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금부도사 김공 의인 심씨 합장 지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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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9-23 01:42 조회1,457회 댓글0건본문
【본 묘지명의 번역은 2001.11. 9. 주회 종친께서 金水亭(경기포천) ②(신흠의 상촌선생집 기록)으로 이미 올린 바 있습니다. 자료의 보완을 위하여 원문을 더하면서 번역도 다시 인용하였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03. 8.31. 포천 선영 벌초길에 들린 도사공(대섭) 묘소의 묘갈에도 상촌 신흠선생의 묘지명이 있음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義禁府都事金公宜人沈氏合葬誌銘幷序 072_035d ▣
欽早從李公潤卿游。介而得雅於其舅金公。公蓋恂 恂恬穆長德君子也。間嘗餉客。酒漿脯▼。卽毋不齊 整而給也。婢御僮使。卽毋不謹恪而度也。於是乎復 知公有賢內助焉以相之。曁金公歿。聞者咸咨嗟悼
▶ 072_036a
其不究。而至數婦人之飭行持節者。則又必以金公 之室爲稱首。欽益驗疇襄所見知愈信也。一日潤卿 氏使其子敏求携金公行狀及其室沈氏懿迹。合一 通。來屬壙銘於欽曰。茲遺孤志也。欽辱習於金公也 久。重與潤卿通家。於遺孤亦不啻忘年。則何敢不敬 爲之言。按狀金安東大姓。公諱大涉。字士亨。新羅敬 順主後也。遠祖上洛公方慶。有大功業。爲麗朝宗臣。 有諱九容。以文章節義名當世。寔公七世祖也。高祖 自壤。內贍寺僉正。贈戶曹參議。曾祖禮生。淸道郡 守。贈兵曹參判。祖胤宗。慶尙道節度使。考諱震紀。 活人署別坐。妣李氏。驪興望族。生員敏生女也。嘉靖
▶ 072_036b
己酉生公。生三歲。喪二親。鞠于姑家。少有異質。不煩 師承。自力於學。萬曆癸酉。捷司馬。人嘖嘖謂曉夕發 軔。俄以病廢擧子業。自守泊如。若無意於世者。壬辰 兵起。挈家避嶺北。仍西指行在。癸巳。薦授義禁府 都事。遷造紙署別坐。時皇朝將士東征者旁午。宋 經略應昌嚴重自持。爲諸府最。尹海平根壽膺儐接 之任。特擧公爲屬。公拮据辦治。俱中肯䋜有餘地。海 平公亟稱其才。終以勞勩遘疾。甲午夏。卒于京師旅 舍。年僅四十六。因亂權厝于水原。越八年辛丑。移窆 永平縣南鍾賢山未坐丑向之原。距先壟二里。遺意 也。公淳愨厚重。御家衆以寬。訓子弟以嚴。行已接物。
▶ 072_036c
必由諶信而不設町畦崖岸。且不喜言人過失。相識 皆親慕之。以爲不可及。孝友天至。椎之宗黨。竝得其 歡心。凡遇祀事。夙戒供具而致其蠲潔。節文儀式。畢 据先賢制禮而行之。常以不得逮親之存爲至痛。語 及必涕。孼姊之無歸者。分與臧獲而經紀之。庶出群 從之失所者。家育之猶已出。不事生產。唯杜門自適。 或數月不出。時與親舊樂飮。盡醉盤洽而止。性好山 水。有小築於西湖。且買精舍于永平牛頭淵上。爲終 老計。公之葆醇蘊朴旣如此。而得沈氏爲配。沈氏聰 慧秀愨。拔於倫類。事夫子一於柔巽而無違也。待族 姓一於敦睦而無間也。莅閫能範而肅也。享祀能敬
▶ 072_036d
而誠也。至於需應賓客。惠卹窮匮。各盡其道。而未嘗 見其靳固也。巫祝禱禳。不接於門庭。子患痘而危。有 勸禱者。答曰。有神可禱。莫如吾祖先。禱于家廟果愈。 自遭公喪。以死自矢。水浆不入口。號哭不絶聲。廬于 墓側。朝夕執奠。擗踊如初喪。過再朞猶垢面囚首。哀 痛無節。秪以饘粥度日。如是者六七年。柴毀骨立。絶 而復甦。猶不肯以醫藥求治。子矱泣諫。奉還京第。而 衣服起居。不改斬衰之容。以終其身。嘗聞矱拜參奉 不樂曰。官無卑。從官則王臣也。安可去病母而就仕。 矱亦去官。沈氏與公同年生。戊申四月。竟不起。距公 歿之十五年也。年六十。臨終不少戚。唯以護先塋立
▶ 072_037a
家廟爲托而已。若宜人者。可謂淑愼其身。令譽有終 者矣。用是年九月。與公葬同墳。沈氏系出靑松。靑城 伯德符之裔。華胄燀赫。世誕王妃。祖曰通禮院通 禮達源。贈吏曹參判。考曰京畿監司銓。贈補祚 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母曰貞夫人李氏 公生一男二女。男矱。十八。登進士。有文譽。擧授宣陵 參奉不拜。娶議政鄭彥信女。生男幼。女長適李睟光。 歷臺閣。今爲洪州牧使。淸名雅望。爲世模楷。迺所謂 潤卿公也。洪州生二男一女。男長聖求。次敏求。女適 進士權儆。生一男三女幼。嗚呼。以公之德。洎宜人之 賢。而不克享有福履。卒止於斯。天之報施善人其何
▶ 072_037b
如也。或者畜而未發。歸成于後乎。銘曰。 坎而封。哲人之藏。順而寧。得天之常。茁于後。惟報之 食。賁諸幽。其迹之卓。
《出典 : 象村稿卷之二十三 墓誌銘》
※ □는 한자가 지원되지 아니하여 공란으로 하였으나 추후 별도 방법으로 보완하겠습니다.
▣ 의금부도사 김공 의인 심씨 합장 지명 병서 ▣
--내가 일찍부터 이공 윤경(李公潤卿)을 종유하면서 공의 소개로 그의 장인 김공(金公)과 친분을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김공은 대체로 진실하고 화평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였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술과 음식 등을 모두 정결하고도 넉넉하게 장만하여 대접하였고 비복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근신하여 법도가 있었으니, 따라서 공에게 현명한 내조(內助) 가 있어 돕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다. 김공이 세상을 떠나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공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슬프게 여겼다. 그리고 부인으로서 몸가짐을 잘하고 정절을 지킨 이를 손꼽아 말할 적에는 반드시 김공의 부인을 제일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난날 보아 알고 있는 것에 징험해 보면 더욱 믿을 만하였다.
--어느 날 윤경(潤卿)씨가 아들 민구(敏求) 를 시켜 김공의 행장과 부인 심씨의 훌륭한 행적을 함께 기록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그 아들의 뜻입니다.” 하였다. 내가 김공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윤경과도 통가지의(通家之誼)가 있으며 그 아들 역시 망년(忘年)의 친구일 뿐만이 아니고 보면 어떻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상고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고, 공의 휘는 대섭(大涉), 자는 사형(士亨)으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그리고 원조(遠祖)인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은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고려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휘 구용(九容)은 문장과 절의로 명성이 당대에 드높았는데 이분은 바로 공의 7대조이다. 고조 자양(自壤)은 내섬시 첨정으로서 호조참의에 추증되
었고, 증조 예생(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윤종(胤宗)은 경상도 절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휘 진기(震紀)는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지냈으며, 어머니 이씨는 여흥(驪興)의 명문 거족으로서 생원(生員) 민생(敏生)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 4)에 공을 낳았는데 3세 때 양친을 여의고 고모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에 주력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자 사람들이 곧바로 벼슬길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담박함을 지키어 마치 세상일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임진년에 병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영북(嶺北)으로 피난갔다가 이어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 에 갔다.
--계사년에는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에 옮겨 졌다. 이때에 동정(東征)나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 기세를 부렸으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엄중히 규율을 지키는 제부(諸府) 중에 으뜸이었다.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가 빈접사(□接使)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특별히 공을 추천하여 그의 관속(官屬)으로 삼았는데, 공이 모든 일을 힘껏 조치하여 복잡한 상황을 여유있게 처리하였으므로 해평공이 공의 재능을 자주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과로로 인하여 병이 나서 갑오년 여름에 서울 객사(客舍)에서 별세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46세였다. 난리로 인하여 임시로 수원(水原)에 장사했다가 8년이 지난 신축년에 영평현(永平縣) 남쪽 선산에서 2리(里) 떨어진 종현산(鍾賢山) 미좌(未坐) 축향(丑向)의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공은 순박하고 성실하고 후중하여 집안 사람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자제들을 엄하게 교육시켰으며, 몸가짐에 있어서나 남을 대할 때나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하여 물아(物我) 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아는 사람은 모두가 친애하고 연모하면서 스스로 공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타고난 효성과 우애를 종족에게까지 베풀었으므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을 당해서는 일찍부터 재계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장만하였으며 절차와 의식을 모두 선현(先賢)의 예제(禮制) 에 따라 시행하였다. 항상 부모가 생존했을 때 섬겨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어 부모에 언급이 될 적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모(庶母)가 낳은 누이가 갈 곳이 없게 되자 비복을 나누어 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서출(庶出)의 사촌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러주었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다만 집에 들어앉아 유유자적하며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마냥 취하여 다분히 즐기기도 하였다. 품성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서호(西湖)에 조그만 집을 지었고 또 영평(永平) 우두리(牛頭里) 연못가에 있는 정사(精舍)를 사서 노년(老年)을 보낼 계획을 하였다.
--공이 이처럼 순박한 심성(心性)을 지니고 있는데 다가 심씨(沈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심씨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빼어나고 성실하여 무리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부군을 섬기는 데는 한결같이 유순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었고, 일가 친척을 대해서는 항상 화목하여 간격이 없었으며, 규중 규범이 엄숙하였고 성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며, 빈객을 접대하거나 궁핍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데 있어서도 가각도리를 극진히 하여 인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도 푸닥거리하는 무당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는데 아들이 천연두를 앓아 위태롭게 되자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를 권하니 이에 부인이 대답하기를 “기도할 만한 신(神)이 있다면 우리 선조(先祖)만한 신이 없을 것이다.”하고, 가묘(家廟)에 기도한 결과 아들의 병이 과연 나았다.
--공의 상을 당하고부터는 죽기로 맹세하여 미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전(奠)을 올릴 적에는 초상 때처럼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대상(大祥)을 치르고도 때묻은 얼굴에 죄인의 머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지없이 애통해하고 죽만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6, 7년 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뼈만 남도록 몸이 야위어 기절을 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도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아들 확(□) 이 울면서 간하여 서울 집으로 모셔왔으나 의복이며 일상 생활에 있어 상복 중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 언젠가 확(□)이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벼슬을 하면 왕의 신하인데 어떻게 어미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겠는가.”하자, 확도 역시 관직에서 떠났다.
--심씨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무신년 4월에 끝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죽은지 15년이 되는 해로서 향년은 60세였다. 부인은 임종 때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직 선영(先塋)을 보호하고 가묘(家廟)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만 부탁하였다. 의인(宜人) 같은 분은 몸가짐에 있어 근신하였고, 훌륭한 명성을 끝까지 지닌 분이라고 이를 만한다. 이해 9월에 공과 같은 무덤에 합장하였다.
--심씨는 관향이 청송(靑松)으로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예인데, 후손이 혁혁하여 대대로 왕비(王妃)가 탄생하였다.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지낸 조부 달원(達源)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경기 감사를 지낸 아버지 전(銓)은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자헌대부 예조판서 청파군(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이다.
--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확(□)은 18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고, 천거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받았지만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정승 정언신(鄭彦信)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고, 큰 딸은 이수광(李□光)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수광은 바로 윤경공(潤卿公)으로서 대각(臺閣)을 거쳐 지금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며 청아한 명망으로 세상에 모범이 되고 있다. 이공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성구(聖求), 차남은 민구(敏求)이고 , 딸은 진사 권경(權儆)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아, 공 같은 훌륭한 덕과 의인 같은 현숙(賢淑)함으로 복록을 누리지 못하고 끝내 여기에 그쳤으니 하늘이 선인(善人) 에게 보답하려는 것이 무엇이던가. 아마도 비축하여 내놓지 않다가 후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길고도 높은 봉분 / 坎而封
--철인이 묻힌 곳이로다 / 哲人之藏
--순하게 살다가 편히 잠들었으니 / 順而寧
--하늘의 상도를 얻었도다 / 得天之常
--번창한 후손들이 바로 / 茁于後
--그 보답받는 것이리 / 惟報之食
--묘도에 지명 새기니 / 賁諸幽
--그 행적 우뚝하여라 / 其迹之卓
《출전 : 상촌선생집 제24권 묘지명》
※ 의정부도사 대섭공은 맏 사위가 천주실의를 소개한 지봉유설로 유명한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고, 둘째 사위는 허난설헌의 친 동생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입니다. 교산 허균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고 조선조에서 끝까지 신원이 되지 못한 관계로 본 묘지명에서도 언급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 신흠(申欽) [1566~1628] ▣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소인수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 ·사복시 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 ·이조참의 ·예조참의 ·병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 ·병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도승지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 ·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
▣ 이수광(李磎光) [1563~1628] ▣
--명종 18년∼인조 6년(1563∼1628). 향년 66세. 조선 중기 문신·실학자.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 태종의 7세손으로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선조 15년(1582) 진사가 되고 1585년 별시문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으나 용인(龍仁)에서 패하였다. 그 후 의주로 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지방에서 큰 공을 세웠다. 지평·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주청사(奏請使)로 연경(燕京)에 내왕하였는데 당시 명(明)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神父)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중국인 유변(劉변) 등이 지은 《속이담(續耳譚》 6권을 가지고 돌아와 한국에 최초로 서학(西學)을 도입하였고,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서양의 사정과 천주교 지식을 소개하였다. 특히 《지봉유설》은 당시 주자학적 세계관을 지녔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에 접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광해군 5년(1613) 이이첨(李爾瞻)이 대옥(大獄)을 일으켜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순천(順天)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지봉유설》 《채신잡록(采薪雜錄)》 《해경어잡편(解警語雜篇)》 《잉설여편(剩說餘篇)》 《승평지(昇平志)》 《병촉잡기(秉燭雜記)》 《찬록군서(纂錄群書)》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 이성구(李聖求)[1584~1643] ▣
--본관 전주(全州). 자 자이(子異). 호 분사(汾沙). 시호 정숙(貞肅). 1603년(선조 36) 진사를 거쳐 160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典籍), 예조·병조·형조의 좌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교리(校理)가 되었을 때, 마침 부친 수광(磎光)은 대사헌, 아우 민구(敏求)는 홍문관에 있었으므로 한 집에서 3인이 삼사(三司)를 지내게 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의 문제로 반대파의 모함을 받자 지평(持平)으로서 이들을 물리치고 이항복을 도왔다. 그후 영평(永平)판관으로 포천(抱川)에 이항복의 사우(祠宇)를 세웠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초에 사간에 발탁되고 대사헌을 거쳐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세자가 볼모로 선양[瀋陽]에 가게 되자 좌의정으로 이를 수행하였다.
--그후 한때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사은사로서 회은(懷恩)대군과 함께 선양에 가서, 명나라를 치는데 원군(援軍)을 보낼 수 없다는 조정의 방침을 전달하였다. 이듬해 돈령부영사로 사신이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41년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저서에 《분사집》이 있다.
▣ 이민구(李敏求) [1589~1670] ▣
--본관 전주(全州). 자 자시(子時). 호 동주(東洲)·관해(觀海). 1609년(광해군 1) 진사가 되고 1612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수찬(修撰)·지평(持平)·선위사(宣慰使)·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1623년(인조 1)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이듬해 이괄의 난 때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난을 진압했다.
--1626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정묘호란 때 병조참판으로 세자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했다. 1636년 이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쳐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려 하였으나, 적군이 어가(御駕)의 길을 막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후에 돌아와 경기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강화 함락의 책임으로 아산(牙山)에 귀양가고 1643년 영변(寧邊)에 이배(移配)된 후 1649년 풀려났다.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사부(詞賦)에 능했다.
--저서에 《동주집(東洲集)》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 《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있다.
▣ 솔내영환 - 원문까지.... 감사합니다.
▣ 김상석 - 조목조목 밝히는데 있어 거침이 없어 더이상의 찬사가 불필요 하네요!.
▣ 김윤식 - 자세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이윤경=이수광,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김항용 - 워드화, 그것도 한자로의 전환 작업은 엄청난 노고를 동반하는데---, 이 자료를 본 홈 어디에 넣어드리는 게 좋을지요?
▣ 김주회 - 귀한 자료!! 자세한 자료!! 엄청난 자료!! 즉시 참고하겠습니다.
▣ 義禁府都事金公宜人沈氏合葬誌銘幷序 072_035d ▣
欽早從李公潤卿游。介而得雅於其舅金公。公蓋恂 恂恬穆長德君子也。間嘗餉客。酒漿脯▼。卽毋不齊 整而給也。婢御僮使。卽毋不謹恪而度也。於是乎復 知公有賢內助焉以相之。曁金公歿。聞者咸咨嗟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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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不究。而至數婦人之飭行持節者。則又必以金公 之室爲稱首。欽益驗疇襄所見知愈信也。一日潤卿 氏使其子敏求携金公行狀及其室沈氏懿迹。合一 通。來屬壙銘於欽曰。茲遺孤志也。欽辱習於金公也 久。重與潤卿通家。於遺孤亦不啻忘年。則何敢不敬 爲之言。按狀金安東大姓。公諱大涉。字士亨。新羅敬 順主後也。遠祖上洛公方慶。有大功業。爲麗朝宗臣。 有諱九容。以文章節義名當世。寔公七世祖也。高祖 自壤。內贍寺僉正。贈戶曹參議。曾祖禮生。淸道郡 守。贈兵曹參判。祖胤宗。慶尙道節度使。考諱震紀。 活人署別坐。妣李氏。驪興望族。生員敏生女也。嘉靖
▶ 072_036b
己酉生公。生三歲。喪二親。鞠于姑家。少有異質。不煩 師承。自力於學。萬曆癸酉。捷司馬。人嘖嘖謂曉夕發 軔。俄以病廢擧子業。自守泊如。若無意於世者。壬辰 兵起。挈家避嶺北。仍西指行在。癸巳。薦授義禁府 都事。遷造紙署別坐。時皇朝將士東征者旁午。宋 經略應昌嚴重自持。爲諸府最。尹海平根壽膺儐接 之任。特擧公爲屬。公拮据辦治。俱中肯䋜有餘地。海 平公亟稱其才。終以勞勩遘疾。甲午夏。卒于京師旅 舍。年僅四十六。因亂權厝于水原。越八年辛丑。移窆 永平縣南鍾賢山未坐丑向之原。距先壟二里。遺意 也。公淳愨厚重。御家衆以寬。訓子弟以嚴。行已接物。
▶ 072_036c
必由諶信而不設町畦崖岸。且不喜言人過失。相識 皆親慕之。以爲不可及。孝友天至。椎之宗黨。竝得其 歡心。凡遇祀事。夙戒供具而致其蠲潔。節文儀式。畢 据先賢制禮而行之。常以不得逮親之存爲至痛。語 及必涕。孼姊之無歸者。分與臧獲而經紀之。庶出群 從之失所者。家育之猶已出。不事生產。唯杜門自適。 或數月不出。時與親舊樂飮。盡醉盤洽而止。性好山 水。有小築於西湖。且買精舍于永平牛頭淵上。爲終 老計。公之葆醇蘊朴旣如此。而得沈氏爲配。沈氏聰 慧秀愨。拔於倫類。事夫子一於柔巽而無違也。待族 姓一於敦睦而無間也。莅閫能範而肅也。享祀能敬
▶ 072_036d
而誠也。至於需應賓客。惠卹窮匮。各盡其道。而未嘗 見其靳固也。巫祝禱禳。不接於門庭。子患痘而危。有 勸禱者。答曰。有神可禱。莫如吾祖先。禱于家廟果愈。 自遭公喪。以死自矢。水浆不入口。號哭不絶聲。廬于 墓側。朝夕執奠。擗踊如初喪。過再朞猶垢面囚首。哀 痛無節。秪以饘粥度日。如是者六七年。柴毀骨立。絶 而復甦。猶不肯以醫藥求治。子矱泣諫。奉還京第。而 衣服起居。不改斬衰之容。以終其身。嘗聞矱拜參奉 不樂曰。官無卑。從官則王臣也。安可去病母而就仕。 矱亦去官。沈氏與公同年生。戊申四月。竟不起。距公 歿之十五年也。年六十。臨終不少戚。唯以護先塋立
▶ 072_037a
家廟爲托而已。若宜人者。可謂淑愼其身。令譽有終 者矣。用是年九月。與公葬同墳。沈氏系出靑松。靑城 伯德符之裔。華胄燀赫。世誕王妃。祖曰通禮院通 禮達源。贈吏曹參判。考曰京畿監司銓。贈補祚 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母曰貞夫人李氏 公生一男二女。男矱。十八。登進士。有文譽。擧授宣陵 參奉不拜。娶議政鄭彥信女。生男幼。女長適李睟光。 歷臺閣。今爲洪州牧使。淸名雅望。爲世模楷。迺所謂 潤卿公也。洪州生二男一女。男長聖求。次敏求。女適 進士權儆。生一男三女幼。嗚呼。以公之德。洎宜人之 賢。而不克享有福履。卒止於斯。天之報施善人其何
▶ 072_037b
如也。或者畜而未發。歸成于後乎。銘曰。 坎而封。哲人之藏。順而寧。得天之常。茁于後。惟報之 食。賁諸幽。其迹之卓。
《出典 : 象村稿卷之二十三 墓誌銘》
※ □는 한자가 지원되지 아니하여 공란으로 하였으나 추후 별도 방법으로 보완하겠습니다.
▣ 의금부도사 김공 의인 심씨 합장 지명 병서 ▣
--내가 일찍부터 이공 윤경(李公潤卿)을 종유하면서 공의 소개로 그의 장인 김공(金公)과 친분을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김공은 대체로 진실하고 화평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였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술과 음식 등을 모두 정결하고도 넉넉하게 장만하여 대접하였고 비복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근신하여 법도가 있었으니, 따라서 공에게 현명한 내조(內助) 가 있어 돕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다. 김공이 세상을 떠나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공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슬프게 여겼다. 그리고 부인으로서 몸가짐을 잘하고 정절을 지킨 이를 손꼽아 말할 적에는 반드시 김공의 부인을 제일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난날 보아 알고 있는 것에 징험해 보면 더욱 믿을 만하였다.
--어느 날 윤경(潤卿)씨가 아들 민구(敏求) 를 시켜 김공의 행장과 부인 심씨의 훌륭한 행적을 함께 기록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그 아들의 뜻입니다.” 하였다. 내가 김공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윤경과도 통가지의(通家之誼)가 있으며 그 아들 역시 망년(忘年)의 친구일 뿐만이 아니고 보면 어떻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상고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고, 공의 휘는 대섭(大涉), 자는 사형(士亨)으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그리고 원조(遠祖)인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은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고려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휘 구용(九容)은 문장과 절의로 명성이 당대에 드높았는데 이분은 바로 공의 7대조이다. 고조 자양(自壤)은 내섬시 첨정으로서 호조참의에 추증되
었고, 증조 예생(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윤종(胤宗)은 경상도 절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휘 진기(震紀)는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지냈으며, 어머니 이씨는 여흥(驪興)의 명문 거족으로서 생원(生員) 민생(敏生)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 4)에 공을 낳았는데 3세 때 양친을 여의고 고모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에 주력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자 사람들이 곧바로 벼슬길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담박함을 지키어 마치 세상일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임진년에 병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영북(嶺北)으로 피난갔다가 이어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 에 갔다.
--계사년에는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에 옮겨 졌다. 이때에 동정(東征)나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 기세를 부렸으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엄중히 규율을 지키는 제부(諸府) 중에 으뜸이었다.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가 빈접사(□接使)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특별히 공을 추천하여 그의 관속(官屬)으로 삼았는데, 공이 모든 일을 힘껏 조치하여 복잡한 상황을 여유있게 처리하였으므로 해평공이 공의 재능을 자주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과로로 인하여 병이 나서 갑오년 여름에 서울 객사(客舍)에서 별세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46세였다. 난리로 인하여 임시로 수원(水原)에 장사했다가 8년이 지난 신축년에 영평현(永平縣) 남쪽 선산에서 2리(里) 떨어진 종현산(鍾賢山) 미좌(未坐) 축향(丑向)의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공은 순박하고 성실하고 후중하여 집안 사람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자제들을 엄하게 교육시켰으며, 몸가짐에 있어서나 남을 대할 때나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하여 물아(物我) 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아는 사람은 모두가 친애하고 연모하면서 스스로 공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타고난 효성과 우애를 종족에게까지 베풀었으므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을 당해서는 일찍부터 재계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장만하였으며 절차와 의식을 모두 선현(先賢)의 예제(禮制) 에 따라 시행하였다. 항상 부모가 생존했을 때 섬겨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어 부모에 언급이 될 적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모(庶母)가 낳은 누이가 갈 곳이 없게 되자 비복을 나누어 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서출(庶出)의 사촌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러주었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다만 집에 들어앉아 유유자적하며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마냥 취하여 다분히 즐기기도 하였다. 품성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서호(西湖)에 조그만 집을 지었고 또 영평(永平) 우두리(牛頭里) 연못가에 있는 정사(精舍)를 사서 노년(老年)을 보낼 계획을 하였다.
--공이 이처럼 순박한 심성(心性)을 지니고 있는데 다가 심씨(沈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심씨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빼어나고 성실하여 무리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부군을 섬기는 데는 한결같이 유순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었고, 일가 친척을 대해서는 항상 화목하여 간격이 없었으며, 규중 규범이 엄숙하였고 성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며, 빈객을 접대하거나 궁핍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데 있어서도 가각도리를 극진히 하여 인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도 푸닥거리하는 무당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는데 아들이 천연두를 앓아 위태롭게 되자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를 권하니 이에 부인이 대답하기를 “기도할 만한 신(神)이 있다면 우리 선조(先祖)만한 신이 없을 것이다.”하고, 가묘(家廟)에 기도한 결과 아들의 병이 과연 나았다.
--공의 상을 당하고부터는 죽기로 맹세하여 미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전(奠)을 올릴 적에는 초상 때처럼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대상(大祥)을 치르고도 때묻은 얼굴에 죄인의 머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지없이 애통해하고 죽만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6, 7년 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뼈만 남도록 몸이 야위어 기절을 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도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아들 확(□) 이 울면서 간하여 서울 집으로 모셔왔으나 의복이며 일상 생활에 있어 상복 중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 언젠가 확(□)이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벼슬을 하면 왕의 신하인데 어떻게 어미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겠는가.”하자, 확도 역시 관직에서 떠났다.
--심씨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무신년 4월에 끝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죽은지 15년이 되는 해로서 향년은 60세였다. 부인은 임종 때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직 선영(先塋)을 보호하고 가묘(家廟)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만 부탁하였다. 의인(宜人) 같은 분은 몸가짐에 있어 근신하였고, 훌륭한 명성을 끝까지 지닌 분이라고 이를 만한다. 이해 9월에 공과 같은 무덤에 합장하였다.
--심씨는 관향이 청송(靑松)으로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예인데, 후손이 혁혁하여 대대로 왕비(王妃)가 탄생하였다.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지낸 조부 달원(達源)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경기 감사를 지낸 아버지 전(銓)은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자헌대부 예조판서 청파군(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이다.
--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확(□)은 18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고, 천거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받았지만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정승 정언신(鄭彦信)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고, 큰 딸은 이수광(李□光)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수광은 바로 윤경공(潤卿公)으로서 대각(臺閣)을 거쳐 지금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며 청아한 명망으로 세상에 모범이 되고 있다. 이공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성구(聖求), 차남은 민구(敏求)이고 , 딸은 진사 권경(權儆)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아, 공 같은 훌륭한 덕과 의인 같은 현숙(賢淑)함으로 복록을 누리지 못하고 끝내 여기에 그쳤으니 하늘이 선인(善人) 에게 보답하려는 것이 무엇이던가. 아마도 비축하여 내놓지 않다가 후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길고도 높은 봉분 / 坎而封
--철인이 묻힌 곳이로다 / 哲人之藏
--순하게 살다가 편히 잠들었으니 / 順而寧
--하늘의 상도를 얻었도다 / 得天之常
--번창한 후손들이 바로 / 茁于後
--그 보답받는 것이리 / 惟報之食
--묘도에 지명 새기니 / 賁諸幽
--그 행적 우뚝하여라 / 其迹之卓
《출전 : 상촌선생집 제24권 묘지명》
※ 의정부도사 대섭공은 맏 사위가 천주실의를 소개한 지봉유설로 유명한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고, 둘째 사위는 허난설헌의 친 동생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입니다. 교산 허균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고 조선조에서 끝까지 신원이 되지 못한 관계로 본 묘지명에서도 언급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 신흠(申欽) [1566~1628] ▣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소인수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 ·사복시 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 ·이조참의 ·예조참의 ·병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 ·병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도승지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 ·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
▣ 이수광(李磎光) [1563~1628] ▣
--명종 18년∼인조 6년(1563∼1628). 향년 66세. 조선 중기 문신·실학자.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 태종의 7세손으로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선조 15년(1582) 진사가 되고 1585년 별시문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으나 용인(龍仁)에서 패하였다. 그 후 의주로 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지방에서 큰 공을 세웠다. 지평·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주청사(奏請使)로 연경(燕京)에 내왕하였는데 당시 명(明)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神父)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중국인 유변(劉변) 등이 지은 《속이담(續耳譚》 6권을 가지고 돌아와 한국에 최초로 서학(西學)을 도입하였고,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서양의 사정과 천주교 지식을 소개하였다. 특히 《지봉유설》은 당시 주자학적 세계관을 지녔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에 접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광해군 5년(1613) 이이첨(李爾瞻)이 대옥(大獄)을 일으켜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순천(順天)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지봉유설》 《채신잡록(采薪雜錄)》 《해경어잡편(解警語雜篇)》 《잉설여편(剩說餘篇)》 《승평지(昇平志)》 《병촉잡기(秉燭雜記)》 《찬록군서(纂錄群書)》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 이성구(李聖求)[1584~1643] ▣
--본관 전주(全州). 자 자이(子異). 호 분사(汾沙). 시호 정숙(貞肅). 1603년(선조 36) 진사를 거쳐 160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典籍), 예조·병조·형조의 좌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교리(校理)가 되었을 때, 마침 부친 수광(磎光)은 대사헌, 아우 민구(敏求)는 홍문관에 있었으므로 한 집에서 3인이 삼사(三司)를 지내게 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의 문제로 반대파의 모함을 받자 지평(持平)으로서 이들을 물리치고 이항복을 도왔다. 그후 영평(永平)판관으로 포천(抱川)에 이항복의 사우(祠宇)를 세웠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초에 사간에 발탁되고 대사헌을 거쳐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세자가 볼모로 선양[瀋陽]에 가게 되자 좌의정으로 이를 수행하였다.
--그후 한때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사은사로서 회은(懷恩)대군과 함께 선양에 가서, 명나라를 치는데 원군(援軍)을 보낼 수 없다는 조정의 방침을 전달하였다. 이듬해 돈령부영사로 사신이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41년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저서에 《분사집》이 있다.
▣ 이민구(李敏求) [1589~1670] ▣
--본관 전주(全州). 자 자시(子時). 호 동주(東洲)·관해(觀海). 1609년(광해군 1) 진사가 되고 1612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수찬(修撰)·지평(持平)·선위사(宣慰使)·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1623년(인조 1)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이듬해 이괄의 난 때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난을 진압했다.
--1626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정묘호란 때 병조참판으로 세자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했다. 1636년 이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쳐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려 하였으나, 적군이 어가(御駕)의 길을 막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후에 돌아와 경기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강화 함락의 책임으로 아산(牙山)에 귀양가고 1643년 영변(寧邊)에 이배(移配)된 후 1649년 풀려났다.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사부(詞賦)에 능했다.
--저서에 《동주집(東洲集)》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 《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있다.
▣ 솔내영환 - 원문까지.... 감사합니다.
▣ 김상석 - 조목조목 밝히는데 있어 거침이 없어 더이상의 찬사가 불필요 하네요!.
▣ 김윤식 - 자세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이윤경=이수광,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김항용 - 워드화, 그것도 한자로의 전환 작업은 엄청난 노고를 동반하는데---, 이 자료를 본 홈 어디에 넣어드리는 게 좋을지요?
▣ 김주회 - 귀한 자료!! 자세한 자료!! 엄청난 자료!! 즉시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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