國良이요 자는 思賢이니 모오재공 琦의 아들이라. 공의 性이 인효하여 친질에 어름을 깨어서 고기를 구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서 친병을 구하여 그 효력을 본지라. 事蹟이 三綱錄에 있나니라.



○ 학생공

학생공의 휘는 洛春이요 자는 聖團이요 제의 휘는 洛新이요 자는 命汝니 사복시정공 國良의 아들이라, 공의 형제는 出天의 효행이라. 년이 60이 넘어서 친병이 심하시거늘 몸소 시약하고 그 손가락을 여러번 끊어도 매양 神效함을 보더라.

親喪을 당하여 시묘를 살고 省掃함을 그치지 않더라. 항상 제 洛東과 子姪을 경계하여 가로되 사람의 집은 마땅히 이 충효로써 근본을 삼어라 하니 사람들이 世孝라 이르더라. 事蹟이 三綱錄에 있나니라. 군수 동래 정기홍이 행장을 지으시니라.







37) 김태룡(金泰龍) (1905-1972)

**도 : 송덕비 (괴산 사리면 이곡리 보광초 이곡분교장)

서사참봉 在學(周然)의 손자이며, 숭릉참봉 龍會(호淡淵)의 아들로 종사랑 전위참봉 행문묘직원을 지냈다. 자는 韓雄, 호는 龍+耳 世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며 金龍會의 아들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기개가 강직하여 士友들의 경모를 받았으며 일찍이 개화에 눈을 떠 지역내에 후학들이 교육할 학교가 없어 자라나는 학동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는 점을 묵과할 수 없어 사리면 梨谷里에 사는 이태호씨를 찾아 논의하고 사재 1백석지기를 희사하여 이태호씨가 희사한 대지 1,220평 위에 3개의 교실을 신축하여 학교를 세웠다.

육영사업에도 공헌했으며, 그는 종사랑전위참봉으로 괴산향교 전교를 지냈다. 그의 덕행과 인망은 유림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후에 禾谷초등학교 동창생 일동과 지방유지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를 학교앞에 세웠다. 문헌 송덕비문 <괴산군지, 1990>











▣ 김항용 - 홈에 올립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 김윤만 - 대단한 양의 자료입니다. 노고가 큽니다.

▣ 솔내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