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인물(조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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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10-30 04:48 조회2,063회 댓글0건본문
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에 이어서 본조(조선)에 기록된 선조님의
자료를 옮겨 썼습니다.
(本朝[朝鮮])
김사형(金士衡):
영후(永煦)의 손자이다. 신우(辛禑)때에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같이
대간(臺諫)으로 있었더니 그 때 사람들이 적임(適任)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벼슬이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이 좌정승(左政丞) 이르렀으니,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편집자 해설
김사형(金士衡)
1
333(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
(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
(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
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
(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
(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김돈(金墩):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썼다. 세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돈(墩)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
증서를 주게 되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裕)하기를 "내가 경(卿)을 보고자
하니 경이 문득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고 뽑아서 집현전
(集賢殿)에 들데 하고 항상 경연(經筵)을 겸직하게 하였다. 돈(墩)이 어머니가
강진(康津 )에 있다고 하여 여러번 지방관직(地方官職)에 나가기늘 요구하니,
임금이 특히 역마(驛馬)를 내려 주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효도로
봉양하기에 편리 하게 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돈(墩)이
의상(儀像)을 만드는데 정교(精巧)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보루각(報漏閣)을
제작할 때애 돈(墩)이 김조(金 )와 함께 참여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은 지가 모두
7년이나 되었더니 병이 들게 되매 승격하여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되어서 졸(卒)하였다.
*편집자 해설
김돈(金墩)
1385(우왕 11)∼1440(세종 22). 조선 초기의 문신·과학자. 본관은 안동.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후(厚)이며, 아버지는 칠양(七陽)
[군사공파조]이다.
1417년(태종 1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좌승지·인순부윤(仁順府尹)에까지 이르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급제하자 임금이 “내가 경을 보고자 하였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기뼈하였다 한다.
1428년(세종 10)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 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하고,
종학박사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 집현전직제학으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는
집현전부제학으로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왕에게 상소하고, 그뒤 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외직을
원하였으며, 특히 역마를 보내어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편, 천문관측에 정통하여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도 참여하였다.
한때 귀양가는 이숙번(李叔蕃)이 순금띠를 주면서 자신의 구출을 의뢰하자, 여러
방법으로 구출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兆)와 함께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자 되게 하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여 바퀴물로써 돌게 하였는데, 해의 도수와 그림자
누수(漏水)의 시각이 하늘의 운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고 한다.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과 사람·새·짐승·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추어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누기(漏器)를 설치하고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이층으로 만들어 삼신(三神)을
그 위에 설치하였는데, 시간을 알릴 때는 종을, 경(更)을 알릴 때는 북을,
점(點)을 알릴 때는 징을 울리게 만들었다
승지로 7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며, 집현전출신으로
박학다식하고, 특히 과학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이었다.
김질(金질 ):
사형(士衡)의 증손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누전(累轉)하여서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이르더니 세조(世祖)의 초년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음모(陰謀)를 고변(告變)하여
그 공(攻)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봉작되고 벼슬이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으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편집자 해설
김질(김질 )
1422(세종 4)∼1478(성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증조부는 개국공신 사형(士衡),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종숙(宗淑),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딸이다. 세종 말년에 문음(門蔭)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여 부사에 이르렀을 때, 성균관에서 수학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다.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주부에 제수된 이후,
사간원우정언·병조좌랑을 거쳐 1455년(세조 1)에는 성균관사예에 이르렀다.
이 무렵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의 집현전학사와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모임을 수차 가지던 중 위험을 느끼자, 1456년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뒤 세조의 철저한 신임을 받아 좌익공신(佐翼功臣)3등에 추봉되고 판군기감사에
승진되었다. 이어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459년에는 병조참판이
되면서 세조의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에는 두 차례에 걸친 세조의 서도순행(西道巡幸)을 위하여 황해도·
평안도도순찰사가 되고, 1461년에는 평안도의 도관찰사가 되었다.
1463년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병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466년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 좌의정에 승진된 뒤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이른바
원상세력(院相勢力)을 형성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서무를 주관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 준(龜城君浚)을 제거하여,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74년에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어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65년에 병전(兵典)을 고열(考閱)하고, 1470년에는 이전(吏典)의 교정도 맡았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작(金 질):
질( 질)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편집자 해설
김작(金작 )
1427(세종 9)∼1488(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 증조부는 좌의정 사형(士衡), 할아버지는 승(陞), 아버지는 종숙(宗淑)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이 되고, 1454년(단종 2) 문음으로 선공감녹사가 되고,
곧 전농시직장이 되었다.
1458년(세조 4) 통례문봉례랑으로 승진하고, 1462년 종부시소윤이 되었다.
1464년 경차관으로서 경기도에 파견되어 여러 읍의 옥사(獄事)에 대한 관리실태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데 공헌하고, 행사헌장령이 되었다.
1477년(성종 8) 첨정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는 등 관료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학문에도 힘썼다.
그뒤 동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482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경기관찰사를 거쳐 1484년에 병조참판·수지중추부사,
1487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딸이 후궁이 되자 권력을 누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김익정(金益精):
태종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편집자 해설
김익정(金益精)
아버지는 한성윤 김 휴이며 할아버지는 안동김씨 전서공파 파조이신
전서공 김성목이시다.
김익정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
(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수령(金壽寧):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나이가 18세 때에 계유년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렬하였으며,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고, 복창군(福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편집자 해설:
김수령(金壽寧)
1436(세종 18)∼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이수(이수 ),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
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
(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김뉴(金紐):
갑신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중시(重試)에 등준(登俊) 두 과거에 뽑히었고
이조참판을 지냈다.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게 알았다.
*편집자 해설:안정공 김구덕(金九德)의 증손이며 조부는 김오문(金五文), 부
는 지돈녕부사 김중엄(金仲淹)이다.
김뉴(金紐)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황해·평안도의 땅을 개간한
공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또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함이 컸다.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에 있는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군인을 늘리며, 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馬글達梁於蘭)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선조님들의 자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530년(중중25년)까지의 기록임을 밝혀둔다.
인물
고려에 이어서 본조(조선)에 기록된 선조님의
자료를 옮겨 썼습니다.
(本朝[朝鮮])
김사형(金士衡):
영후(永煦)의 손자이다. 신우(辛禑)때에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같이
대간(臺諫)으로 있었더니 그 때 사람들이 적임(適任)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벼슬이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이 좌정승(左政丞) 이르렀으니,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편집자 해설
김사형(金士衡)
1
333(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
(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
(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
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
(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
(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김돈(金墩):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썼다. 세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돈(墩)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
증서를 주게 되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裕)하기를 "내가 경(卿)을 보고자
하니 경이 문득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고 뽑아서 집현전
(集賢殿)에 들데 하고 항상 경연(經筵)을 겸직하게 하였다. 돈(墩)이 어머니가
강진(康津 )에 있다고 하여 여러번 지방관직(地方官職)에 나가기늘 요구하니,
임금이 특히 역마(驛馬)를 내려 주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효도로
봉양하기에 편리 하게 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돈(墩)이
의상(儀像)을 만드는데 정교(精巧)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보루각(報漏閣)을
제작할 때애 돈(墩)이 김조(金 )와 함께 참여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은 지가 모두
7년이나 되었더니 병이 들게 되매 승격하여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되어서 졸(卒)하였다.
*편집자 해설
김돈(金墩)
1385(우왕 11)∼1440(세종 22). 조선 초기의 문신·과학자. 본관은 안동.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후(厚)이며, 아버지는 칠양(七陽)
[군사공파조]이다.
1417년(태종 1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좌승지·인순부윤(仁順府尹)에까지 이르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급제하자 임금이 “내가 경을 보고자 하였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기뼈하였다 한다.
1428년(세종 10)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 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하고,
종학박사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 집현전직제학으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는
집현전부제학으로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왕에게 상소하고, 그뒤 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외직을
원하였으며, 특히 역마를 보내어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편, 천문관측에 정통하여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도 참여하였다.
한때 귀양가는 이숙번(李叔蕃)이 순금띠를 주면서 자신의 구출을 의뢰하자, 여러
방법으로 구출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兆)와 함께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자 되게 하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여 바퀴물로써 돌게 하였는데, 해의 도수와 그림자
누수(漏水)의 시각이 하늘의 운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고 한다.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과 사람·새·짐승·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추어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누기(漏器)를 설치하고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이층으로 만들어 삼신(三神)을
그 위에 설치하였는데, 시간을 알릴 때는 종을, 경(更)을 알릴 때는 북을,
점(點)을 알릴 때는 징을 울리게 만들었다
승지로 7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며, 집현전출신으로
박학다식하고, 특히 과학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이었다.
김질(金질 ):
사형(士衡)의 증손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누전(累轉)하여서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이르더니 세조(世祖)의 초년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음모(陰謀)를 고변(告變)하여
그 공(攻)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봉작되고 벼슬이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으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편집자 해설
김질(김질 )
1422(세종 4)∼1478(성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증조부는 개국공신 사형(士衡),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종숙(宗淑),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딸이다. 세종 말년에 문음(門蔭)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여 부사에 이르렀을 때, 성균관에서 수학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다.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주부에 제수된 이후,
사간원우정언·병조좌랑을 거쳐 1455년(세조 1)에는 성균관사예에 이르렀다.
이 무렵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의 집현전학사와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모임을 수차 가지던 중 위험을 느끼자, 1456년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뒤 세조의 철저한 신임을 받아 좌익공신(佐翼功臣)3등에 추봉되고 판군기감사에
승진되었다. 이어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459년에는 병조참판이
되면서 세조의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에는 두 차례에 걸친 세조의 서도순행(西道巡幸)을 위하여 황해도·
평안도도순찰사가 되고, 1461년에는 평안도의 도관찰사가 되었다.
1463년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병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466년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 좌의정에 승진된 뒤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이른바
원상세력(院相勢力)을 형성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서무를 주관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 준(龜城君浚)을 제거하여,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74년에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어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65년에 병전(兵典)을 고열(考閱)하고, 1470년에는 이전(吏典)의 교정도 맡았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작(金 질):
질( 질)의 아우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편집자 해설
김작(金작 )
1427(세종 9)∼1488(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 증조부는 좌의정 사형(士衡), 할아버지는 승(陞), 아버지는 종숙(宗淑)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이 되고, 1454년(단종 2) 문음으로 선공감녹사가 되고,
곧 전농시직장이 되었다.
1458년(세조 4) 통례문봉례랑으로 승진하고, 1462년 종부시소윤이 되었다.
1464년 경차관으로서 경기도에 파견되어 여러 읍의 옥사(獄事)에 대한 관리실태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데 공헌하고, 행사헌장령이 되었다.
1477년(성종 8) 첨정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는 등 관료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학문에도 힘썼다.
그뒤 동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482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경기관찰사를 거쳐 1484년에 병조참판·수지중추부사,
1487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딸이 후궁이 되자 권력을 누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김익정(金益精):
태종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편집자 해설
김익정(金益精)
아버지는 한성윤 김 휴이며 할아버지는 안동김씨 전서공파 파조이신
전서공 김성목이시다.
김익정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
(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수령(金壽寧):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나이가 18세 때에 계유년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렬하였으며,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고, 복창군(福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편집자 해설:
김수령(金壽寧)
1436(세종 18)∼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이수(이수 ),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
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
(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김뉴(金紐):
갑신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중시(重試)에 등준(登俊) 두 과거에 뽑히었고
이조참판을 지냈다.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게 알았다.
*편집자 해설:안정공 김구덕(金九德)의 증손이며 조부는 김오문(金五文), 부
는 지돈녕부사 김중엄(金仲淹)이다.
김뉴(金紐)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황해·평안도의 땅을 개간한
공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또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함이 컸다.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에 있는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군인을 늘리며, 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馬글達梁於蘭)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선조님들의 자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530년(중중25년)까지의 기록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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