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뉴 선조님 그리고 이름이 같은 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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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8-30 20:00 조회1,675회 댓글0건본문
【성 명】 김뉴(金紐)
【생몰년】 1420(세종 2)∼?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자고(子固),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상락거사(上洛居士)
【저서·작품】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420(세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 취헌(翠軒) · 쌍계재(雙溪齋) · 관후암(觀後庵) · 상락거사(上洛居士)이며 김중엄(金仲淹)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자 조대림(趙大臨)의 딸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조 10년(1464)에 녹사로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호조 좌랑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다. 1466년 발영시 · 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 · 유희익(兪希益) 등과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 직제학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기여했다. 성종 1년(1470) 완성단계의 《경국대전》을 재수교, 1472년 저화법(楮貨法) 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1478년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를 쌓고, 함경도 등에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되었다. 1481년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 사직(行司直)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다. 야담집인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한 옛날 서울에 어떤 집이 있었는데 가격이 오천필이나 하였다. 그 집에는 요괴가 들어 사람마다 죽어나간다는 소문이 나자 김뉴가 헐값으로 그 집을 사들여 혼자 하룻밤을 지냈다. 밤이 되자 흰옷 입은 중 일곱이 들어오다가 그가 기침을 하자 돌층계 위의 대나무 숲으로 달아났다. 날이 밝자 대나무를 헤쳐보니 은으로 만든 부처가 일곱이나 있었다. 둘은 나라에 바치고, 남은 것은 궁핍한 친구에게 주고, 나머지를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 · 〈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弁齋叢話, 國朝榜目, 於于野譚
【관련항목】 김굉필(金宏弼)

출전;서울육백년사
이름이 같은 김뉴
한훤당(寒暄堂) : 한훤당(寒暄堂)은 김굉필(金宏弼)의 호. 자(字)는 대유(大猷)이다. 김유(金紐)의 아들로 성종(成宗) 25년(1494)에 과거에 합격하여, 남부 참봉(南部參奉)ㆍ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ㆍ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거쳐 연산군 3년(1497)에 형조 좌랑(刑曹左郞)이 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에 김종직 일파로 몰려 유배(流配)되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사사(賜死)되었다. 육경(六經)의 연구와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하였다. 《類選》 卷三上 人事篇三 親屬門.
김굉필(金宏弼)1454(단종 2)∼1504(연산군 10).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 사옹(蓑翁)으로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뉴(金紐)의 아들이다.
신천서원(新川書院)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다. ㆍ김유(金紐)호는 박재(璞齋), 별제(別提)를 지냈다.
▣ 김윤만 -
▣ 김윤식 - 잘 구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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