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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춘정집 해제(맺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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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9-13 00:43 조회1,5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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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맺음에서
변계량은 태종과 세종의 양조에 걸쳐 오랫동안 문형의 자리에서 나라의 문한을 주관한 문신 대학자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학식이 고금에 사무치며 시문(詩文)이 탁월하여 사대교린의 사명(詞命)은 물론 나라의 문한과 왕실의 문서를 거의 도맡아 주관하였다. 그의 손을 거친 문사(文辭)는 워낙 전아하고 정화로워, 우리 조정의 문신들은 물론 멀리 중국의 문신에게까지 회자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세종 대왕은 후학들에게 숭유 국정(崇儒國政)의 해범(楷範)으로 삼기 위해 그의 유고를 집현전(集賢殿)에 보내서 수교하게 한 다음, 경상 감사(慶尙監司)에게 내려보내어 간행, 보급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여기에 수록된 시문(詩文)은 그 시관(詩觀)과 시풍(詩風)이며 문사(文辭)의 기교가 모두 주옥 같은 정수작들이므로 조선 초기의 시문학(詩文學) 연구에 있어서 값진 자료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문형의 자리에서 국왕의 명으로 제찬한 많은 국정에 관한 문한과 왕실의 요청으로 제술한 문한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1차적 자료의 성격을 띤 것이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춘정집》은 다른 문집과 달리 불교와 도교 관계의 글이 다양하게 수록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왕명으로 제찬한 비탑명(碑塔銘)과 사사로이 작성한 제문(祭文) 등의 전기 자료도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 이단(異端)의 글에 있어서 불교는 거의 모두 삭거되고, 도교는 그 일부가 삭제되었으며, 전기 자료는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제문이 적지 않게 산삭되었다. 이것이 비록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도도한 척이사상(斥異思想)의 조류(潮流)요, 명분주의(名分主義)의 거센 세파(世波)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렇듯 임의로 저자의 노작을 대폭 삭거하여 그의 학문과 사상 체계를 왜곡시키고 생애의 경력까지 그 실체(實體)를 은폐하였음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곡학기세(曲學欺世)’의 혹평을 후세에서 길이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국역본에서는 중간본이 의도적으로 삭거한 시문은 물론, 그 밖에도 누락시킨 일문(逸文)과 결문(缺文) 그리고 임의로 손질한 글에 이르기까지 그 원문을 모두 축쇄 영인(縮刷影印)하여 각 권말에 수록하였다. 이들 복원한 원문을 통해 저자의 학문과 사상 체계는 물론, 그가 한평생 걸어온 모든 발자취를 빠뜨림 없이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특히 의도적으로 거의 모두 삭거한 불교 관계의 자료는 숭유배불 정책을 국시로 삼은 조선 왕조가 어찌하여 국초부터 국왕과 왕실이 숭불 행사를 공공연하게 행하였는지 그 배경과 사정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또한 긴요한 자료로 이용되길 기대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에 출간하는 《춘정집》 국역서는 그 어느 다른 문집의 국역서보다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하겠다.




▣ 김윤만 - 춘정이 변계량의 호였군요.
▣ 솔내 - 춘정 번계량~~~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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