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168)임시정부시절 백범김구의 은신처탐방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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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8-26 23:01 조회1,874회 댓글0건본문
臨政시절백범金九의 은신처탐방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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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容 相 시인
1924년 서울 출생. 고려대·육군사관학교 졸업. 문공부 예술국장. 국립극장장.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상임이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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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와 한인 애국단
주요내용
1)金九와 한인 애국단
2)중국인들의 金九사랑
3)야간도주 가능토록 도와줘
4)金九의 생명을 구해준 저부인 / 성남市 모란 상인들의 성금으로…
1)金九와 한인 애국단
우리들이 잘 아는 바 중국의 孫文(호 中山)은 莊介石(장개석)이 영도하는 국민
당에서나, 毛澤東의 공산당에서나 그 어느 쪽에서도 國父(국부)로서 대접받던
최고의 지도자였다. 우리나라에서 국부라는 칭호를 붙인다면 누가 있을까. 북
한에서 「어버이 金日成 수령」은 「어버이」로서의 국부로, 「수령」으로서
의 종교적 신격화로 북한쪽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음(그것이 세뇌에 의한 것
이든 아니든 간에)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남쪽에서는 李承晩(이승만) 혹은
金九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金九를 존경한다. 우리나라
잘난 사람의 표준은 언제부터인지 영어 잘하고 박사를 딴 사람으로 돼 있는
데, 金九는 박사도 아니고 영어도 못했지만 나는 단연코 金九 편이다.
왜 金九인가.
대통령이나 주석같은 자리와는 초연스럽게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면 우리
정부 문지기가 되는 것이 나의 바람』이라던 金九 선생! 그 金九에게 잊을래
야 잊을 수 없는 그리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두 여인이 있었다.
결코 숨겨 놓은 여인은 아니었다. 우리들이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 두 여인이란 金九가 일제관헌에게 체포령을 받고 쫓겨다닐 때 생명을 걸고
金九를 도피시켜주고 또 숨겨줬던 중국여인들이었다.
당시 金九 목에는 6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60만 달러는 지금도
큰 돈이지만 70년 전에 그 돈의 가치는 현기증이 날 아득한 액수가 아니던가.
돈에 탐이 난 일본 스파이들, 중국 스파이들, 조선 스파이들 할 것 없이 우리
임시 정부가 있던 상해의 프랑스 조계(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
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일대에는 각국 스파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金九 잡기에 나선 상황이었다. 나라가 해방된 이후 金九는 자기를 잡으려던
이들 중 조선인 스파이가 가장 발악적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
932년 당시 金九는 우리 임시 정부와는 또 다른 모임을 비밀리에 조직,
양성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한인애국단」.
일제는 날로 강해지고 포악해지고 있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했고 북지에 쳐들어 왔고 상해사변을 일으키더니 이제는
상해를 발판으로 중지까지 먹으려하지 않는가. 대국을 자랑했던 중국이
하찮은 섬나라 일본에게 당하는 것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지만 중국이
이 꼴이면 우리 조선독립은 점점 요원해지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이러한
긴박한 입장에서 金九는 외교수단을 앞세워 세계여론에 호소하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독립방법과는 달리,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파괴 등
적극적인 투쟁을 감행하되 그 비용과 인물 선택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자기가 하겠다고 임시정부에서 全權을 얻게 되었다. 그 첫 공작이 1932년
1월8일. 일본 동경에서 있었던 李奉昌(이봉창)의 일본천황 암살폭탄사건이고,
그 다음이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있었던 尹奉吉(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이었다.
두 義士의 거사는 안하무인격으로 만주와 대륙을 짓밟으며 한참 우쭐했던
일제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알고 보니 이봉창 열사나 윤봉길 의사는 모두
한인 애국단 단원이었고, 그 애국단 단장은 바로 임시정부 국무령 겸 상해
한인거류민단장인 金九가 아니었던가. 일제로서는 金九를 잡아 능지처참을
해도 풀리지 않을 분통이었다. 金九는 이런 사정으로 겹겹이 둘러 싸인
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결사적인 상해탈출에 나섰던 것이다.
金九가 망명하여 은신한 곳은 가흥(嘉興)市.
金九선생께서 일본군경에게 쫓겨다녔던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탐방여행」을 위해 나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혼자서 중국으로 떠났었다.
내가 떠나기 전날 金信(金九 선생의 아들·전 공군참모총장)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상해비행장에 내리면 나를 마중 나올 사람이 있을 거란다.
과연 상해공항에는 「대한민국 이용상 환영」이라고 쓴 현수막을 든 남녀가
있었다. 늘씬한 키에 검은 안경을 낀 30代 미녀는 가흥일보 문화부장
夏贊生(하찬생). 그녀의 명함을 받아보니 그는 신문기자라기보다는
아동문학가로서 중국작가협회 회원이었다.
또 한 남자는 자싱시 인민정부 운전기사였다.
2)중국인들의 金九사랑
상해에서 가흥시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40분 거리라고 했다. 가흥시는
金九의 1차 피신처다.
1932년 당시 金九가 결사적으로 상해를 빠져나와 가흥 은신처까지 가는데
기차로 10시간이 걸렸다는데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나는 잘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내가 탄 차는 가흥시를 향해 남으로 달렸다.
오늘 아침 꽁꽁 얼어붙은 성남을 떠나왔는데 북위 31도인 이곳 기후는
구름 한 점 없고 따뜻하다. 옛 중국 詩文에 「天上有天堂(하늘 위에는 천당이
있고) 天下有蘇抗(하늘 아래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소주와 항주의 중간지점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
도착한 가흥시는 아담한 호반의 도시였다. 인구는 70만이란다. 그런데 넓고
넓은 중국 땅에서 金九는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 몸을 피했을까. 그리고
당시 상해에서 거미줄처럼 펼쳐진 일본군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지면관계로 조목조목 밝힐 수는 없지만 金九는 평소 임시정부를 동정했던
미국인 목사 費吾生(George. A. Fitch)의 집에 20일 간 숨어 있었으나 그곳
까지 일본 군경의 손이 뻗치자 費목사가 운전하는 자동차로 대문을 부수며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임시정부요인 박찬익이
일찍부터 장개석의 국민당 당원으로 활약하면서 중국 요로와는 아주 친근했
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1932년 4월29일 尹奉吉 폭탄거사가 있던 직후,
조만간 임시정부에 닥쳐올 위기를 짐작하고 절강성 성장대리에게 미리부터
은신처를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박찬익은 후일 金九와 莊介石과의 비밀회담
을 알선했는데 1933년 남경 중국 사관학교 안에 있는 莊介石의 관사에서
이루어진 비밀회담 후부터 莊介石은 물심양면으로 우리 임시 정부를 도운
것이다. 金九가 1919년 중국망명후 15년 만에 처음 있었던 莊介石과의 면담이
었다. 이날 지하에 묻힌 이봉창과 윤봉길은 자기들의 殺身成人에 크게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도착한 그날 밤 市 인민정부 초대소에서
부시장 氾巴陵 여사가 베푸는 만찬에 참석했다. 교양미가 넘치는 50代의
그녀는 대외문화교류협회 회장이기도 했다. 氾여사는 현재 전국인민대표·
가흥지역 주임직이었다.
만찬회에 모인 신사숙녀들은 『金九주석과 가흥시의 관계는 중국과 한국과의
끊을 수 없는 우호와 의리의 상징이자 표본』이라며, 『金九주석과 임정요인
들이 가흥시에 피신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겼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
법통이 중단없이 유지된 것이다』며 가흥市를 내세웠다. 그러고 보니 과연
우리 헌법전문에 있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아』라는 구절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다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생각을 했었다. 金九와
蔣介石은 아주 단짝이었다. 그리고 金日成과 중공 역시 예나 지금이나 아주
단짝이다. 반대로 蔣介石은 毛澤東과는 아주 앙숙이었다. 그러면 金九와
북경정부와도 앙숙이어야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만찬에 모인
이 사람들은 金九와 임시정부가 자기 고장에 와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이곳에서 우리 臨政을 보호했다는 것을 뜻깊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 김상석 - 감명,흥미,안타까움 속에서 정독 하였습니다.대부님의 정겨운 凝視로 안김이 든든합니다.
▣ 김윤만 - 은신처! 국내뿐아니라 국외까지 흥미있는 주제인 듯 싶습니다.
▣ 김주회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선생님이시기에 대륙에서도 큰 지지를 얻으셨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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