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운현궁과 대원군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01-11-08 18:30 조회2,121회 댓글0건

본문

요즈음 ,KBS 사극 "명성황후"(수.목 9;50)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습니다.

 몇해전 대원군(흥선대원군:이하응;추존 대원왕)의 묘소에 대해 지역 잡지에 쓴

졸문이 있어 재미삼아 옮겼습니다.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솔내농장 김 영 환

마석에서 달기리로 가는 길로 조금 가다가 황새머리 동내를 지나 화도정수장쪽으로

접어들면 별안간 하늘이 안 보일 정도의 소나무 숲으로 덮인 길을 만난다.

이 숲길을 따라가면 우리가 운현궁 (雲峴宮)이라 부르는 곳이 나오는데 어떻게

이곳을 운현궁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운현궁이란 현재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사저로인데 

고종황제가 임금이 되어 궁궐로 들어가기 전에 살던 곳으로, 몇해 전에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복원공사를 마무리하여 지금은 어느정도 옛모습을 되찾았다.

그런데도 이곳 마석(화도읍) 창현리를 운현궁이라 불리는 것은 이곳에 운현궁의

주인공들이 묻혀 있는 묘역이기 때문이다.

운현궁은 고종황제가 12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어 궁궐로 들어가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이라는 이름하에 10여년간을 강력한

권력을 누리며 살던 사저이다. 대원군이란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하였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서 왕의 아버지로서 누리는 칭호인데, 조선시대에는 네명의 대원군이 있었으니,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후에 원종으로 추존),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다. 그러나 유독 대원군이라 하면

흥선대원군을 일컫는 것 같이 된 것은 세명의 대원군은 모두 죽은후에 아들이 임금이

되어서 추존하여 대원군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만이 살아있는 대원군으로서 정치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한지 10여년만에 며느리인 명성황후에게

권력을 빼앗겼지만 임오군란으로 권력을 다시 찾았으나 이도 잠시뿐, 명성황후는

청국군을 불러들이고 청나라 장수 이홍장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국 천진 보정부에

연금하였다.

  3년후 대원군은 청나라에서 돌아왔지만 명성황후의 견제로 권력의 근처에는 접근도

 못하고 파란만장한 79세의 일생을 운현궁 노안당에서 마감하였다. 대원군은 살아

생전에 명당터로 알려진 고양군 공덕리에 아소당(我笑堂)이라는 별장을 마련하여

이곳에 무덤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에 46일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부대부인

민씨와 나란히 묻혔다.

  그후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대원군도 대원왕으로 추존하게

되었는데, 왕에 걸맞는 능을 만들기 위하여 1908년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

(지금으 문산읍 운천리) 로 옮기고 이를 흥원(興園)이라 명하였다. 그후 아소당 별장은

헐리어서 당시 개화승 이동인이 거처하던 신촌 봉원사의 큰방으로 옮겨 지었으니,

현재 "奉元寺"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을 신촌 봉원사 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 아닌가 싶다. 대원군이 처음 묻혔던 아소당 별장터는 현재 마포구 염리동

서울여고와 동도중학교가 있는자리라고 하니 명당도 아무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대원군의 일생처럼 그의 묘소도 이곳 파주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게 되니 6.25후 휴전선과 인접한 작전지역이어서 현지에 주둔한 미군의 강력한

요구에 의하여 남양주 화도면 창현리의 현 운현궁 묘역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이때

1,0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과 공군 106 시설대대와 현지주둔 미 제2보병사단에서

각종 중장비와 대형 차량을 지원하여 공사를 마쳤다 한다. 이곳 마석 창현리 운현궁

묘역은 원래 대원군의 큰아들인 이재면의 묘소이다. 

  이재면은 1845년 운니동 운현궁에서 태어나서 1912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고

1912년 운현궁에서 죽었다. 처음의 묘는 경기도 김포군 풍곡리에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920년 이곳 창현리로 옮기고 이 일대를 운현궁 소유로 하였으니,

지금의 문안산 전부와 양주골프장에서 모란공원묘지까지 광대한 땅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분할 매각하고 겨우 묘역만 간신히 남아있는 실정이다. 완흥군 이재면의

아들은 영선군(永宣君) 이준용(후에 이준으로 개명) 인데 1870년에 태어나서 1917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아들도 없이 갑자기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운현궁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 영선군 이준은 그를 가장 사랑했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묘소인

아소당 옆에 묻혔다가 대원군이 파주로 이장한 후 1948년 이곳 창현리로 옮겨왔다.

이재면의 작은 아들인 이문용은 일찍 요절하였다.

   영선군 이준이 아들없이 세상을 떠나니 운현궁의 대가 끊기게 되자 이준의 후실인

광산김씨는 고종황제를 찾아가 호소하니 고종황제는 그의 손자인 이우를 운현궁의

양자로 보내어 고종의 사가인 운현궁의 대를 잇게 하였다. 흥영군(興永君)에 봉해진

이우는 고종의 아들 의친왕과 수인당 김씨 사이에서 1912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간특한 계략에 의하여 1922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 동경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고 1929년 일본왕실의 예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졸업과 동시에 중국 상서성 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다 1945년 일본본토 히로시마로

전근되었는데 그해 8월6일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희생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기구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흥영군 이우는 일본왕실과 정략적으로 혼인시키려는 일본의 계략을

교묘히 물리치고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의 증손녀와 뜨거운 연애 끝에 결혼하였으니

일본에 항거하는 의지를 보였지만 쇄국주의의 대원군과 개화주의의 박영효가 사돈이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니겠느가! 아직도 이곳 마석에서는 "마마" 라고 호칭되는

박찬주여사는 박영효의 증손녀로 태어나 아우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1995년 7월 1

3일에 운현궁이 아닌 북아현동 자택에서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이곳 운현궁 묘역에

묻혔다.

   흥영군 이우와 박찬주여사와의 사이에서 두아들이 태어났으니, 장남은 이청인바

1935년에 태어나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계속 살다가 얼마전에 귀국하였다. 작은아들

이종은 1941년에 출생하여 미국에서 공부하던중 1966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로서

운현궁의 내력을 대강 살펴보았으나, 우리고장에 흥선대원군의 묘소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리 한번 운현궁 묘역인 흥원(興園)에

올라가 구한말 격동기를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이곳에 묻힌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일생을 되새겨 보면서 짙을 감회에 젖어 들어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