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4---도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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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02 04:29 조회1,551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2---오창탑리파
♣♣♣16 오창탑리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넷째아들 휘보(土+保)는 전라도 무안현감으로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여 보령에서 영주한 일파가 있고, 고향인 오창 농소리(탑리)에 돌아와 세거한 일파도 있다. 보의 장자 휘公達(공달) 후손으로 梧倉塔里派(오창탑리파)로 한다.
○청원 오창면 기암리 농소, 진천 만승면 회안,금곡, 진천읍 문덕,원동,태락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土+保(보)는 현감 계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무안현감을, 公達(공달)은 현감을, 明源(명원)은 무과급제를, 在熙(재희)1932 -는 향교장의를 지냈다.
--- 세거지 답사후 추후 보완계획임 ---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3---보령파
♣♣♣17 보령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넷째아들 휘보(土+保)는 전라도 무안현감으로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여 보령에서 영주한 일파가 있고, 고향인 오창 농소리(탑리)에 돌아와 세거한 일파도 있다. 보의 2자 휘公逸(공일) 후손으로 保寧派(보령파)라 한다.
○보령 청라면 분향동, 임천동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公逸(공일)은 묘 오창 복현리이며, 趾(지)는 묘 보령 대천면 화산리 원내기이며, 復禮(복례)는 경자 무과급제, 尙南(상남)은 무과급제, 聖會(성회)는 무과급제, 在穆(재목 =榮穆,초명 魯穆)은 전원 1권이 있으며 통정대부이며 묘 논산 노성면 호암리이다. 益會(익회)는 호 信菴(신암)으로 일명 益漢(익한)이며 종사랑 학교교관을 지내다 배일결사 광복단종사하였으며 묘 임천동이다. 동회는 노동부 부이사관(2004.5)으로 있다.
--- 세거지 답사후 추후 보완계획임 ---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4---도산파
♣♣♣18 도산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2자 양성현감공 휘吹(취) 후손으로 陶山派(도산파)라 한다.
○吹(취)는 양성현감을 지내고 묘 오은공 묘하이며, 鐵孫(철손)은 찰방을 지내고 묘 옥천 동정이며, 墻(장)은 충무위 어해장군을 지내고 묘 상동이며, 均孫(균손)은 사용, 土+叔(숙)은 헌릉참봉을 지내고 묘 마전 화진면 금곡이다.
○百鎰(백일)은 장예원 습독을 지내고 묘 옥천 북면 장계리이며, 峻(준)은 영해부사를 지내고 묘 상동이며, 應祥(응상)은 주부를, 涉(섭)은 진무원종공신에, 千鎰(천일)은 진사급제, 大致(대치)는 통정대부이며 묘 옥천 안내 정방리이고, 昱生(욱생)은 군자감정을, 維寬(유관) 은 장예원 판결사를, 務+女善(무선)은 감찰을, 萬鎰(만일)은 부사용으로 묘 오근 목령산이며, 巖(암)은 임란시 지세포만호로 전사하였다. 彰夏(창하)는 임오진사급제하여 묘 도산이다.
○亨燾(형도)는 효행이 있었으며 영과 함께 남공철에게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부탁하였고, 榮時(영시)경자생 배1905생으로 ?족보 간행, 贊周(찬주)는 진사급제하였다.
○在夏(재하)1922-는 충북가축병원장, 충북종친회장을 역임하고, 海演(해연)1920-은 연기군종치회장을 역임하고, 1997년 <충렬공의후예들> 간행, 1997년 <김흔장군연기대첩비> 건립, 2000년 <연기대첩비> 건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慶默(경묵)1917-의 아들 思永(사영)은 진천군종친회장을 역임하고 그의 아들 聖演(성연)1948-은 안렴사공 묘역 조경사업에 기여하는 등 종사에 헌신하고 있다.
70) 김취(金吹)
공은 판교 환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양성현감에 이르렀다. <오창지>
○김철손(金鐵孫)
공은 현감 취의 아들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오창지>
71) 김암(金巖)
공은 안렴사공 사렴의 7대손이다. 선조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세포 만호에 제수되었는데, 임진년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죽으니 초혼하여 장례하였다. <오창지>
○ 김창하(金彰夏, 1663- )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며 찰방 철손의 현손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오창지>
1663년 계묘(癸卯)생으로 자는 덕채(德彩)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다 1702년(숙종28) 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에서 식년(式年) 생원(生員)급제하였는데, 이때 시험관은 김진규(金鎭圭) 행대사성겸홍문제학(行大司成兼弘文提學), 권상유(權尙游)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이었다.
○ 김해연(金海演)
海演(해연)1920-은 연기군종치회장을 역임하고, 1995년 <연기대첩연구> 간행, 1997년 <충렬공의후예들> 간행, 1997년 연기군 서면 국촌리 정좌산 아래에 <김흔장군 연기대첩비> 건립, 2000년 연기군 고당저수지 주변에 거대한 <연기대첩비> 건립에 중추적 역할을 다 하였다.
■<연기대첩연구>의 책자 배본에 즈음하여 (1995.3, 김해연)
지난 3년동안 연기대첩에 대하여 연기군의 용역으로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조사한 결과를 <연기대첩연구> 라는 제목으로 한 책자에 묶어서 여러 종친에게 배분해 드리게 된 점 감사히 생각합니다.
이 대첩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正史에도 나와 있지만 이번 조사연구로 더욱 자상한 점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일뿐 아니라 학자 중에는 大捷이 아니고 勝捷이라는 이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완전하게 大捷으로 확립되었으니 더욱 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燕岐大捷(연기대첩)에 대해서는 우리문중 족보에도 나타나 있는 바 고려의 상장군이시며 충렬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흔 할아버님으로 700여년 전에 몽고 및 합단적의 수차에 걸친 침공으로 급기야 나라가 위급 지경에 이르러 충렬왕께서는 강화도로 피난길에 있을 때 이곳 연기 正佐山에서 적을 완전 섬멸, 두 번 다시 침공 못하도록 종지부를 찍은 대첩의 구국명장 이었음에도 8.15해방후 우리나라 역사에 7대 대첩이 분명한데 6대 대첩만을 국사에 편찬 학교역사 교육에 시행하였고 정부에서는 大捷地마다 성역화해서 구국충절을 다한 용장들에게 빛난 얼을 천추만대 받들게 하고 있으면서도 유독 연기대첩은 삭제되어 그 날의 빛을 잃고 금일에 이르렀다 함은 우리들 온 후손된 자의 성의 부족과 한 시대의 인물고갈이라는 점에서 개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천우신조로 지난 93년에 만시지탄은 있으나 우리군 종친회에서 이 사실을 알고 온 종친이 성과 열을 한데 모아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만 천하에 밝히고자 노력해 온 결과가 책자로 발간되며 국내 요처에는 물론이고 우리 문중 가가호호마다 보물 가보로 모시게 된 점 감개무량하게 생각됩니다.
이는 오로지 여러 종친들의 물심양면의 끊임없는 협조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드리는 바이오니 배분에 유루 없으시기 바라옵니다.
1995년 3월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장 해연 배상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5, 김해연)
발간사
역사란 후대에 교훈을 줄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인정되고 소중한 것이지, 후대에 아무런 교훈을 주지 못한다면 이는 나무렇게나 낙서한 雜記에 불과한 것이리라. 무릇 국가에는 國史가 있고, 가문에는 宗史가 있고, 개인에게는 一生史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안동김문 특히 연기지역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선조님들께서 어떤 이유, 어떤 경로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 선조님들의 삶의 발자취는 어떠했으며 그 후손인 우리는 선조님들의 거룩하고 숭고한 뜻을 얼마나 소중하게 계승 발전시켜 왔는지를 조명해 보고 종친 모두가 반성할 부분과 더욱 승상할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같이 공유하고, 고민해 보고자 이 소책자를 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연기지역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종친 모두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중의 한 분인 충렬공 할아버지의 둘째 자제분인 흔자 할아버지께서는 고려말 장군으로서 원나라 합단적이 압록강을 건너 침범하여 연기지역까지 침노했을 때 지금의 서면소재 정좌산 대첩에서 섬멸함으로써 나라에 큰 공을 세우신 사실이 <고려사열전>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로부터 7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역사 속에 사장된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연기군 문화원장, 연기군 노인회장등 지역에 뜻있는 분을 비롯한 종인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한 바탕 위에서 학계와 관계 요로에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고, 30여년 전 사학자인 재붕 종친이 연기군지에 발표한 논문과 <고려사> 정사를 근거로 1993년 공주대학교 역사학자 이해준, 윤용혁 교수 등에게 역사적 기록과 현장조사 등을 통한 객관적인 연구를 의뢰하였고 이미 여러 종친께서 소장하고 계신 <연기대첩 연구>라는 논문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각고의 노력으로 이제 국가예산을 할당받아 흔자 할아버지의 대첩지를 성역화하는 기초 작업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또 우리 안동김문은 충렬공의 후예들로 충렬공 12대손인 진천공(=김완) 할아버지께서 소정면 운당리에,
충렬공 현손인 전서공(=김성목) 할아버지께서 전의면 양곡리에,
충렬공 11대손인 진사공(=김함) 할아버지께서 금남면 봉기리에,
충렬공 14대손인 용양위부호군(=?) 할아버지께서 금남면 달전리에 각각 낙향, 정착하신 이래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지금은 조치원을 비롯한 전의면, 소정면, 동면, 금남면 등지에 대단위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었던바, 이와 같은 사실이 흔자 할아버지의 대첩지라는 이유가 정착의 큰 동기가 되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에 우리 연기군 종친회에서는 이러한 사실과 종친들이 삶의 발자취를 모으기 위하여 공주대학교 사학과 이해준 교수에게 사적 고증과 사실 기록의 정리를 부탁하였고, 마침내 그 결과가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이라는 연기지역 宗史로 발간되게 되었다.
이 책을 펴내기까지, 4년여 기간동안 수백년 동안이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와 유적지 그리고 유물 등을 찾아 조사 분석하고 고증을 통해 연구해 주신 이해준 교수와 그 자료조사, 정리를 도와준 학생제군께 연기지역 종친 모두는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연기대첩 연구를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자신의 일처럼 성과 열을 다해 주신 연기군 문화원장 장영 선생, 연기군 노인회장 이상은 선생과 임영수 박물관장에게도 감사드리는 바이다.
특히 전서공파 在山 종인은 이 책자를 편집하는데 소요된 재원 500만원을 흔쾌히 부담하면서 전국에 거주하는 전서공 후손에게는 한 분도 빠짐없이 배부토록 요청한 바 있어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서공 제종친들께서는 재산 종인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해주기 바란다.
한편 이 결실을 맺기까지 개인적 일들을 물리치고 물심양면으로 헌신한 연기지역 종친회 총무 은회 종친을 비롯한 각지역 이사님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 지면을 통하여 우리 종친 모두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선조님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얼과 정신을 이어받아 숭조사상과 그 위업을 계승발전 시키는 데 배전의 노력과 정성이 모아지기를 간곡하게 당부드리는 바이다.
우리 안동김문은 예부터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크고 작은 많은 일을 하셨고 충신의 가문이었음을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우리의 자긍심을 더욱 고양시켜 나가기 위해 모처럼 단합된 우리 종친간의 우애와 협력 정신이 자자손손에 길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종친제위에 간곡하게 호소해 두고자 한다.
이 조그만 사업이 우리 종친 모두의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종친의 소중함을 크게 발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단합하는 계기기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1997. 5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회장 김해연 배
▣ 김주회 - 일단 소개해 드리고 교정중에 있습니다. 완료되면 <교정 완료> 리플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
▣ 김태서 -
▣ 김주회 - <교정 완료>
▣ 솔내 -
▣ 김항용 - 홈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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