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흔 선조님의 졸기(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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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8-28 09:06 조회1,931회 댓글0건본문
임오년 충렬왕 8년(원 세조 지원 19, 1282)
11월 사절을 여러 도에 파견하여 다시 전함을 수리하였다.
원나라에서 일본을 다시 토벌하려 하여 사신을 보내와 전함을 수리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송분(宋?) 등을 경상ㆍ전라ㆍ충청ㆍ서해 4개 도에 파견하여 공사를 감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또 저강(楮? 지폐(紙幣)) 3천 정(錠)을 보내어 전함을 수리는 경비에 충당하였다.
당초에 우리 나라 사람 유주(庾?)가 원주에게,
“오랑캐를 시켜서 오랑캐를 토벌하는 것이 중국의 사정이오니 고려 군대로 일본을 토벌하게 하고 고려가 군량 20만 석을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원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독로화(禿魯花)김흔(金?) 등이 주(?)에게,
“네가 검필(黔弼)과 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그런데 나라를 이렇게 망하게 해놓느냐?”
하니 주는,
“너희 나라 임금은 흙으로 빚어 만든 불상이나 마찬가지다. 윤수ㆍ이정ㆍ박의ㆍ양선대(梁善大) 등이 백성에게서 긁어들인 것만 해도 군량을 준비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간신을 제거하고 삼한(三韓)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하였다.
또 간성(杆城) 사람 송번(宋蕃)이란 자가 원나라에 말하기를,
“고려의 동계(東界)와 서계(西界)가 조정에 귀속되었으나 그 토지는 아직까지 고려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데, 그 면적을 따진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4만 석은 충분히 될 것이니, 그것으로 군량에 충당하소서.”
하여 원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를 요청하였다. 왕이 재신과 추신을 불러서 계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유주가 20만 석을 내놓을 것을 요청했는데 집집마다 거두어들인다 하여도 가까스로 4분의 1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다 4만 석를 추가한다면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조인규를 보내어 군량의 액수를 경감해 줄 것을 요청하니, 원주는,
“정말 할 수 없다면 힘이 자라는 대로 하라.”
하였다.
신묘년 충렬왕 17년(원 세조 지원 28, 1291)
○ 설도간이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인후 등을 보내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이때 적이 동쪽 길로 차츰차츰 남도로 내려갔다. 설도간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뒤를 쫓다가 와서 왕을 보고나서 홍자번에게,
“당신은 대신이 되었으니 재정과 식량 사정을 다 알고 있을 것이오. 우리가 가는 대로 공급해주오.”
하고, 곧 대군을 끌고 금령(金嶺)지금의 용인현(龍仁縣) 동쪽 30리에 있다 에 이르러 인후를 중익만호(中翼萬戶)로, 한희유(韓希愈)를 좌익만호(左翼萬戶)로, 김흔(金?)을 우익만호(右翼萬戶)로 삼아서 군대를 출동시켰다.
정미년 충렬왕 33년(원 성종 대덕 11, 1307)
ㆍ김흔(金?)을 자의도첨의(咨議都僉議)
기유년 충선선효왕(忠宣宣孝王) 원년 (원 무종 지대 2, 1309)
추7월김흔(金?)이 졸하였다.
흔은 성품이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였으며 더욱 친척 가운데에서 곤궁한 자를 구휼(救恤)하였다.
김흔은 김방경(金方慶)의 아들로 김방경이 삼별초(三別抄)를 정벌할 때 제주도까지 따라가 그 평정에 공을 세웠으며, 뒷날 귀화한 몽고인 인후(印侯)가 찬성사(贊成事)한희유(韓希愈)와 사혐이 있어 그를 역모로 몰아 죽이려고 할 때, 이에 동조하여 한희유를 고문했으나 불복하므로,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인후 등과 같이 원으로 피해 가 있었는데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중직을 맡았다.
▣ 김항용 -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주회 -
▣ 김윤만 - 연속된 새로운 자료 감사합니다.
▣ 김윤식 - 동감입니다. 이 시대 자료는 정말 귀한 자료입니다.
▣ 솔내 - 수고하셨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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