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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16---양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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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8-26 04:35 조회1,7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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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양지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3자 삼함당공 휘河瑞(하서) 후손으로 陽地派(양지파)라 한다.



○생원진사 급제 3명(하서, 대, 연), 문과급제 1명(연), 무과급제 1명(사민)이 있으며, 하서는 격문이, 연은 사륙문, 도학계몽, 예서가, 재광은 이정표 (동아정경연구회, 1991)가 전한다.



○河瑞(하서)는 호三緘(삼함)으로 병자사마 급제하고 묘는 오근산소동이며 임진란을 당하여 쓴 격문이 있고, 玳(대)는 계축진사 급제하고, 璉(연)은 호梧洲로 을묘사마, 신유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文詞에 풍부하여 道學啓文을 저술하고 家禮序를 또 찬하여 세상에 전해온다.



○士閔(사민)은 정유무과 급제하고 선전을 지냈으며, 鎭衡(진형)은 효우와 덕행으로 이름이 전한다.



○在東1931-은 현령공(=지)파종회장을, 在晟(재성)1947- 교수를, 仁默의 배위 은진송씨는 효열로 본향 유림에서 세운 늑비명이 전한다. 在光1921-은 8선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안동김씨대종회 고문을 역임하였고,



○在基1937-는 주택은행장, 안동김씨대종회장을 역임하였으며, 在澤1930-은 현재 안렴사공파 종회장으로 在均 등과 함께 종사에 헌신하고 있으며, 在允1935-은 청주교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在福1928-은 면장, 라이온스회장, 대종회이사, 1988무진보편찬, 창오회초대상무, 지주사공파종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과 종사에 헌신하였다. 在旭은 충북도청 자치행정국장(2004.5)으로 있다.





■ 양지리(陽地里)

은행정 마을에 있는 송천서원은 본래 옥산면 환희리 송천 마을에 있었던 서원인데, 조선고종8년 (1871)에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7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어 다시 세운 것으로 김사렴 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이제신 최석정 이인혁 이효석 남구만 박문수 이종성 김여량의 15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한다.

양지리는 마을 대부분 지역에 안동김씨가 누대로 세거하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 출신으로 김재광(국회부의장, 8선의원), 김재승(충주시교육장, 음성교육장, 청주시교육장), 김재곤(상당초등학교 교장), 김재억(조선비료 총무부차장), 김재욱(도청 경제과장), 김재기(유선방송협회장, 한국주택은행장, 한국외환은행장, 한국민속씨름협회 총재), 김건회(세무사), 김재찬(신협이사장), 김재성(한국교원대학교 도서관 열람과장) 등이 있으며,





52) 김하서(金河瑞, 1551-1610)

공은 안렴사의 9세손으로 현령 지의 손자이다. 자는 경희(景羲)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였고, 1576년(선조9)에 한성부(漢城府), 성균관(成均館)에서 식년(式年) 진사(進士)급제하였다. 이때 제학공파 김제갑(金悌甲)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는 시험관이었다.

공은 출생으로부터 총명준수하고 재질과 기품이 특이하였다. 모부인의 훈육으로 높은 스승에게 나가지 아니하고 모부인을 효양하는 한편 교학에 힘썼다.

42세시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勤王의 대의를 품고 2차에 걸쳐 격문을 지어 列邑 수령과 지방 士友간에 보내어 초모한 의병 500여인으로 충주 죽산간의 진을 친 관군과 협공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한 사방으로 土豪 士家에 통해 出穀케 하여 군량을 돕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의병에 종사하였는데 격문을 초한 것이 매우 간절하여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겠는가.

이에 오백명의 의사들을 모집한다.

우리 군주의 강토를 복구할 것을 마음에 기약하는데

다만 군비가 한결같지 못함을 한탄한다.

이에 한 치되는 혈담을 가지고

의로운 제군들에게 두루 올린다." 하였다. <오창지>

난이 끝난 후에는 인신으로서 국난을 좌시키 못하였을 뿐 공명에 뜻이 있지 않다 하여 그 전공을 일체 나타내지 아니 하였으며 몸과 입과 뜻을 삼간다는 뜻으로 身, 口, 意의 세가지를 緘封(함봉)한다 하여 三緘堂(삼함당)이라 자호하고 유연히 일생을 마쳤다.



○김대 (金玳, 1585-1637)

1585년 乙酉생으로 자는 여화(汝華)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였고, 1613년(광해5) 증광(增廣)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조선사마방목>

공은 진사 하서의 아들인데, 재주로 세상에 알려졌다. <오창지>





53) 김련(金璉, 1589-1637)

하서(金河瑞)의 아들로 1589년(사마방목에는 1587 丁亥) 태어났으며, 자(字)는 여기(汝器)이며, 1615년 성균관(成均館), 장악원(掌樂院)에서 진사시에 급제하고, 1621년(광해13) 알성시(謁聖試) 병과1(丙科1)로 급제하고 관직은 좌랑(佐郞을 지냈다.

공은 진사 대의 아우이다. 벼슬이 병조의 낭관에 이르렀다.

재주가 사륙문에 뛰어났고 도학계몽, 예서를 지었는데, 글이 지극히 웅장하고 고상하며 절실하여 세상에 행할 만하였다. 호를 梧洲라 하였다.

오근 사람으로 이삼준과 이기와 공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모두 해미현감이 되니 세상에서는 삼해미라고 칭하였다. <오창지>





54) 김재광(金在光, 1922-1993)

오창면 장대리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서울특별시 의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신민당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무려 8선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13대 때는 국회부의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선생은 오창이 배출한 한국정치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정치 이외에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등 한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93년에 졸하였다. <오창지>



1922∼1993. 정치가.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서강(西剛). 충청북도 청원 출신. 아버지는 동묵(東默)이고 어머니는 유옥(柳玉)이다.

1960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1968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고, 1989년 미국 퍼시픽대학교(Pacific States University)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8월 초대서울시의회 의원, 같은해 10월 민주당(民主黨) 원내총무, 1960년 12월 제2대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었다가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

1963년 4월 군정연장반대시위로 서울교도소에 수감되고, 수감중 105인동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같은해 11월 민정당(民政黨) 서대문구갑구 후보로 위원장이 되었지만 그해 8월 한일조약비준반대를 위하여 소속정당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도 사퇴하였다.

1967년 2월 신민당 창당을 발기하였으며, 같은해 6월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이 되어 신민당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을 맡아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1976년 신민당 최고위원,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 12월 이른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4년 11월 정치활동금지가 해제되자 12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창당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1985년 1월 신한민주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하면서 2월 제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7년 11월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상임고문,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으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90년 연임하였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해 7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이 되었다.

한편 1968년 국가진단연구소(國家診斷硏究所) 이사장, 1972년 동아정경연구회(東亞政經硏究會) 회장, 아시아의원연맹(APU) 이사, 건국대학교 재단이사, 그리고 1989년 서울시의정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里程表(金在光, 東亞政經硏究會, 1991)>가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전 국회부의장/김재광씨 별세 (1993.01.04)

13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재광씨(70)가 3일 오후 4시 30분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서울시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6대 총선때 서울 서대문구에서 국회에 진출한 뒤, 정치 활동 규제에 묶인 11대를 제외하고는 이곳 한곳에서 연속 7 선을 기록했다. 초선인 6대때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하는 결단성을 보였고, 구 신민당에서 당3역,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80년대 중반에는 김대중씨의 동교동계로 분류됐으나, 87년 대선때 양 김씨의 후보 단일화 실패이후 김영삼씨와 손잡고 김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장을 맡기도 했다. 아호는 서강. 부인 오학순여사(68)와 4남3녀. 가족들은 유해를 서울대병원 영안실(764-6099,6299)에 안치 했다. 장지는 고인의 희망대로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선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초에는 고인의 희망대로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선산으로 정하였으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국립묘지로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조중연 고 김재광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1997.01.03일 오전 국립묘지 애국 지사 묘역에서 제5주기 기념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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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항용 - 예 올렸습니다.

▣ 김정중 -

▣ 솔내 -

▣ 김윤만 -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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