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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휘하장수들(2)- 潘阜-거제반씨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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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9-03 18:13 조회1,8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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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반씨(巨濟潘氏)

  반씨(潘氏)는 중국(中國) 형양(滎陽 : 지금의 하남성 개봉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의 아버지)의 여섯째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아들 계손(系孫)이 반(潘) 땅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은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유학자(儒學者)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족(名族)으로 일컬어진 반씨(潘氏)는 송(宋)나라 출신인 반 부(潘 阜)가 이종(理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몽고정벌(蒙古征伐)을 간청했다.
  그런데 간신(奸臣)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은밀히 죽이게 하였으나, 원(元)의 세조(世祖 : 홀필렬)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사양한 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원재의 딸, 충렬왕비가 됨)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고려 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日本征伐)에 공(功)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巨濟)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반씨(潘氏)의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挺)과 유항(有抗)을 시작으로 가세(家勢)가 일어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散居)하며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기성(奇聲)·충주(忠州)·남평(南平)·결성(結城)·청도(淸道)·홍천(洪川)·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거제반씨정미대동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에는 거제 반씨로 합보(合譜)하였다.
  가문(家門)을 중흥시킨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부(阜)의 증손(曾孫) 익순(益淳)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덕해(德海)와 복해(福海)가 현달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마련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신(名臣)으로 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복해는 왕(王)이 사냥을 나가 말에서 떨어져 멧돼지의 습격을 받게 될 순간 활을 쏘아 왕을 위기에서 구해낸 일화가 전하며, 밀직부사(密直副使)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추충양절익 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에 올라 제성부원군(濟城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최 영(崔 瑩)장군을 암살하려던 조 반(趙 半)·임견미(林堅味)와의 관련 혐의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가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복권되었다.
  한편 복해는 아들 자건(自建)은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 조선(朝鮮)이 개국된 후 태종조(太宗朝)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영평군(永平君)에 봉해졌으나, 손자 충(忠)도 조선 창업에 공(功)을 세워 개국원종좌명일등공신(開國原從佐命一等功臣)으로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광주백(光州伯)에 추봉되었다.
  세칭 절효선생(節孝先生)으로 불리웠던 유(儒)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해(德海)의 손자(孫子)로서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자 여막(廬幕)에서 3년동안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號)의 손자 효손(孝孫)은 세조(世祖) 때 황주 목사(黃州牧使)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나갔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한 우형(佑亨)은 당세의 석학(碩學)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이성군(李城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내고 기성군(岐城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청렴근엄(淸廉謹嚴)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던 석평(碩枰)은 1472년(성종 3) 부사과(副司果) 서린(瑞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인후(仁後)는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조령(鳥嶺 : 문경새재)에서 공(功)을 세워,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순절한 중인(仲仁 : 공조 좌랑 응기의 아들)·중경(仲慶) 형제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과 싸우다가 강화(江華)에서 전사한 일량(日良)이 유명했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분으로 할복자결한 하경(夏慶 : 일명 학영)이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 시조 묘소는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계주리 국토봉에 있으며,  향사일은 9월 9일 이다.
   ○ 반정승묘(潘政丞墓)
       국사봉의 중허리에 거제반씨(巨濟潘氏) 시조(始祖) 반부(潘阜)의 묘소로 원종(元宗) 8年(1267) 원(元)나라의 한림학사(韓林
       學事)로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갔다와 동15년(同15年)(1274) 다시 나오면서 제국대장(齊國大長) 공주(公住)인 알리
       공주(謁里公住)를 모셔와 충열왕비(忠烈王妃)가 되었으니 문하시중(門下侍中)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에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 문절사(文節祠)
       거제반씨(巨濟潘氏) 시조 반부(潘阜)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반중인(潘仲仁) 반중경(潘仲慶)을 봉사하는 사우를 반
       씨재실이라 하며 서문(西門)마을 도론곡(道論谷)의 거제공설운동장(巨濟公設運動場) 북쪽에 있다.
   ○ 문파로는 시구공파.총랑공파.문효공파.감찰공파(남평관).문헌공파(광주관).강화공파(결성 관)이 있다.

전국의 집성촌
 
  - 충북 음성군 원남면 포천리
  - 전남 장성군 서삼면 송현리, 서삼면 일원
  - 전북 진안군 마령면 연장리
  -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라동
  - 전북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
  - 경북 칠곡군 칠곡면 매천동
 
반씨는 1975년에 3,548 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149가구,  21,5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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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32렬烈 33재載 34석錫 35문汶 36휴休 37형炯 38배 39금錦 40순淳 41수秀42영榮 43규奎 44용鎔 45원沅 46권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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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회 -
▣ 김항용 - 연일 충렬공과 관련인물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 김윤식 - 무거운 내용이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공부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태서 -
▣ 김상석 - 흐뭇한 마음으로 유익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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