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휘하장수(7) 한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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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9-09 17:47 조회1,540회 댓글0건본문
한희유(韓希愈)
?∼1306(충렬왕 32). 고려의 권신. 가주(嘉州)출신.
원래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의 아전이었다. 군졸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기 때문에 항상 왕의 은덕에 감격하였고, 왕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편,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잘하고 담력도
대단하여, 1280년(충렬왕 6) 5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성(固城)·칠포(漆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일개 대정(隊正)에서 출발하여 대장군이 된 그에게는 모함의 사건도
발생하였다.
1282년에는 영통사(靈通寺)승려 홍탄(洪坦)이 개인감정으로 모함하여
국문을 당한 적도 있으나, 무고가 발각되어 홍탄이 오히려 섬으로 귀양가
게 되었다.
그뒤 1287년에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좌익만호(左翼萬戶)가 되었다.
1290년에는 쌍성(雙城)에 주둔하여 합단적(哈丹賊)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같은해 8월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인 1291년에는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원나라에서는 설도간(薛#도62干) 및 나만알대왕(那蠻#알09大王)을 보내어
구원한 적이 있었으나, 또다시 정병(精兵)이 와서 대진하게 되자, 창을 잡고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입하니 적진이 놀라 무너져버렸다.
또한, 용사를 잡아 목베어 그 머리를 창 끝에 매다니 적진이 모두 전의를
잃고 크게 패하였다.
같은해 6월에는 충청도에서 합단의 잔당을 추격하여 적군 580여명의 항복을
받았다. 충렬왕은 소환하여 강도(江都)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다시 1291년에
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고 궁시(弓矢)·옥대(玉帶)·은(銀) 등을
전공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삼고
진변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
1295년 8월에는 김신보(金信甫)의 참소로 조월도(祖月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흔(김방경의 아들)과 밀직 원경(元卿)에 의하여
불법한 일을 꾀한다고 하여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좌승
합산(哈散)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후 등에게
부탁하였으나, 인후·김흔은 원나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탑해(塔海)·활활불화(#활03#활03不花) 등에
의하여 원나라에 호송되었다.
1300년 왕이 원나라에 가서 희유와 인후의 시비곡직을 밝혀 다시 환국하게
되었다.
1302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고, 다음해에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
에 임명되면서 7월에는 원나라의 명에 의하여 석주(石胄)와 그 아들을
연경으로 압송하기도 하였고, 1305년 11월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행차하였다.
▣ 김태서 - 이 사건으로 김흔할아버지께서 원나라로 피신 하신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 김주회 - 한희유는 충렬공(김방경)의 의남(?)이라는 기록과 일본정벌 과정에 충렬공을 보필한 측근이었으나 충렬왕과 충선왕의 정권교체기에 한희유는 충렬왕편에 충렬공과 둘째아들 김흔장군은 충선왕편에 섬으로써 김흔장군과 한희유는 1290년대 초에는 연기에서 합단적을 함께 몰아내는데 일등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1300년 전후에는 세력다툼을 벌이면서 서로 귀양보내는 일까지 있게 됩니다.
▣ 김윤만 - 한희유가 충렬공의 양아들이란 기록을 본 것 같습니다.
▣ 김윤식 - 충렬공 할아버지나 도첨의공(휘 흔) 할아버지 등 우리 문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집중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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